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엄마 화자는 초등학교 때 한국에 온 이후 고향(일본)에 가보지 못했다. 결혼하고 한국에서 살면서 한 번도 일본에서 왔다는 과거를 말하지 않았던 엄마. 정체성을 꼭꼭 숨겨온 엄마는 기억이 사라져버리기 직전 교토를 밟게 된다. 남편 먼저 보내고 홀로 세 딸을 키운 엄마는 억척스럽고 힘든 삶을 살았었다. 이제 좀 살 만해졌는데 치매가 찾아와 버린 거다. 인생이란 참으로 알 수 없어 얄밉지만 살아가야만 하는 숙명인가 보다.
부산 영도 세 자매 다이어리
첫째 혜진(한채아)은 책임감과 의무감을 지닌 장녀다. 판매직에 종사하고 있고 최근 연봉협상 및 근무시간 조정하면서까지 무리하고 있다. 결혼까지 생각했던 연인과 결혼 후 부산을 떠나야 한다는 말에 헤어진 상태다. 사내 연애로 다소 껄끄럽지만 이 집안의 실질적 가장이기 때문에 악착같이 버티고 있다. 부산 영도에서 태어나 외국 땅을 밟아 본 적 없는 토박이, 러시아 선원 페트르와 친해지며 그나마 해방감을 맛본다. 장녀는 장녀인지 엄마의 증상을 일찍 알아차렸다.
둘째 혜영(한선화)은 소설가가 꿈이었지만 방송국 작가로 겨우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어릴 적 일기가 소설에 도움이 된다며 버리지 못하게 하는 것도 엄마랑 닮았다. 남자 친구의 등단과 함께 이별을 선택, 방송국도 그만두고 휴가를 핑계로 본가로 돌아왔다. 일주일만 있다가 가려고 했는데 깜박깜박하는 엄마의 증세가 심상치 않음을 알게 된다. 일본어로 된 오랜 편지와 사진을 발견해 궁금증이 커진다. 감독이 본인 캐릭터를 투영한 화자로 설정되어 있다.
막내 혜주(송지현)는 엄마와 언니 몰래 춤추러 다니고 있다. 춤이 좋지만 둘째 언니가 문창과에 간다고 했을 때 집안이 뒤집힌 전력이 있어 숨기고 있다. 영도가 지긋지긋해서 둘째 언니가 있는 서울로 탈출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아 보인다. 둘째 언니는 영도로 내려왔고 엄마도 예전 같지 않으니까. 언니들 틈에서 여전히 쑥쑥 자라나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엄마(차미경)는 도시락 배달 업체에서 일하고 있다. 교토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밀항선에 올랐다. 이후 돌아가지 못하고 발 묶여 버렸다. 동네 사람들에게 첫째는 명품 매장, 둘째는 방송국 PD라고 부풀려 말하길 좋아한다. 김장처럼 잔뜩 만들어 사시사철 먹는 앙금을 직접 만드는 억척스러운 부산 사람이다. 무엇 하나 버리지 못하는 성격이라 별것이 다 한자리 잡고 있다. 음식도 그중 하나다. 냉장고는 위, 아래 터질 듯이 가득하다. 화자는 추억을 만질 수 없기 때문에 물건이라도 만져야 한다며 차곡차곡 모아 둔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병마가 찾아오자 기억도 못 하는 거 이제 다 버릴 거라며 선언한다.
절절하지 않고 담백한 가족 드라마
영화는 부산을 배경으로 디아스포라 소재를 삼았다는 데 있다. 고향은 나고 자란 곳이기도 하지만 어디가 되었든 발붙이고 오래 머문 곳이기도 하다. 영도를 고향으로 생각하는 엄마 화자처럼 말이다. 한번 들어오면 함부로 나갈 수 없다는 ‘영도 할매’ 설화가 문득 떠오른다. 이를 세 자매와 엄마 화자의 사연으로 녹여 내 설득력 있는 이야기로 만들었다.
영도의 상징성은 가족의 정체성과도 맞물린다. 떠나지 못해 머무는 곳이지만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항구다. 아버지도 선원이었고, 페트르도 한 달만 정착하다 갈 도시라며 자유로움을 말한다. 남성은 떠나려고 하고 여성은 모종의 이유로 떠나지 못하고 머문다.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라는 노래 제목과 일치한다.
전 세계적인 보편 정서인 가족애를 바탕으로 한다. 김민주 감독이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삶에서 영감 받아쓴 자전적인 영화다. 실제 외할머니는 일본인이고 어머니는 어릴 때 어머니와 떨어져 영도에 살고 있다고 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바닷마을 다이어리> 자매들과 바다, 가족을 공유하나 한국적 정서로 와닿는다. 한평생 자식을 위해 헌신한 부모의 사랑, 자식으로서 도리와 먹먹하고 따스한 감정이 전반적인 분위기다.
외할머니의 편지는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딸이 자신을 잊지 않기를 바라는 앙금 레시피와 절절한 안부편지, 바래서 해석하기 어려운 편지를 통해 엄마를 알아가는 딸들의 마음이 공감된다. 과거를 숨길 수밖에 없었던 아픈 마음을 이해하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실향민, 이주민, 이방인의 마음도 오랜 잔상을 남긴다. 가슴 절절하게 눈물 콧물 쏙 빼는 눈물이 아닌, 이해와 공감의 눈물은 조용히 가슴속에 흐른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묶여 있지만 서로 얼마나 무심했었는지 되돌아보는 계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