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한 출판사를 통해 인쇄소에 방문한 적 있다. 작가가 쓴 글이 종이에 찍히고 독자와 만나기 위해 커버, 내지, 띠지 등으로 완성되는 과정을 만나볼 수 있었다. 한 권의 책이 내 손에 오기까지 험난한 여정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 노고를 직접 보고 듣고 만져보니 확실히 달랐다. 책의 질감, 잉크 냄새, 때로는 반짝이는 장식, 볼록하고 움푹한 느낌이 더 좋아졌다.
이후 책은 흐릿해질지 몰라도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는 명확한 이유를 떠올렸다. 사유의 시간과 역사를 지키고 유지하는 게 무언인지 생각해 봤다. 디지털화되면서 활자는 죽었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읽으려는 사람이 존재하는 한 책은 사라지지 않음을 믿게 되더라.
사라져가는 것들을 읽는 영화
<책 종이 가위>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제작사 분복 작품이다. 아버지가 북 디자이너였던 '히로세 나나코' 감독의 섬세한 시선을 따라간다. 일본 출판계 존경받는 장인 '기쿠치 노부요시'의 책 만드는 자세와 예술을 깊게 들여다본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작품에 참여했던 히로세 나나코는 인간 탐구의 정신이 스승의 시선과 닮아 있었다. 어쩌면 이 영화를 통해 포스트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발견하는 계가기 될지도 모르겠다.
30년 동안 북 디자이너로 살며 1만 5천여 권의 책 표지를 디자인한 살아 있는 전설의 특별한 작업 방식을 전한다. 전반적인 구성도 책의 목차처럼 되어 있다. 책을 읽어가는 구성이다. 1장 진열하다 2장 자로재다 3장 연결하다 4장 찾다 5장 묶다 6장 만지다 7장 놓아주다. 총 7개의 소제목은 북 디자인의 근본이자 영화의 정체성이 되어간다. 책 만드는 한 권의 책을 읽는 것 같은 영화다.
오프닝부터 심상치 않다. 인쇄된 종이를 구겼다가 펴면서 주름을 만들어 내는 모습이 아이의 놀이 같다. 오로지 수작업이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쓰는 시대에 마지막 남은 낭만이라고 해도 좋겠다. 재고 쓰고 오리고 붙여 만든 디자인을 어시스턴트의 힘을 빌려 디지털화한다. 맨손으로 종이 질감을 확인하고 일일이 폰트를 비교해 가며 종이, 가위 만으로 완성한다. 좁고 한정된 공간에서 상상을 펼치는 창의성이 노장의 손끝에서 퍼진다.
키쿠치 노부요시는 19세에 북 디자인에 매료되었지만 관심이 바뀌어 타마 미술 대학을 중퇴했다. 12년 동안 상업 디자인에 종사하며 현장을 배웠다. 31세에 직업으로서 북 디자이너로 살아가길 다짐한다. 출판사의 수주를 받아 그때마다 일감을 얻는 프리랜서로 살아가게 되었다.
그는 언어를 몸을 가진 하나의 인격체로 생각한다. 새 책을 접할 때마다 맞는 커버(옷)를 해석해 낸다. 작가의 의도, 옷 입는 책의 입장, 독자가 느낄 반응을 고려해 만든다. "장르를 불문하고 종이책은 '몸'이다"라는 철학을 고수한다. 디자인이란 결국 타인을 위한 것이라며 소통의 중요성도 잊지 않는다.
자신을 예술가, 크리에이터라 칭하는 것을 꺼렸다. 독자는 작가의 언어를 읽고 내면을 채워 나가겠지만 북 디자이너는 매번 언어를 포장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30년 넘게 일했지만 텅 비어가고 있다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북 디자인은 예술이나 자기표현과는 거리가 먼, 그저 주문이 들어오면 일하는 것이라 말했다. 본인을 소멸해 가며 후학 양성 설계라는 밑그림을 그려내는 중이었다.
노장의 머물지 않는 혁신 디자인
자기 모방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은 세계에서 항상 성찰하고 노력한다. 대담한 디자인을 선보여 서점과 유통업계를 긴장케 만드는 것도 멈추길 거부하는 움직임의 하나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활판인쇄 시스템이 무너진 불황, 스스로 내면의 위기의식을 감지했을지도 모르겠다. 북 디자인도 아이디어 싸움이다. 모든 시도를 다 해보자는 전투의지다.
그래서일까. <책 종이 가위>는 디지털화의 피로함을 느껴 아날로그로 회귀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휴식 같은 영화다. 장인의 고민이 하나씩 완성되는 과정이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탐색하는 것만 같다. 천진난만함을 보이다가 1mm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집요함, 카리스마 넘치는 상반된 모습까지도 매력적이다. 폰트와 색상을 고르고, 작가의 의도에 맞는 재킷을 만들어 냈을 때의 뿌듯한 미소에 전염된다. 그 미소는 한 단어로 결정하기 힘든 복잡한 마음이자, 책을 사랑하는 단 하나의 마음이 담긴 순수한 결정체(책 표지)로 태어난다.
일본보다 열악한 한국 출판 시장에 화두를 던지는 영화다. 책을 산업적으로 접근하거나, 단순히 읽고 소장하길 취미로 삼는 사람에게도 열려있다. 다큐멘터리 장르에 관심 있는 독자, 혹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제작사의 라인업을 믿는 관객에게 새로운 시각을 부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