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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실이 Jan 07. 2024

폭풍전야였던 연애

연상연하의 연애. 30대의 철없는 연애.

오늘 내가 사는 지역엔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졌다. 신파 찍고 싶지는 않지만 괜스레 마음이 울적하다.


오늘로써 그와 헤어진 지 7주째- 지난 7주를 어떻게 견뎌왔고 참았는지 매일매일을 정신병자인 것 마냥 살았다. 하필 미국에서 가장 큰 휴일들 (추수감사, 크리스마스, 새해)을 혼자 보내는 게 고역이었다. 심지어 다음 주는 C의 생일.


이별한 사람들은 다 같을까?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잠들기까지 그 사람의 생각을 비워내기가 가장 힘들다. 일에 열중하더라도 그건 잠시일 뿐 예전 추억이, 헤어지던 그 순간이, 또 그가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을지 상상을 하기 시작하면 정말 내 뇌를 셧다운 시키고 싶을 지경이다.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이 유효하다는 건 모두 다 아는 사실. 그런데 힘든 시간은 정말 느리게도 간다. 매초가 피부로 느껴지고 매분이 숨쉬기 힘들 때도 있다. 너무 모든 걸 다 걸고 뜨겁게 했던 사랑은 이젠 너무 아프고, 비참하고,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공황장애를 남겼다.


내 작가명을 '공실이'로 한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C와 정식으로 사귀기 시작한 날 우리의 첫 데이트로 쥬라기공원을 테마로 한 전시회를 갔었다. 워낙 내가 어렸을 때부터 공룡을 좋아했고 사춘기 시절 공룡상 남자들을 좋아하다 보니 (별로 불필요한 정보이지만) 그가 사는 지역에 쥬라기공원 전시회를 하는 것을 보고 너무 신나서 티켓팅을 바로 했었다. 꽤나 그럴듯하게 꾸며놓은 전시회에서 기념으로 처음 커플사진도 찍어보고 근사한 곳에 가서 밥도 먹고 산책했던 기억이 있다. 연하남과 사귀게 되면 가장 먼저 드는 걱정은 호칭이다. 나보다 어린 남자이지만 그래도 남성스러움을 지켜주려면 (?) 야, 너, 또는 이름보단 애칭을 사용하는 게 더 나을 거라 생각했다. 근데 첫날부터 자기야는 그와 내 성격에 맞지 않고 차라리 애칭을 지어보자라는 생각에 그는 둘리, 나는 둘리 여자친구인 공실이로 결정되었다.



많은 연인들이 그렇듯 처음 3-6개월은 그저 행복 그 자체이다. 특히 우리는 둘 다 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의견차이가 있거나 조금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있으면 차분히 이야기하는 타입들이어서 처음 일 년 동안 단 한 번도 다투거나 언성을 높인 적이 없었다. 장거리 커플이기에 매주 번갈아 가며 차로 2시간 반 운전해서 서로를 볼 땐 반강제적으로 반동거를 할 수밖에 없었고 우리 둘 다 사는 지역에 친한 친구들이 없었기에 둘이 보내는 시간이 정말 많았다. 둘 다 대학교에서 일하는 직업이어서 가르치는 날을 피해 매주 못해도 3일에서 4일은 꼭 같이 붙어있었다. 주위에선 둘이 정말 대단하다고 매주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은데 정말 사랑하나 보다 라며 신기해했고 우리는 보면 볼수록 더 애정이 깊어졌고 더 많이 표현했었다. C는 연하 같지 않았다. 외관상으로도 그랬기도 하고 (그렇다고 내가 동안이란 건 절대 아니다) 나보다 먼저 부모님에게서 경제적으로 독립했었고 다양한 생활환경에 있던 그라 배울 점이 많았다고 생각했고 굉장히 다방면에서 잘 리드해 줬다.


