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저 주간지 'FRIDAY' (중앙일보) | 여행 아티클
지난 여름, 내가 산을 탔다.
그것이 무어 그리 놀랄 일이라고 핀잔주는 사람이 대부분이겠지만, 내게는 역사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선천성 마운틴포비아’ 중증 환자다. 일단 '산山'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가슴이 답답해지고 호흡곤란 증상과 함께, 다리에 힘이 풀려 한걸음도 내딛기 힘들어진다. 수학여행 간 설악산에서도 중턱도 못간채 내려왔고, 제주도에서 가서는 한라산에 발도 들이지 않았으며, 대학시절 산으로 가는 엠티는 온갖 핑계대고 빠졌다. 그토록 역마살이 끼어 돌아다니면서도, 산이라면 왜 그렇게 온몸에 거부반응이 이는지 알수가 없었으니, 그저 운명이라고 여겼다.
구성작가 시절 여행 프로그램을 하면서도 여행지 아이템으로 산을 절묘하게 걸러냈지만, 나보다 더 집요한 담당 PD 때문에 촬영지에서 초죽음이 된 적도 여러번이다. 암튼 그렇게 내 기억 속에 산은 피해다녀야 하는 장애물 같은 것이었다. (물론 산악인이나 등반가들이 들으면 천노할 일이긴 하지만.)
그런 내가 산을 탔으니 어찌 놀랄 일이 아닌가. 게다가 언덕 하나 찾아보기 힘든 평지와 초원의 나라, 영국에서 말이다. 휴 그랜트 주연의 <잉글리쉬맨>에도 있지 않은가. 남부 웨일즈 어느 마을, 웨일즈 지방의 최초의 산으로 기록되고픈 마을 사람들과, 지도제작자인 주인공과의 헤프닝 말이다. 있어봐야 우리네 산에 비하면, 언덕 정도에 지나지 않는 그들의 산이지만.
각설하고, 산에 오르게 된 연유는, 지난 여름 영국 관련 단행본 도서에 수록될 사진 촬영일 때문이었다. 영국의 다양하고 색다른 의식주 문화를 카메라에 담는 일로, 여행 좋아하고 사진 좋아하는 나로서는 더할나위 없는 일이었다. 촬영이 한창 진행되는 도중, 영국이라면 드넓은 초원 느낌이 나는 부감샷 하나쯤은 필수라는 주문에, 산에 오르게 된 것.
이른아침부터 영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역으로 꼽히는 잉글런드 우스터셔 지역의 말번으로 향했다. 점점 가까이 갈수록, 가슴이 답답하고 숨쉬기도 힘들어져 가는데..... 말번 힐즈가 저멀리 보이는 순간, 속으로 씩 웃어버렸다. 그 완만한 경사가 학교 뒷산보다 더 낮아보이니, 만만해보일 수밖에. 게다가 험준한 우리나라의 산만 올려다보던 나로서는 마음까지 가벼워졌다.
그러나 선천성 마운틴포비아가 어딜 가겠는가. 실제로 걸음을 옮겨 보니, 가도가도 끝이 없고 어깨에 맨 카메라는 천근만근, 아 누가 이걸 언덕이라 하겠는가. 소설가 이윤기씨의 말이 떠올랐다. 산이란 그 모습이 하나가 아니다. 지나가면서 보는 산이 다르고, 지나오면서 보는 산이 다르고, 다가서면서 보는 산이 다르고 물러나면서 보는 산이 다르지 않다 했다. 그렇지, 산은 어디까지나 산인 것을.... ! 왜 산에 난 길들은 곧게 뻗어있지 않고 구불구불 구비쳐 올라가야 한단 말이냐!
숨이 한참 차오르고 이미 저만치 앞선 선발대를 바라보며 힘겹게 한발 한발 내딛는데, 어느 순간, 주변이 슬슬 보이기 시작했다. 얼굴에 스치는 바람, 많은 이들이 오랜 세월동안 남겨놓은 발자욱을 따라 난 작은 길, 길섭에 난 갈대와 들꽃, 손만 내뻗으면 닿을 것같은 하늘과 구름,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영국 초원의 풍광. 아, 아름다워라. 절로 감탄이 나왔다. 나는 그렇게 산과 인사하고, 길과 인사를 나눴다. 이미 고지에 오른 파트너들은 손을 흔들고, 어서 오라고 손짓해주니 내겐 또다른 응원과도 같았다.
마지막 걸음을 떼어 정상에 오른 순간, 짜릿한 현기증과 함께, 가슴 밑바닥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밀려올라왔다. 아마도 히말라야의 모든 봉을 점령한 산악인의 마음이 이렇지 않았을까! 온몸에 흐른 땀이 몰아치는 바람에 순식간에 식고, 온 천하를 얻은 듯한 뿌듯함과 발 아래 펼쳐졌다. 내 인생에 가장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또한 이미 오래 전부터 자연과 하나되어 그속에 있었던 듯한 느낌이었다.
이제야 알았다. 사람들이 산에 오르는 이유를. 마음을 비우고 오르면, 마음이 가득 채워서 내려오게 된다는 것을. 그것도 영국의 말번 힐에서 말이다. 이번 주말, 동네 뒷산부터 차근차근 밟아봐야겠다.
글∙사진 | 정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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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우스터셔 주에서는 제일 높다는 이 말번 힐즈는 높이 425m로, 360도 파노라마로 펼쳐진 풍광이 압권이다. 영국의 자연경관 보호구역으로 지정될 만큼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고, 정상에서 13개 주의 일부를 비롯해 브리스톨 해협까지 굽어볼 수 있다.
산 정상에는 1897년 빅토리아 여왕의 다이아몬드 주빌리(60주년)를 기념해 만든 비컨(사진)이 세워져 있고, 토포스코프(toposcope)라고 불리는 장치로 멀리 있는 랜드마크를 식별할 수 있다.
저 높이마저도 내건 벅찬 등반이었는데, 한 정상에 덜렁 이 비컨만 있어 적잖이 실망했었음. 알고 보니 엄청 의미 있는 유적이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