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훈 감독은 오랜 시간 학교 밖 청소년과 예술강사 자격으로 만나왔다. 그때 상처받은 아이들과 조건 없이 보듬어 주었던 좋은 어른을 지켜본 경험을 영화로 완성했다. 투박해 보이지만 세심한 배려가 치유의 손길로 어루만져 준다. 혼자 외로운 삶을 살아가던 30대 어른과 집 밖을 떠돌던 10대 청소년 모두를 연결하는 여운과 울림이 인상적이다.
상처 많은 두 영혼의 만남
츤데레 ‘기영(김영성)’과 불안한 ‘길호(최준우)’를 연기한 두 배우의 시너지가 빛난다. 기영은 상처 많은 인물이다. 병든 아버지를 매몰차게 내치지는 못하는 여린 구석이 있다.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 오히려 차갑고 거친 말을 쏟아낸다. 그러던 어느 날 집 앞 평상에 누워있던 길호를 지나치지 않고 말을 건넨다.
딱 봐도 가출한 티가 역력했다. 기영은 길에서 고양이를 줍듯 길호를 외면하지 않고 집으로 불러들인다. 누군가와 말을 섞어봐야 알지, 부드러운 말이 나오지 않는다. 오랜 단절로 소통에 서툴렀다. 길호에게 상처될 말만 골라 쓴다. 다음 날, 그게 미안했는지 먹고 싶은 거 챙겨 먹고 자고 싶으면 자라는 말을 툭하고 내던지며 사라진다. 집 없는 설움을 알기에 대가 없는 호의를 선뜻 내준 것이다. 백 마디 말 대신 진정성 있는 행동이 발휘되는 순간이다.
길호의 모습에서 예전 모습을 발견했을지도 모르겠다. 애잔하고 안쓰러운 마음은 차츰 기영을 괜찮은 어른으로 성장하게 한다. 어머니가 남겨준 유일한 유산인 베란다 화분을 정성스레 가꾼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가시를 세우고 있어도 속은 여물러 터진 사람인 거다.
길호는 새아버지의 지속적인 폭력을 견디다 못해 가출했다. 갈 곳 없이 떠돌다 가출 팸과 그럭저럭 살아내고 있었다. 잘 곳 없어 이곳저곳을 떠돌다 우연히 기영을 만나 처음으로 온기를 경험한다. 어디서 뭘 하든 아무도 관심 두지 않던 자신을 발견해 준 사람이었다.
믿을 수 있는 사람, 해치지 않은 것이란 안정감을 직감했다. 닮고 싶은 좋은 어른을 만나 즐겁기도 했다. 피붙이도 주지 못한 애정을 타인에게 느껴버린 것이다. 하지만 며칠만 더 있으려고 했던 계획은 금방 틀어져 버린다. 이 소식을 듣고 몰려온 가출 팸으로 인해 가까스로 찾은 평화는 깨질 위기를 맞는다.
주변의 관심이 필요 한 때
<빅슬립>은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가출한 아이와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 않아 애썼지만 결국 닮은 모습을 확인한 남자의 낯선 어울림이다. 무심한 관심이 나비효과가 되어 돌아오는 강력한 자장을 경험하게 한다.
둘은 데칼코마니처럼 닮았다. 아버지를 향한 불신으로 가득 차 있다. 기영은 공장 폐기물 투기에 가담하게 된 것을 알고 몹시 괴로워한다. 길호는 가출 팸과 어울리며 빈집 털이 중 스스로 각성하게 된다. 둘은 범죄임을 깨닫고 그만두려 버둥대지만 방법을 찾지 못해 고군분투한다. 공통점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였지만 서로를 간절히 바라고 위로해 준다. 이 독특한 구원 서사는 꽁꽁 얼어붙은 마음을 천천히 녹여낸다.
잠과 음식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문제지만 의외로 충족되지 못할 때가 많다. 이 두 가지가 충족되는 기영의 ‘집’은 제3의 주인공이다. 고된 하루를 보내고 돌아올 곳, 쉴 수 있는 장소를 넘어 영혼의 안식처가 되어준다. 때로는 수요는 많으나 원하는 만큼 충족되지 못해 서글픈 보금자리이기도 하다. 고단한 몸을 눕힐 공간조차 없는 소외된 이웃이라면 더욱 그렇다.
먼저 손 내밀어 주는 일은 기적을 바라는 일처럼 드물게 된 요즘이다. 각자도생 시대 각박한 현실. 남을 돕는다는 것은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주변을 돌아볼 여유 없이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이기심이 삭막해서 무서울 정도다. 차가운 바람에 옷깃을 여밀 때면 한 번쯤은 주변을 돌아보는 관심이 절실한 이유다.
<빅슬립>은 <화란>의 가정폭력 청소년과 괜찮은 어른의 부재라는 주제, <어른들은 몰라요>, <박화영>에서 다룬 가출 청소년의 비행을 따뜻한 시선으로 다룬다. 종종 등장하는 불빛은 아이들이 잘 곳을 찾아 헤매는 불안한 불빛이다. 빈집, 폐가, 폐차에서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며 쪽잠으로 버티던 아이는 단 하루만이라도 깊은 잠을 잘 수 있으면 족하다. 작은 걱정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지 큰 위안을 말해주고 있는 영화가 <빅슬립>이라 생각했다.
유독 마지막 장면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 퉁명스럽게 밥 먹었냐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받아주던 기영은 어느새 같이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어쩌면 길호와 같은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달콤한 아침 햇살이 들어와 있는 거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찬란하게 둘을 응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