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하는 독일 최고의 감독이라 불리는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은 <어파이어>로 제73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바바라>에 이어 두 번째다. 역사 3부작이라고 불리는 <바바라>, <피닉스>, <트랜짓> 이후 원소 3부작 중 물을 다룬 <운디네>에 이어 불을 테마로 낭만에 흠뻑 취한 네 젊은이의 해프닝을 다루었다.
불은 따뜻한 온기와 음식을 주지만 잘못 다루면 모든 것을 재로 만들어 버리는 속성이 있다. 이로우면서도 해롭기도 한 양면적 존재다. 기후변화로 곳곳에서 퍼지는 불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어 두렵기까지 하다. 강 건너 불구경이 아니다. 곧 닥칠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불같은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선선한 가을이 반겨준다. 이것 또한 불의 신비한 속성이다. 푸르고 울창했던 숲이 금세 울긋불긋 물들고 곡식이 익어가는 충만한 계절. 영화 속 지질했던 주인공도 한 발짝 성장하는 것처럼 관객도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조금 변화된 내일을 맞이하길 기대한다.
숱한 감정에 쌓여 위험을 잊은 청춘
두 번째 소설 집필을 위해 친구 펠릭스(랭스턴 위벨)의 별장을 찾은 작가 레온(토마스 슈베르트)은 잘 써지지 않는 원고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펠릭스는 예술 학교 진학을 위해 포트폴리오를 구상 중인 예비 사진작가다.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을 찍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라 들떠 있지만 작업은 하는 둥 마는 둥 놀기만 하는 몽상가다.
한편, 출간 작가라고 목에 힘주고 있는 오만한 레온은 정작 다음으로 넘어가지 못해 고군분투 중이다. 고장 난 차를 버리고 걸어온 고생만큼은 온전히 보상받고 싶은 레온은 휴가 원고를 마치겠노라 다짐했지만 일이 안풀린다. 게다가 일정이 꼬여 먼저 별장을 선점한 나디아(파울라 베어)가 불편하다. 며칠 지나 통성명은 했지만 찝찝한 기분은 여전하다.
나디아는 아이스크림 점원으로 일하며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쾌활한 여성이다. 숨기는 것 없이 솔직하고 대담하며 요리 솜씨도 뛰어나다. 한눈에 띄는 매력적인 외모를 지녔다. 하지만 그녀의 속내를 알 수 없다. 별장에서 가장 바빠 보이지만 서두르지 않는다. 일에 바빠 주변을 돌아볼 시간이 부족해 보이나 모든 일을 꿰뚫고 있으며 여유롭다. 별장의 유일한 여성이자 미스터리한 인물로 레온의 마음에 불을 지른 존재다.
젊은이들이여 케세라세라!
<어파이어>는 뜨겁고 건조한 발트해의 여름 소방 헬기, 대피 방송이 여전하고 숲이 타고 있어도 정작 자기 안에 갇혀만 있는 욕망, 사랑, 질투, 분노, 오만함 때문에 위기를 맞는 이야기다. 영화의 유쾌한 톤이 전작들과 확연히 달라 놀랍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환영할만하다.
감독은 팬데믹 때 선물 받은 에릭 로메르의 DVD를 보면서 걱정이 앞섰다고 전했다. 지금 세대가 내년 여름을 맞이하기 힘들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여름에서 가을로 변하는 멜랑꼴리함을 떠올라 영화를 구상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그래서인지 슬프고 아픈 정서는 덜어내고 희망을 떠올릴 만한 경쾌한 리듬감을 더했다. 힘들었던 지난 몇 년을 극복한 인류를 격려하고 미래 세대를 향한 긍정 요소가 담겨 있어 신선했다.
그의 자전적 서사도 포착할 수 있다. 주인공 레온은 '클럽 샌드위치'라는 두 번째 책을 엉망진창으로 쓴 나르시시즘이 강한 작가다.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내 두 번째 영화 <쿠바 리브레>(칵테일 이름)는 지적 허세에 충만했던 시절이었고, <어파이어>를 만들고 보니 결국은 내 이야기였다며 놀라워했다.
음악 선곡도 탁월해 귓가에 맴돈다. 산불이 번져오는 모양새인 '붉은 하늘'을 뜻하는 독일 제목과 '어파이어'라는 영어 제목 둘 다 불과 가까이 있다. 붉은색은 노을, 사랑과 정열의 색깔이다. 나디아의 빨간 원피스가 파란 바다와 대비되어 강렬한 인장을 남긴다.
아직 그의 영화를 한 편도 보지 못했다면 입문용으로 적당한 영화다. 역사, 신화, 음악 등 인문학적 소양이나 문화적 배경 없이도 즐길 수 있다. 여름을 배경으로 한 청춘 영화로도 탁월한 작품이다. 또한 감독의 사적이고 내밀한 마음까지 함께 공감하고 싶다면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