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작가인 한 여성이 임신 후 겪게 되는 몸과 마음의 변화로 혼란스러워지는 상황을 담은 하이퍼리얼리즘 드라마다. 여성뿐만 아닌 동거인인의 삶까지 시야를 넓혀 주변으로 확장한다. 결혼과 출산이 정상이라는 암묵적인 사회적 룰에 과감히 저항한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놓인 연인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모든 일은 선택의 결과이기에 후회까지도 온전히 받아들이는 현실을 직시한다.
출간 앞둔 작가의 계획 없는 임신
데뷔작에 이은 두 번째 작품까지 성공하자 출판사는 차기작까지 계약하자고 성화다. 소포모어 증후군도 없이 탄탄대로를 가던 젊은 소설가 재이(한해인)는 숱한 선배, 동료들이 결혼과 임신, 출산으로 잊히는 것을 보고 절대 아이를 만들지 않겠노라 결심했다. 비혼, 비출산 이 조건은 건우(이한주)와 이미 합의된 내용이었다. 둘은 서로를 아끼며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재이는 주로 집에서 소설을 쓰고 건우는 밖에서 생활비를 벌었다. 보습 학원 영어 강사인 건우는 연인의 예술성과 창작력을 높이 평가하는 평범한 사람이자 진심으로 잘 되길 누구보다 응원하고 있다. 퇴근 후에도 재이가 글에만 전념하도록 집안일까지 거들며 최선을 다했다. 재능보다는 근면 성실함을 무기였다. 5년 만에 분점 원장직을 제안받지만 무리하는 건 아닌지 고민이 많다.
그러던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임신은 평화를 깨고 균열을 일으킨다. 재이는 작가 경력을 망칠까 봐 임신중절을 원하고 건우는 가족을 꾸리는 삶을 원했다. 처음으로 둘은 서로 다른 의견으로 갈등하고 대립한다. 건우는 간절하다. 아이만 낳으면 글만 쓸 수 있게 해주겠노라며 설득한다. 돈벌이, 가사, 육아까지 책임지겠다고 선언한다. 둘 사이에 찾아온 아기는 축복일까, 불행일까? 서로 지키려는 게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오랜 연인의 삶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한 지붕 동상이몽의 섬세한 균형
이 영화의 미덕은 임신한 여성의 변화만 다루지 않는다는 거다. 남성은 여성의 고난을 이해하지 못하는 방관자가 아니다. 연결되어 있는 존재이자 충돌의 대상이 되어 적극적으로 나선다. 서툴고 낯설지만 이겨내야 할 대등한 상황을 병치함으로써 동등한 관계성을 부여한다.
재이는 임신과 동시에 신체 변화로 힘겨워한다. 독서와 집필의 루틴이 잦은 졸음, 허리 통증, 요동치는 기분 변화로 침해받는다. 세상에 ‘나’로서 존재했던 때는 없었던 일인 듯 지워졌다. 세상에 자신을 걱정하고 이해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만 같다. 모든 게 아이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엄마’라는 이름을 새로 부여받아 ‘아이’가 우선인 존재로 다시 태어난 것 같았다. 말끝마다 나는 없고 아이의 엄마이길 요구했다. 아이를 위한 음식과 영양제를 먹어야 하고, 좋은 것만 보고 들어야 한단다. 당혹스럽고 서운하며, 불편했다.
제대로 글을 써내지 못하고 자질까지 의심받는 상황이 오자 견딜 수 없었다. 어제까지 촉망받던 작가였는데 오늘부터 어수선하다는 평가를 듣자 흔들린다. 스트레스는 가중되고 그 원인을 배속의 아이로 돌린다. 자존감은 떨어지고 작가로서 생명도 끝날 것만 같다. 재이의 폭주는 함께 하는 동거인, 주변 사람에게도 영향을 끼친다. 갑갑한 현실을 잊기 위해 술에 의존하게 되고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뒤틀린다.
건우는 지방대 출신이란 꼬리표를 감추려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했다. 부모를 꿈꾼 적 없었지만 세상의 쓸모를 인정받는 것 같아 내심 기뻤다. 애써 자신을 독려하며 하루하루 겨우 버티고 있었다. 숱한 고민 끝에 분점을 맡아 능력을 인정받으려고 했다. 하지만 산 넘어 산이었다. 재이의 배는 점점 불러오지, 일은 좀처럼 풀리지 않지, 건우의 상황은 극단적 상황으로 치닫고야 만다.
작가와 엄마 사이에서 갈등
영화는 모성 신화, 자기몸 결정권, 사회적 금기 등 다양한 화두를 던진다. 커리어 선택이 죄책감으로 변하는 고정된 성역할과 가부장적 분위기까지 담은 리얼함은 이 영화의 고유한 속성이다. 엄마이기 이전에 작가를 꿈꾸면 안 되는 걸까? 아이 보다 내가 우선이면 이기적인 걸까? 여성에게 모성이 당연하다는 편견은 보이지 않는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여성도 사람이고 사람은 모두 다르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유지영 감독의 자전적인 경험에서 흘러온 이야기라고 한다. 우연히 유지영 감독이 쓴 편지 형식의 글을 읽다 눈물을 쏟았다. 그 시절의 나와 함께해 준 시절 연인을 향한 고마운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상대를 너무 사랑하면 보내 준다는 말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솔직함이었다. 비록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내 옆에 있었던 연인, 이제서야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아서 서글펐다.
원제는 ‘Birth’다. 출산, 탄생이란 고귀한 단어가 다르게 쓰일 수 있음에 새삼 놀랐다. 재이가 임신 중 쓰다 고치기를 반복하던 원고는 세 번째 책 《Birth》로 탄생하게 된다. 아이를 원하지 않던 여성의 임신에 관한 아픈 이야기일 것이다. 출판 기념회를 마치고 돌아와 또다시 무언가를 끄적이는 키보드 소리가 아득하게 들린다. 스크린은 암전 되고 엔딩크레딧과 함께 ‘탁탁탁..’ 재이는 다음 이야기를 쓰는 중일 것이다. 그 어떤 OST, 쿠키 영상보다 비범하고 아련한 울림이었다. 혼자서 끝이 보이지 않는 아득한 길을 걸어가더라도 조금은 덜 아파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재이를 토닥여주고 응원해 주고 만 싶었다.
155분 러닝타임이 한 시간 같아 빨려 들어갔다는 말로 대신하고 싶다. 현실 커플의 일상생활은 마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불편한데 계속 보게 되는 마력이 상당했다. 작년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를 봤을 때와 비슷한 경험치였다. 여성이 여성의 이야기를 할 때 누구보다 여성이 공감할 수밖에 없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성평등, 경단녀, 자아실현, 출산과 돌봄까지 유려하게 담아낸 시선, 유지영 감독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