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이 지나고 엔데믹 시대를 맞아 본격적인 여름 성수기가 찾아왔다. 텐트폴 빅 4 영화 중 <밀수>는 팬데믹 기간에도 유일하게 흥행했던 <모가디슈>를 만든 액션 장인 류승완 감독의 복귀작이다. 한국에서 액션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유일무이한 감독이지만 이번에는 한계를 몰아붙이는 듯했다. 지상에서 보여줄 것이 없다고 느낀 걸까? 이번 영화에서는 깊은 물속으로 들어갔다.
바다, 돈, 그리고 워맨스
1970년대 중반 작은 어촌 마을 군천에 화학 공장이 들어오며 고기잡이, 물질로 먹고살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게 생겼다. 살 방법을 찾던 춘자(김혜수)는 바다에 던진 물건을 줍는 밀수업을 알게 되며 진숙(염정아)과 해녀들을 모은다. 청바지, 시계, 바세린, 담배 등을 세관 몰래 건져 올리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짭짤하게 돈맛 본 이들은 더 큰 제안에 솔깃해 더 큰 건수를 잡게 된다. 하지만 어디서 정보를 입수한건지 세관이 등장해 어지러워진다. 어수선한 때를 틈타 몰래 도망친 춘자는 서울로 올라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그 사이 진숙과 해녀들은 예전보다 더 가난에 찌들어 힘겨운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행복한 미래를 꿈꾸던 해녀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고통받는다. 이에 진숙은 춘자를 향한 복수의 칼을 품으며 다시 만날 날을 꿈꾼다.
한편, 춘자는 전국구 밀수왕 권 상사(조인성)를 만나 거대한 밀수판을 벌이게 된다. 부산에 막힌 물길을 군천에서 뚫겠다는 각오다. 3년 만에 군천으로 돌아와 일확천금을 꿈꾸게 된 춘자는 진숙과의 오해를 풀고 돈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 돈 앞에 흔들리는 우정,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사람 마을 앞에서 진실과 거짓이 밀물과 썰물처럼 교차된다.
이야기, 캐스팅, 액션, 볼거리, 음악의 조화
영화 <밀수> 스틸컷
영화는 1970년대를 배경으로 외국 생필품을 몰래 바다에 던지고 건져냈던 '밀수'를 주요 소재로 했다. 겉으로는 외국과의 교류에 보수적이던 시절이고, 안으로는 주인공 춘자와 진숙이 서로를 그리워하면서도 의심하는 기류와 병치된다. 류 감독은 예전에 읽었던 논픽션 단편 중 70년대 여성 해양 밀수꾼 이야기에 매료되었다고 말했다. 이를 전쟁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는 상황과 맞물리면 재미있겠다며 해녀를 주인공 삼은 이유를 밝혔다.
살아 있는 캐릭터가 재미를 더한다. 멀티캐스팅이지만 유독 김혜수와 염정아의 투톱이 빛난다. 가족은 아니나, 자매 같은 친구였던 둘. 평생 물질만 하던 진숙과 식모살이로 떠돌던 춘자와의 우정과 연대, 의리는 진한 카타르시스와 감동을 선사한다. 말할 수 없는 물밑에서 오직 서로의 눈빛과 움직임으로 소통해야 하는 해녀와도 잘 어울린다. 의상부터 숨비소리(휘파람), 태왁(어구), 왕눈(수경), 해녀 의상 등 김혜수와 염정아가 이끌어가는 매력에 무장해제되어 버린다.
영화 <밀수> 스틸컷
이야기꾼이기도 한 류승완 감독의 오리지널 각본은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을 실감케 한다. 돈 앞에 속고 속이는 두뇌 싸움과 배신과 연대, 반전과 반전을 거듭하는 속임수, 예상할 수 없는 긴박한 스토리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그 과정에서 다방 마담으로 변신한 고민시, 거칠고 투박한 야망에 찬 박정민, 월남과 부산을 장악하고 전국구 밀수왕으로 등극한 조인성, 이들을 쫓으며 승진하려는 세관 김종수까지. 믿고 보는 신구세대의 조합과 매력을 제대로 발휘하고 있다.
과거 이혜영과 전도연을 주인공으로 한 <피도 눈물도 없이>의 계보를 이으면서 해녀라는 전 세계적으로 희귀한 직업군을 영화 안으로 끌어왔다. 지상에서는 권 상사와 장도리(박정민)의 1대 다수 액션이 백미라면 수중에서는 남녀가 뒤엉키며 새로운 볼거리를 만들어 낸다. 바닷속에서 액션은 날 것 같으면서도 우아한 리듬이 생기는 발레 느낌으로 탄생했다. 해녀에게 물속은 건장한 남성이라도 제압할 수 있는 홈그라운드이면서, 삶의 터전인 게 생생하게 전달된다.
영화 <밀수> 스틸컷
상황에 딱 맞는 적재적소 OST가 흘러나온다. 몇 년 전부터 레트로가 유행인 가운데 '밀수' 또한 극 중 배경, 패션, 음악 등이 70년 대풍으로 만들어졌다. 중장년층에게는 향수를 청년층에게는 호기심을 유발한다. 뮤지션 장기하가 음악감독으로 참여해 주요 테마를 오리지널 스코어로 만들고, 당시의 유행가와의 어울림에 신경 쓴 흔적도 다분했다. 시대를 관통하는 음악의 힘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눈과 귀가 즐거운 129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