내가 꽃을 좋아해서 내 연주회에 맞춰 꽃다발을 사 오는 그를 보며 행복했다. 그는 다부진 성격을 가졌지만 섬세하지는 않았기에 그가 먼저 알아서 해주길 기다리는 것보단 내가 원하는 것들을 알려주면 바로 입력하고 응용했던 사람이었다. 이런 건 내가 좋아해, 이런 건 조금 고쳐줬으면 좋겠어- 하면 자기 기준에서 수용할 수 있는 만큼 하고 말과 행동으로 바로 옮기 줄 아는 남자였다. 나는 화려한 꽃보다 튤립이나 작약 같은 꽃을 좋아했기에 그는 튤립을 평소에도 많이 사다 줬었다 (아쉽게도 우리가 사는 지역은 더워서 작약을 꽃집에서 보기 힘들었다). 과학 쪽을 공부하던 그였기에 로맨틱과는 거리가 먼 남자인 줄로 알았지만 막상 꽃을 사 와 꽃병에 담긴 모습을 보면 나보다 더 좋아했던 그였다. 어쩌면 생각보다 이 남자는 더 감정적이구나?라는 계기를 사귄 지 6개월 후부터 알게 되었다. 처음 나에게 꽃을 주던 그는 단 한 번도 여자에게 꽃을 사준 적 없다며 어색해했지만 그 모습마저 귀여웠다. 예를 들면 밸런타인데이에 근사한 레스토랑도 좋긴 하지만 직접 맛있게 구운 스테이크와 랍스터에 장미꽃을 예쁜 꽃병에 담아 세팅하고 "해피 밸런타인데이 공실아!" 하던 모습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더위가 많은 그는 스테이크를 굽느라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그 추운 2월에 나시를 입고 분주하게 주방에서 이것저것 만들어냈다.


그는 항상 내게 줄 선물을 고를 때 고민에 빠졌었다. "자기는 필요한 게 없어 보이는데... 내가 좀 더 생각해서 찾아볼게!" 하며 실용적인 선물을 해주거나 경험을 선물해 주는 것을 좋아했다. 별거 없어 보이지만 맞벌이 때문에 바쁘셨던 부모님 때문에 나는 어렸을 적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야외활동을 많이 해보지 않아서 C와의 연애는 정말 다양한 활동이 많았다. 악기를 다루는 사람이라 여기저기 근육이 뭉칠 때가 많아 그는 내가 스파와 마사지를 받게 해 줬고 처음 해보는 등산도 가르쳐주었다. 그와 산책하면서 별자리도 보고 난생처음 반딫불들도 보고, 다양한 동물도 보고 유치한 것 같지만 그 모든 게 소소한 행복이었다. 서로의 집에서 반동 거를 했기에 각자의 집엔 서로의 물건이 많았고 둘 다 요리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기에 지루하지 않았다. 영화 보기, 콘서트 보러 가기, 산책 가기, 전시회 가기, 꽃구경 가기, 동물원 가기, 여행 가기 등등 참 재미난 연애였다. 많이 붙어있는 만큼 서로가 할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응원해 주었고 서로 떨어져 있을 땐 하루의 일과를 마친 저녁에 못해도 한 시간씩은 매일 전화했었다. 지금은 조금씩 적응해가고 있지만 내가 가장 힘든 건 그의 하루가 어땠는지 아무것도 물을 수 없고 알아선 안 돼야 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거다. 내 삶의 모든 것을 공유하던 사람이 하루아침 사라지는 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허함과 상실감을 느끼게 한다. 이건 이별통보를 받은 또 한 사람 둘 다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어제까지만 해도 온 세상 사랑을 다한 사람이 사라진 것에 대해 괜찮을 수 있을까?

(파란 꽃 축제에 가서 쉬고 있던 우리를 어떤 아주머니께서 멀리서 사진을 찍어주시곤 우리에게 다가와 둘이 행복하고 아름다워 보여서 찍었다며 우리에게 건네주신 사진이다)

드라마도 정말 많이 봤다. 우리는 다양한 영상을 보는 것을 좋아해서 영화, 다큐멘터리, 유튜브 영상, 예능, 그리고 드라마를 많이 봤다. 같이 봤던 드라마 중에 슈룹이 제일 재밌었고, 가장 즐겨본 연애프로는 환승연애 2와 돌싱글즈 3였다. 그때는 정말 몰입해서 봤던 것 같다, 특히 환승연애. "만약 우리가 헤어지게 되면 환승연애에 나갈 수 있을까?"라고 물었을 때 그는 "우린 절대로 나가면 안 돼. 다른 사람들과 데이트 나가고 시간 보내는 거 보면 우린 못 견딜걸?"라고 대답했었다.


