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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규 Oct 26. 2024

느림의 과학

臨溪茅屋獨閒居(임계모옥독한거) 

시냇가 초가집에 홀로 한가로운데

月白風淸興有餘(월백풍청흥유여) 

달 밝고 바람 맑아 흥겹다

外客不來山鳥語(외객불래산조어) 

찾아오는 이 없고 산새는 재잘재잘

移床竹塢臥看書(이상죽오와간서) 

대숲에 평상 옮겨놓고 누워서 책을 보네


閒居(한거) / 길재


고려 말의 충신 길재가 새 왕조인 조선이 들어서자 은둔 생활을 하며 지은 시다. 부귀공명에서 벗어나 한가함 속에서 느긋한 삶의 흥취를 누리는 지은이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프로야구 투수임에도 공을 아주 느리게 던지는 선수가 있었다. 공을 빠르게 던지는 다른 선수들을 보며 자신도 구속을 올리려고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자 이 선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자신의 단점을 장점으로 바꾸기로 한 것. 두산베어스에서 통산 101승을 거두고 은퇴한 유희관 선수 얘기다. 


프로야구계의 통념상 시속 140㎞ 이하의 패스트볼로는 성공할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유희관이 힘을 다해 던지는 패스트볼은 135㎞도 채 되지 않았다. 그가 던지는 슬로커브는 76㎞에 이를 만큼 느리다. 이처럼 느린 공으로 그는 한국 프로야구의 간판 투수로 군림했다. 그는 자신에 공에 대해 늘 당당했다. “신은 공평하다. 내게 구속을 주지 않은 대신 좋은 제구력을 주셨다.”라고.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의 동물 세계에서도 느림을 생존 전략으로 내세운 동물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포유류 중 가장 느린 동물로 알려진 나무늘보다. 시속 0.9㎞의 속도로 움직이는 나무늘보는 근육이 적어서 에너지를 적게 사용해 조금만 먹고도 나뭇가지에서 오래 버틸 수 있다. 이 동물을 잡아먹을 포식동물의 눈에는 그 같은 느린 움직임이 잘 포착되지 않아 그냥 지나치게 마련이다.


북극해에 서식하는 그린란드 상어는 세상에서 가장 느린 물고기다. 몸길이가 3m나 되는 이 상어의 헤엄치는 속도는 나무늘보와 비슷한 시속 1㎞에 불과하다. 헤엄치는 꼬리지느러미가 좌우로 한 번 왕복할 때 걸리는 시간이 7초라고 하니 얼마나 느림보인지 짐작할 수 있다. 


나뭇잎을 먹고사는 나무늘보는 사냥 걱정이라도 없지만 포식동물인 이 상어는 그처럼 느린 속도로 과연 어떻게 사냥을 할까. 이 상어의 먹이는 자신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헤엄치는 바다표범이다. 그 해역에 사는 바다표범은 북극곰을 피하기 위해 물위에서 잠을 자는 습성이 있는데, 바로 그때 느린 속도로 조용히 다가가 사냥한다.


빠르게 진화하는 박테리아 종보다 느리게 진화하는 박테리아 종이 결국에는 개체군의 지배적 지위를 차지한다는 사실도 미국 연구진에 의해 밝혀진 바 있다. 돌연변이가 빠를수록 그로 인한 유전적 변화의 이점을 더 많이 누릴 텐데 왜 반대의 결과가 나온 것일까. 그 이유는 빠른 돌연변이가 후에 나타날 더 강한 돌연변이 유전자의 탄생을 막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쯤 되면 느림의 미학이라기보다 느림의 과학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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