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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혜령 Dec 27. 2023

<사랑은 낙엽을 타고> 핀란드의 쿨한 플러팅 방법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이 은퇴 번복하고 하고 싶었던 말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핀란드의 거장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정수가 담긴 스무 번째 작품이다. <희망의 건너편>(2017)이 공식 은퇴작이었지만 6년 후 <사랑은 낙엽을 타고>로 복귀했다. 어떤 말을 전하고 싶었던 걸까. 몹시 궁금해졌다. 칼바람이 매서운 겨울을 앞둔 가을, 떨어지는 낙엽이 멜랑꼴리함을 더하지만 새로운 인연을 만나기 좋은 계절임은 분명하다.      


프롤레타리아 3부작 <천국의 그림자(1986), <아리엘>(1988), <성냥공장 소녀>(1990)을 완성한 후 또다시 블루칼라의 버거운 현실을 배경으로 한다. 라디오에서는 끊임없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소식이 전해진다. 그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80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 동안에도 계속해서 상기하도록 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서사극에서 자주 쓰는 소격효과처럼 느껴진다. 영화에 몰입하면 할수록 현실을 떠올려 보는 환상과 현실의 얕은 경계가 희망을 더욱 쫓도록 격려한다.      


쿨하지만 따뜻한 사람들     

안사(알마 포이스티)는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을 가져갔다는 이유로 마트에서 해고된다. 이후 술집 주방보조로 취직하지만 급여 받던 날, 사장이 대마초 거래 혐의로 끌려가면서 연이어 실직하게 된다.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에게 삶의 그늘은 호락호락 달아나지 않는다. 급히 취직한 공장에서는 시커먼 먼지를 뒤집어쓰면서 땀 흘려 일하며 하루를 보낸다. 그러던 중 친구와 놀러 간 펍에서 한 남자를 만나 호감을 주고받는다.     


훌라파(주시 바타넨)는 술과 담배 없이는 일할 수 없을 지경의 공장 노동자다. 컨테이너에서 노동자들과 숙식을 해결하며 술을 물 마시듯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홀짝인다. 아니나 다를까 결국 문제를 만든다. 현장에서 사고가 생긴데 낡은 기계가 원인이 아닌, 훌라파의 술 때문에 일어났음이 밝혀져 해고당한다. 우울해서 술 마시고 술 마셔서 우울해지는 꼬리물기가 이유라면 이유. 술 없이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고된 일상이 계속된다.     


결국, 집도 절도 없이 노숙하게 생긴 훌라파는 어느 모텔에서 며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 펍에서 우연히 만난 여자와 재회해 연락처를 받아 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연락처를 잃어버려 만나지 못해 애만 태운다. 이름도 가르쳐 주지 않아 속타는 훌라파, 울리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는 안사. 사랑보다 생존이 시급한 두 사람의 인연은 맞닿아 연인이 될 수 있을까.     


센치한 농담과 미지근한 마음, 핀란드식 플러팅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이 은퇴를 번복할 만큼 하고 싶은 이야기는 ‘사랑’이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아름답게 만든다. 냄비처럼 빨리 뜨거워지고 쉽게 식어버리기보다, 천천히 걸리더라도 오랜 시간 따스함을 유지하는 쪽이 이 세상에는 필요한 법이다. 이웃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나도 휴대폰만 하느라 남 일에 무심한 세상,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 주변을 돌아볼 여유 없이 각박하고 무미건조한 세상, 일용직과 계약직의 목숨을 파리처럼 여기는 세상에 ‘사랑’이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겉으로는 멜로 같지만 속에는 사회 시스템의 문제점을 꼬집는 특유의 화법이 이 영화에도 잘 담겨있다. 달콤 쌉싸름한 순도 97%의 다크초콜릿 같다고 해야 할까. 적극적이지 않아 관심 없는 듯 보였지만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서로를 그리워하는 핀란드식 플러팅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초반에는 낯설었지만 뚱한 표정과 무뚝뚝한 말투를 자주 듣다 보니 끝날 때 쯤엔 귀엽고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2024년 달력이 걸려 있는 미래지만 라디오를 듣고, 전화만 되는 불편한 핸드폰을 사용하고, 연락처를 종이에 적어 주는 아날로그 방식이 80년 대의 아련한 매력으로 다가온다. 오히려 절절하고 뜨거운 마음보다 피식거리는 썰렁한 농담, 미적지근한 마음이 오래 유지된다는 걸 안다면 이 영화의 독특한 무드가 쉽게 잊히지 않을 거다.      

훌라파와 안사의 첫 데이트 장소로 정한 영화관에서는 짐 자무쉬 감독의 <데드 돈 다이>가 상영된다. 첫 데이트인데 좀비가 등장하는 블랙 유머가 어울릴까 싶지만. 가라오케에서 무표정으로 열창하고, 첫눈에 반했으면서 다음 번 만남을 고대하며 쿨하게 헤어지는 두 사람을 보고 있노라면 인연은 멀리 있지 않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극장은 누군가를 만날 수 있는 장소, 같은 공간에 함께 관람하는 연대, 비루한 현실을 잊게 하는 꿈이다. 연락처를 잃어버려 소식이 끊긴 안사와 훌라파가 아무 정보도, 약속도 하지 않고 재회할 곳이 극장인 이유다.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이 추구하는 데드팬(무표정하고 절제된 동작의 코미디) 코미디와 자크 드미 감독 영화의 미장센이 묘한 울림을 준다. 퇴장하는 관객의 입에서는 로베르 브레송, 장 뤽 고다르 영화를 논하고 주인공이 자주 가는 펍이나 카페는 늘 오즈 야스지로, 찰리 채플린 등 20세기 영화 포스터가 걸려 있다. 감독이 사랑하는 영화도 곳곳에 배치되어 있어 이스터에그를 찾는 재미도 쏠쏠하다.      


무엇보다도 안사가 데리고 온 유기견(알마) 채플린의 연기가 수준급이다. 실제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이 포르투갈에서 발견한 유기견이다. 영화 속에서는 공장 노동자의 삶을 담은 <모던 타임즈>의 채플린의 이름으로 등장해 눈길을 끈다. 칸영화제는 영화 속 뛰어난 연기를 펼친 견공에게 '팜 도그 상 (Palm Dog)'을 준다. 2021년 창설된 칸영화제의 비공식 행사지만 인기가 높다. 제76회 팜 도그 상에서 알마는 심사위원대상을 받았고 최고 팜 도그 연기상은 <추락의 해부>의 보더콜리 '메시'에게 돌아갔다.


사진: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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