난 글 쓰는 것을 좋아한다. 어렸을 때 이민 와서 한국말이 좀 서툴긴 하지만 손 편지를 쓰는 것을 즐겨해 C에게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내 생각을 담아 편지를 자주 써주었다. 난 주는 사랑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그가 나에게 자주 편지를 써주지 않아도 서운하지 않았다. 지금 내게 남아있는 그의 손 편지는 네 개다. 하나는 내 생일편지, 하나는 아주 간단한 메시지, 하나는 이별편지, 그리고 하나는 혼인신고 직전에 써준 편지.


바보 같지만 아직도 그 몇 안 되는 네 개의 편지를 정리할 수 없다. 더 이상 서로에게 돌아가지 못할 사이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버릴 수가 없다. 핸드폰에서 사진들은 지웠지만 구글 드라이브에 다 옮겨놓고 이 사진들을 하나둘씩 꺼내 볼 때면 말로 표현 못할 감정이 치밀어 오른다.




2023년 5월 말 첫 번째의 이별을 하고 우리는 헤어진 후에도 일주일을 같이 지냈다. 이별여행? 같은 건 아니지만 그냥 남은 시간 원 없이 감정 털어놓고 후회 없이 더 사랑해 보자 라는 이상하지만 우리에겐 납득이 되었던 시간들을 보냈다.


"난 사실 누구 손잡는 거 안 좋아해. 난 원래 누구랑 몸에 닿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근데 자기랑은 항상 손 잡고 싶었어. 우리 엄마 포함한 어느 여자한테도 꽃 한번 안 사줘 봤던 사람이 꽃도 사보고, 말도 예쁘게 하려고 노력하고, 그 누구도 날 바꾸게 한 적 없는데 자기는 그걸 다 하네."


나와 만나며 많은 것들을 그 또한 부단히 노력했단 건 알았다. 30년 넘게 다른 나라에서, 다른 환경에서 자라온 사람들이 어떻게 다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는 서서히 서로에게 마음이 커졌었고 행복했던 시간만큼 힘든 시간도 같이 견디느라 사랑과 전우애가 있었다. 그의 부모님의 결혼 반대라는 전쟁에서 우린 방패 하나 없이 무기만 들고 온몸으로 살을 도려내는 아픔을 고스란히 겪어야 했고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자꾸만 팔 하나, 다리 하나를 잘라내는 그분들 때문에 결국 나는 불안감과 공포가 극에 달했고 그는 강경한 공격을 버틸 수 없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2년이란 시간을 한 사람과 지내오면서 너무나 많은 습관들이 생겼다. 서로의 침대에 오른쪽은 그의 자리, 왼쪽은 나의 자리. 높은 베개를 베고자던 나와는 달리 베개가 낮거나 없이 자는 것을 선호한 그라 나도 자연스레 낮은 베개를 이제 더 선호하게 되었다. 일어나자마자 커피를 마시던 나는 음식섭취 후 최소 30분이 지나고 커피를 마셔야 섭취한 영양분이 충분히 흡수된다는 그의 조언에 그것마저 바뀌게 되었고 자기 전에 핸드폰을 달고 살던 나는 침대에 누울 때 이제 핸드폰을 다른 곳에 두고 잠이 들 때까지 사용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가 연구를 위한 논문을 쓰고 있을 때 나는 내 악기를 연습했고 일을 하다가 지루해지거나 심심해지면 서로 괴롭히기도 하고 괜스레 뽀뽀도 해보고 놀라게 하기도 하고 철없는 아이들같이 연애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별거 아닌 거에도 설레고 좋고 행복했지.


