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진실을 토할 대나무숲이 필요한 12살
<비밀의 언덕>은 5학년 명은의 시선으로 1996년을 훑어본다. 초반부터 호기심을 유발한다. '요런 발칙한 아이를 봤나' 싶은 상황이 재미있다. 새 학년이 된 명은(문승아)은 곧 있을 선생님(임선우)과 면담이 살짝 긴장된다. 선생님의 선물을 고르느라 분주하다. 열심히 고른 선물과 진심을 담은 편지를 책상 앞에 두었지만, 지각한 선생님은 헐레벌떡 공개 면담을 진행한다.
어쩔 수 없다. 이렇게 된 거 어떻게든 무마해야겠다. 시장에서 젓갈 장사하는 엄마(장선)를 가정주부로, 할 일 없이 다니는 게 일인 아빠(강길우)를 종이 회사원으로 둔갑시킨다. 이후 선생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아이들의 인기도 얻고 싶은 명은은 각종 재미있는 공약을 걸어서 반장에 당선된다. 학교에 잘 찾아가기 힘든 엄마는 뭐 하러 반장 같은 걸 하냐고 그만두라지만 몰래 반장의 몫을 이어간다.
'비밀 우체통'을 통해 소원을 들어주자며 반 아이들과 선생님을 설득한다. 아이들의 생일을 챙기고 부족한 것들을 채우며 공부하고 놀기 바쁜 아이들의 뒤에는 명은의 숨은 노고가 깃들어 있었다. 아니 귀여운 조작(?)이 있었기에 별 탈 없이 한 학기가 흘러갔던 거다.
하지만 사소한 거짓말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회장의 공격을 받게 된다. 가족끼리 외식 갔던 갈빗집에서 회장 엄마와 마주쳤지만 못 본 척 돌아온 게 화근이었다. '너희 엄마 시장에서 젓갈 장사하지?'라는 말에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아니라며 딱 잡아떼었다. 애들 앞에서 망신당할 뻔한 분노가 스멀스멀 차오른다. '딱 기다려!' 증거를 가지고 올 테니 어디 두고 봐라 식이다.
이후 5학년은 순탄하게 흘러가는 듯했다. 반장 타이틀 때문에 선생님과 더 가까워진 것이며, 방과 후 남아 이벤트를 기획하는 것도 즐거웠다. 하지만 이것도 시들해져 갔다. 다른 친구가 선생님과 말만 섞어도 질투 나고, 반 아이들을 통솔하는 리더십도 힘겨워진다. 게다가 새로운 전학생 혜진(장재희)이 등장하면서 모든 게 달라질 위기를 맞는다. 열두 살 명은이의 인생은 꼬여만 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인정받고 싶다
명은은 12살로 설정되어 있지만 성인 못지않은 야망 가득한 인물이라 이야기의 끝을 내심 기대하게 만든다. 부끄러운 치부를 들켜 버린 명은은 이를 바로 실행에 옮겨 회사원인 아빠, 가정주부인 엄마의 사진을 찍어 회장에게 들이대는 등. 치밀하고 영민하게 어린아이의 생각에서 나오기 힘들 법한 욕망이 러닝타임 내내 끓어오르다 종국에는 글쓰기(성장)로 귀결된다.
영화는 총 세 번의 글짓기 대회를 통해 작가의 탄생을 예고한다. 환경보전, 통일 안보, 가정의 달 글짓기는 쓰기의 기본과도 연결된다. 명은은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스스로 작가의 프로세스를 따른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관련 자료를 찾고 현장을 방문하고, 사실을 확인하는 취재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가는 상황이 흘러간다. 재능보다는 노력이 깃든 성실한 작가다. 처음에는 상을 받기 위해 남들이 좋아할 법한 글을 쓰다가 결국에는 자신을 위한 글을 완성한다. 제3의 시선에서 바라보다가 결국 내 안으로 들어가는 내밀함은 진정성 있는 글을 토해내고 시 대회 대상이란 쾌거까지 안긴다.
좋은 글이 나올 수 있도록 영감을 준 쌍둥이의 등장으로 본인도 몰랐던 재능을 발견하게 해준다. 경험을 솔직히 풀어 낼 줄 아는 작가가 되어간다. 이와 함께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 ‘가족과 나’, ‘좋거나 힘든 상활을 솔직하게 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상세히 보여준다. 솔직함은 비로소 꽃피우게 되었지만 수상보다 가족이 받을 상처가 걱정된 명은은 수상을 취소하겠다고 선언한다.
누구에게나 불편한 이야기가 있고 이를 드러내는 것이 부끄럽다. 주제가 나와, 가족에 관한 테마일 때 정직함과 진실, 포장과 위선의 경계를 가늠하기 힘들어진다. 나와 타인을 비교하게 만드는 세상과 이를 가볍게 넘기지 못하는 마음 사이에서의 갈등은 어쩌면 작가의 숙명일 거다.
영화를 보면서 상을 받아 신문에 전문이 실리면 가족은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내심 궁금했고, '나랑 비슷하네..'라며 맞장구를 여러 번 쳤다. 숨기고 싶은 비밀이 있다면 일기장에 써 버려 비밀을 간직하거나 흘려보내려고 한다거나. 화가 나거나 슬프거나 황당했거나 남들 앞에서 쉽게 드러낼 수 없는 것들은 철자로 꼭꼭 눌러써 나만 아는 곳에 숨겨 두는 행동도 닮았다. 아마도 인정욕구가 강한 사람들의 성향을 캐릭터에 투영한 것 같다.
작가에게 경험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재지만 판도라의 상자처럼 열지 말 것을 후회하기도 한다. 내면의 치유가 가능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생채기를 내기도 한다. 가족을 드러낸다는 건 결국 자신을 그대로 까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네가 그런 생각을 하는지 몰랐어”라며 돈독해질 수도 있지만 사이가 틀어질 가능성이 더 크다. 그래서 꼭 솔직한 것만이 좋은 게 아닐 때가 있다. 때로는 하얀 거짓말이 필요한 순간이 찾아온다. 진실과 허구 사이를 적절히 타협할 줄 아는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바로 좋은 작가의 재질이 아닐까 생각해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