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書深刻競纍纍(대서심각경루루)
바위에 큰 글씨로 깊이 새겨 남겨도
石泐苔塡誰復知(석륵태전수부지)
돌이 부서지고 이끼 끼면 누가 알아볼까
一字不題崔致遠(일자부제최치원)
한 자도 새기지 않은 최치원이건만
至今人誦七言詩(지금인송칠언시)
지금까지 사람들은 그의 칠언시를 외운다네
紅流洞戲題(홍류동희제) / 이건창
최치원의 독서당이 있는 가야산 홍류동에서 지은 시다. 최치원을 빗대어 허명을 중시하는 소인배들을 조소하고 있다. 일부 현대인들의 명품 선호 현상도 마치 바위에 이름을 새기는 것 같은 행위가 아닐까.
‘쪼는 순위’란 동물 간의 서열을 뜻한다. 그건 닭에서 이런 현상이 처음으로 발견됐기 때문이다. 닭은 서열이 높은 개체가 서열이 낮은 개체를 쪼아댄다. 즉, A라는 닭이 B를 쪼고, B가 C를 쪼는 식이다. 이럴 경우 이 무리의 서열은 A-B-C 순이다. 특이한 것은 C의 경우 자신을 쪼았던 B가 A에게 마구 쪼이는 것을 보면 A가 건드리지 않아도 절대 대들지 못한다.
동물들이 서열을 정하는 건 먹이와 암컷에 대해 우선권을 갖기 때문이다. 또한 위계질서를 통해 공격적인 갈등을 피함으로써 집단의 질서 유지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꼭 필요하다. 그런데 집단생활을 하는 고등 척추동물의 경우 서열을 정하는 기준이 좀 더 복잡하다.
원숭이를 예로 들면 공격적인 개체보다는 다른 원숭이들로부터 가장 많은 호의를 얻는 개체가 높은 서열을 차지한다. 즉, 사교성과 사회적인 성격이 서열을 결정하지 닭처럼 공격성이 서열을 결정하는 게 아니다. 다른 집단의 공격으로부터 암컷들을 보호하고 새끼 원숭이들에게 아량을 베풀 줄 아는 개체라야 전체 집단을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높은 서열에 올라가기 위해선 또 하나 갖춰야 할 게 있다. 제인 구달 박사는 침팬지 집단을 관찰하던 중 빈 연료통으로 시끄러운 소리를 내서 자기 서열을 높이는 개체를 목격했다. 그렇다. 바로 개인의 경험과 지식도 서열을 높이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비비원숭이들의 경우 은빛 털이 온몸을 감싸고 있는 개체가 무리를 지배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은빛 털은 사람의 백발처럼 나이가 들어서 생긴 것이다. 제일 높은 서열을 차지하는 비비원숭이의 늙은 수컷들은 육체적인 노쇠함을 은빛 털이라는 엄숙함으로 가려 버리는 셈이다. 이때 은빛 털은 자신이 확보한 서열을 다른 개체에 알리는 상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인간들도 이 같은 상징물을 이용해 자신의 서열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려고 애쓰는 경향이 있다. 고급 승용차나 보석, 고가의 명품 등이 바로 그런 상징물 역할에 이용되는 도구들이다. 구성원들이 서로를 잘 알기 힘든 익명 사회에서는 이 같은 도구가 서열을 가장 잘 표시하는 수단이 된다.
최근 불황이 전 세계를 덮치고 있지만 샤넬이나 버버리 등의 수입 명품들은 되레 가격을 인상했으며, 그럼에도 명품 매장은 북새통을 이룬다고 한다. 심지어 원숭이들만 해도 진정한 서열은 사회성이나 지식 같은 덕목으로 매겨진다는 걸 잘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