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심리학자의 가을 출사론

레저 주간지 'FRIDAY' (중앙일보) | 기획특집 '가을출사' 오프닝

by 정윤희
©Jeong Youn Hee

아, 가을이다. 자고로 봄볕에는 며느리를 내보내고 가을볕에는 딸을 내보낸다는 말이 있다. 봄볕은 강하고 그을리면 좀처럼 회복되기 힘들지만, 따사롭고 쾌적한 가을볕은 잘 그을리지도 않고 건강에 좋은 햇살 샤워를 하기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디카족들이라고 예외겠는가. 딸처럼 애지중지하는 디카 들고 오곡백과 풍성한 산으로 들로 뛰어나가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가을날의 출사를 스스로의 몫으로 배당받으려면 말이나 생각보다는 행동과 실천이 앞서야만 하다. 그러나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가을 출사를 권장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따져보겠다.


기억상실증

뇌에 손상을 입거나 큰 충격으로 자신의 기억을 잃어버리는 병이지만, 현대인들의 대부분 크고 작은 건망증이 자라 기억상실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아주 먼훗날 누군가 2004년 가을의 기억을 묻는다면 어느 누구도 답하지 못한다. 그러나 출사를 부지런히 다닌 당신, 디카 파일 속에서 손쉽게 그 기억을 찾아낼 수 있다.


스톡홀롬 증후군

인질로 잡힌 사람이 인질범들에게 동정심을 느끼면서 동화되는 증후군. 마찬가지로 디카족들이 출사에 사로잡혀 자꾸 애인을 바람맞히고 카메라만 데리고 떠날지라도, 애인들은 디카족들의 사진실력이 월등히 향상되고 틀림없이 만족스런 결과물을 가져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면서 출사에 동화되어, 오히려 적극 권장하는 효과를 낫는다.


플라시보 이펙트

두통을 호소하는 환자에게 비타민제를 두통약으로 주어도 통증이 사라지는 효과를 보는 것으로, 일명 가짜약 효과로도 불린다. 그러니 디카에게 일년 내내 햇볕 한번 안 보여주고 셔터 한번 어루만져주지 않아도, 운치 있고 화려한 가을에 출사만 나가준다면 주인님을 용서하는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연히 가을 출사를 나가 주어야만 한다.


샐리의 법칙

머피의 법칙과는 상반된 개념으로, 우연히 하는 일마다 잘 되고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경우를 말한다. 가을에 출사를 가게 되면, 국화를 찍으러 갔는데 단풍사진까지 찍게 되거나 혼자 출사 나온 예쁜, 혹은 멋진 출사 친구를 만나는 경우도 왕왕 발생하고, 수확의 계절이라 피사체에 굶주린 디카족에게는 안성맞춤이다. 출사 결과물은 각종 가을사진 콘테스트에 입상하여 부상에 상금까지 얻는 운이 겹치기 일쑤다.


귀차니즘

아직 의학계 정식 병명으로 인정된 바 없으나,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어할 정도로 만사 귀찮아하는 일종의 게으름뱅이 증후군. 가을은 일조량이 확 줄어 소위 말하는 ‘가을을 탄다’라는 우울증상이 늘고 행동이 많이 느려지는데 바로 귀차니즘이 기생하기 좋은 최적의 조건이다. 뿐만 아니라 천고마비의 계절을 증명이라도 하듯 식탐이 하늘을 찌르니 늘어난 몸무게만큼 귀차니즘에 허덕일 터, 여기에 가장 안전한 처방이 ‘출사’다. 운동량이 많아 건강해지고, 디카 속엔 알찬 사진들이 꽉 차오르니 출사야말로 일석이조의 처방전이다.


해마다 기상이변으로 봄 가을이 유난히 짧아지는 까닭에, 올해는 훨씬 더 부지런히 나서야 한다. 괜히 디카를 손에 쥐고도 실력탓, 장비탓만하는 소심함에 화려한 가을과 맞짱도 한번 못 떠본다면 당신은 심리학자의 시각에서 볼 때 과감히 디카와 이별해야 할 것이다.

출사는 나간 횟수와 돌아다닌 거리를 기준으로, 만족스런 결과물을 얻을 확률이 높아지고, 실력이 늘어난다는 다출사득수작(多出寫得秀作) 법칙에 의거하여, 남녀노소 불문하고 부디 디카 들고 가을을 담아보자. 혼자라도 좋고, 둘이면 더 좋고, 단체로 몰려다니면 더 유익하다. 가을 안에 출사 있다!!!



글 | 정윤희 (칼럼니스트∙포토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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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지금은 스마트폰이 카메라 영역을 거의 커버했지만, 당시 '디카'는 힙의 대열에 막 올라서던 때였다. 당시 사용했던 기종은 캐논 D60 카메라로, DSLR의 포문을 열었던 장본인이다. 구입 당시 4백만 원을 호가하는 데다가 국내엔 몇대 들어오지도 않아, 지인의 지인을 통해(당시 캐논카메라는 LG에서 정식수입하던 때라, LG인맥 총동원해 겟) 어렵게 거머쥔 명작 카메라였다. 내 동료로서 엄청나게 많은 양의 일을 성실하게 마치고, 후임 5D에게 자리를 내주고 명예롭게 퇴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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