미국에서 하는 연애를 보면 대부분 공식적으로 사귀자 또는 만나자라는 말없이 자연스레 호감을 표시하다 잠자리를 하고 시간을 지내다 보면 서로의 지인들과도 만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사랑한다 말하고 그러다 약혼을 하고 결혼까지 이어진다. 우린 외국에서 지낸 시간이 많았지만 그래도 한국적 성향이 있기에 공식적으로 사귀고, 친한 친구들이 많이 없어 만나지는 못했지만 친구들과 가끔 통화도 해보고, 자연스레 사랑한다 말했다. 츤데레 C는 나에게 사랑한다 라는 말을 하기까지 무려 4개월이 걸렸다. 솔직히 여자친구로서 사랑한다 말 듣고 싶은 건 당연한 거다! 나는 말로 표현하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인데 상대방이 맞장구를 쳐주지 않아서 하루는 서운하다고 털어놨더니 "나는 사랑한다는 말을 정말 아끼고 싶어. 그냥 매일 해버리면 무게감이 없잖아. 조금 덜 하더라도 큰 의미를 가진 뜻으로 하고 싶어." 난 알겠다고 했지만 삐졌었다. 그리고 얼마 안 지나 그가 사랑한다라고 했을 때 난 정말 기뻤다. 아, 이 남자가 정말 나를 사랑하는구나. 그 의미가 큰 거구나. 한번 물꼬가 트니 서로 말로 표현하는 애정표현은 날마다 늘었고 둘 다 내 사람을 찾은 것 같다고 털어놨다.


우린 서로를 만나 처음 해보는 경험들이 많았고 그래서인지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들, 가구들, 공간엔 그의 흔적이 가득하다. 그 또한 마찬가지일 테고. 오히려 나보다 그가 더 괴로울 거다. 정말 그의 모든 것에 내 손이 닿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난 그에게 헌신적이었고 그도 그런 나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부단히 잘해주려고 했다. 그런 부분에 있어 나는 그에게 고맙다. 그의 연애사를 들어봤을 땐 누군가에게 맞춰주거나 자신의 한계치를 넘어서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단기연애나 썸이 더 많았던 그와 무려 2년을 사귀었으니 그도 이번 연애를 통해서 많이 느꼈다 생각한다. 난 그에게 선물해 주는 걸 좋아했고 나는 조교수였지만 (연봉 정말 작다) 그는 포닥이였기 때문에 혹시나 돈낭비 할까 그의 집에 머물 때 그 전날 저녁이나 새벽 6시에 일어나 도시락을 싸주었다. 우렁각시 같았다고 해야 할까? 그가 일하러 학교에 가있을 때 나도 내 할 일 하다가 그의 퇴근시간에 맞춰서 대충 뭘 할지 플랜도 해보고 때론 맛있는 것도 미리 해놓고. 참 어린 여자애들이 소꿉놀이를 하듯 결혼놀이를 한 것 같았다. 아니, 그때의 난 미리 결혼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있었던 거다. 우리가 결혼을 하면 이런 생활이겠지? 너무 재밌고 행복하다! 근사한 레스토랑들도 가긴 했지만 아재 입맛을 가지고 있던 C덕분에 나도 점점 그런 음식들을 즐기게 됐고 건강에 굉장히 예민한 그 덕분에 운동도 꾸준히 하며 영양제도 잘 챙겨 먹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그를 만나고 사랑을 하며 같이 생활을 하면서 내가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여자였다는 걸 처음 자각했고 이상하게도 강한 확신이 들었다. 이 남자가 내 남편이 되고 내 아이의 아빠들이 될 수 있다고. 난 그가 똑똑해서 좋았고, 적당히 예의 바르며 친절하고, 남들에겐 차가워 보이지만 나에게만큼은 다정하고 장난꾸러기 같고 댕댕이 같아서 좋았다. 그는 늘 나에게 자기를 감당하는 여자는 내가 처음이라며 배울 점이 많고 대화가 잘 통하며 사랑받고 자란 모습에 결핍이 없는 여자라 너무 좋고 사랑스럽다고 했다. 우린 그게 유지될 줄 알았다.


2022년 12월 31일. 난 그에게 "우리 이제 더 먼 미래를 같이 계획할까?" 했을 때 그의 대답은 "자기라면 미래를 잘 그려 나갈 수 있을 것 같아."였고 그때부터 우린 살짝의 걱정도 했지만 행복함이 더 클 거라 생각하며 서서히 플랜들을 실행해 나갔다.


2023년 1월 8일. 헬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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