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은퇴 생활을 즐기던 에르큘 포아로(케네스 브래너)에게 또 일감이 떨어졌다. 오랜 친구이자 작가 '아리아드네 올리버(티나 페이)의 제안을 수락하는 일이었다. 그녀는 본인 명성을 재확인하고 차기작의 영감을 얻기 위해 다짜고짜 심령술사 조이스 레이놀즈(양자경)의 실체를 밝혀 달라고 말한다.
산 자와 죽은 자가 뒤섞일 수 있는 유일한 핼러윈의 밤. 1년 전 죽은 딸의 영혼을 현실로 불러들이려는 엄마 로웨나 드레이크(켈리 라일리)는 교령회를 열었다. 유명 심령술사 조이스 레이놀즈의 실력이 발휘되는 순간 명석한 포아로의 재치로 해프닝으로 끝날게 된다.
하지만 연이어 미스터리한 살인이 발생하고 사람들은 알 수 없는 기운에 빠져들며 사건에 휘말린다. 유령을 포함한 이 안에 있는 참석자가 모두 용의선상에 올라 있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과연 포아로는 이번에도 사건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차가운 이성에서 뜨거운 추리력으로
은퇴 후 아름다운 물의 도시에서 평화로운 삶을 살고 있던 포아로의 말년에 일복이 터졌다. 탐정과 영매라는 두 가지 역할을 병행하느라 괜찮을까 싶다. 왜냐하면 눈앞에 본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어 본인까지 의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칭 타칭 회색 뇌세포라 불리는 명성에 제대로 먹칠하게 생겼다. 풀리지 않는 의문이 지독하게 따라다닌다. 이성에 기대어 점잖게 흔적을 쫓았던 포아로에 최대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흔들리는 내면과 무너지는 이성은 포아로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어제의 차가운 탐정에서 오늘의 뜨거운 탐정으로 성장해 간다. 도와달라며 밤새워 집 앞에 늘어선 줄을 무시하기 바빴던 과거를 털어내고 타인의 삶을 다시 들여다보는 진짜 탐정으로 미래를 열어가게 되었다. 진실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간다.
애거서 크리스티 원작 3부작
케네스 브레너는 영국 왕립 연극학교에서 연극을 전공한 후 왕립 셰익스피어 극단에서 활동했다. 배우의 길을 걸었지만 1989년 셰익스피어 <헨리 5세>를 연출과 연기를 동시에 맡으며 감독으로도 인정받은 바 있다. 셰익스피어 작품뿐만 아니라 영국의 대표 고전을 연극, 영화로 만들었다. <프랑켄슈타인>, <토르: 천둥의 신>,<신데렐라>등 원작의 영상화를 꾸준히 병행하고 있다. 그중 애거서 크리스티를 향한 존경과 애정의 결과물인 추리소설 원작 트릴로지를 선보였다. 연기와 연출의 두 가지 길에서 존재감을 나타내는 영화인이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 <나일 강의 죽음>이어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으로 또다시 연출작을 만나게 되었다. 그가 제작, 연출, 연기까지 맡은 애거서 크리스티 원작 3부작이다. 《핼러윈 파티》와 《마지막 교령회》를 섞었다. 전작의 미스터리 추리 스릴러 스타일은 유지하지만 호러와 오컬트 요소를 가미해 서늘한 분위기를 더했다.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오래된 수상가옥을 무대로 서스펜스까지 배가된다.
원작을 크게 훼손하지 않고 영상화한 전작들과 달리 전면적인 각색으로 탄생했다. 샘 레이미가 연출한 MUC의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처럼 공포 요소를 추가해 낯선 조화를 이루도록 설계했다. 다양한 인물이 밀실에서 벌이는 추리 장르 장점을 극대화해 한층 풍부한 서사를 완성했다.
초호화 캐스팅을 자랑한다. <벨파스트>에서 호흡을 맞춘 제이미 도넌과 주드 힐이 다시 한번 부자지간으로 출연해 반가움을 안긴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양자경이 묘령의 영매로 등장해 시선을 빼앗는다. 그밖에 <존 윅> 시리즈로 전 세계적 인지도를 알인 이탈리아 배우 리카르도 스카마르치오, <하우스 오브 구찌>, <스틸 워터>로 알려진 프랑스 배우 카밀 코탄 등 유럽 배우들이 포진해 활력을 불어 넣는다.
특히 평소 눈으로 본 것만 진실로 믿었던 그의 혼돈과 공포가 그대로 전달된다. 수중 가옥의 상징성과 도시괴담, 가면이 주는 기묘한 분위기가 이를 더해준다. 각색의 힘인지 원작과는 다른 영화처럼 흘러가니 오히려 신선하다. 클래식한 매력과 베니스의 아름다움, 호러와 미스터리 장르에서 빛나는 각기 다른 인물의 앙상블 효과를 즐긴다면 추천하고 싶다.
다만 빠르고 자극적인 것에 길들여진 MZ 세대에게 이 영화는 꽤 고리타분한 영화이지 싶다. 1947년 밀실에서 벌어지는 한정성과 연극적인 연출이 지루함을 유발할지도 모르겠다. 부디 잠재되어 있던 추리 본능을 총동원해 범인을 맞춰가 보자. 쉽고 편한 스마트폰에 중독된 뇌세포를 자극해 짜릿한 즐거움을 얻어 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