夜久織未休 (야구직미휴)
밤 깊도록 쉬지 않고 베를 짜는데
戞戞明寒機 (알알명한기)
찰칵찰칵 베틀 소리 차갑게 울리네
機中一匹練 (기중일필련)
짜고 있는 이 한 필의 옷감
綜作何誰衣 (종작하수의)
나중에 누구의 옷이 되려나
貧女吟(빈녀음) 중에서 / 허난설헌
허균의 누이로서 조선 중기 대표적 여류 시인이었던 허난설헌의 시다. 찰칵찰칵 밟아대는 베틀의 청각적 이미지와 차가운 촉각 이미지가 어우러져 가난한 여인의 고단한 삶을 잘 그려내고 있다. 한시의 매력 중 하나는 이처럼 공감각을 모두 동원하게 만드는 데 있다.
“검은 A, 흰 E, 붉은 I, 초록의 U, 청색의 O, 모음들이여 / 나는 언젠가 너희들의 내밀한 탄생을 말하리라”
랭보의 ‘모음들’이란 시의 앞부분이다. 그는 이 시에서 알파벳의 모음을 색으로 비유하고, 그 모음이 지니는 색깔과 관련된 상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랭보의 눈에는 실제로 A가 검은색으로, I가 붉은색으로 보였다. 그는 알파벳을 볼 때 특정한 색을 함께 느끼는 공감각자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각 및 청각, 촉각, 미각, 후각의 5감각이 차별적인 경로를 통해 각각 처리되지 않고 서로 연결되어 느낄 수 있는 사람을 공감각자라 한다. 세계적인 테너였던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경우 악보의 음표를 색으로 인지했다.
공감각자들의 능력은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특정 글자에서 맛을 느끼는 이가 있는가 하면 시각 자극에서 소리를 듣는 공감각자의 사례도 보고된 바 있다.
또한 네이처 지를 통해 소개된 한 스위스 여성의 경우 3개의 감각기관을 연결해 느꼈다. 음악가인 그 여성은 C장조는 빨간색, F장조는 보라색으로 느끼며, 3도 장음에서는 단맛을 느끼는 것으로 알려졌다.
각종 보고에 의하면 전 세계적으로 약 0.5~1%가 공감각자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희귀한 탓에 예전엔 정신의학에서 공감각을 일종의 정신착란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지금도 공감각자들의 능력이 유전자에 각인된 것인지 아니면 유아 때의 환경적인 영향에 의해 발생하는 것인지 논쟁이 벌어질 만큼 알려진 게 거의 없다.
영국 서섹스대학의 연구팀은 공감각 능력이 후천적으로도 발달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훈련 프로그램을 개발한 적이 있다. 참가자들에게 9주 동안 특정 문자에 대한 색깔의 연관성을 발달시키는 등의 훈련을 시킨 결과, 대부분이 공감각 능력을 갖게 되는 것으로 나타난 것.
그런데 훈련 후 공감각자가 된 사람들의 경우 훈련을 받지 않은 그룹에 비해 IQ가 평균 12점이나 높아졌다. 공감각을 이용하면 기억력이 향상된다는 것은 알려진 이미 사실이다.
두 가지 이상의 감각을 동원해 정보를 기억하면 뇌의 다양한 부위가 자극되면서 기억이 다양한 방식으로 저장되기 때문이다. 공부할 때 그냥 눈으로 보는 것보다 소리를 내거나 손으로 쓰면서 하면 더 잘 외워지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하지만 일시적 훈련만으론 공감각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서섹스대학의 프로그램에 의해 공감각자가 된 사람들에게 3개월 후 다시 테스트해본 결과 대부분 공감각 능력을 잃은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