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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혜령 Feb 16. 2024

<막걸리가 알려줄거야> 막걸리가 로또 번호 알려줬다고?

<막걸리가 알려줄거야>는 넷플릭스 [살인자o난감]의 각본을 쓴 김다민 감독의 연출 데뷔작이다. 범상치 않은 제목과 소재로 상상력의 한계 너머를 보여준 이야기로 2020년 경기 시나리오 기획개발지원 대상을 받았다. 기원은 동명의 단편 소설이며 소설집 《영어로 뭐게요 대머리가》에 수록되어 있다. 어디서도 시도하지 않았던 독특한 발상 속으로 한번 발 들이면 끝까지 호기심을 멈출 수 없는 재미가 남다르다.     


초등학생과 막걸리의 어색한 만남은 주민센터에서 배운 전통주 만들기 수업 경험과 산책 중 만난 초등학교 학원 버스가 시작이었다고 한다. 누룩과 미생물, 밥이 적당한 온도와 만나 익어가는 시간과 초등학생의 분주한 일상도 알 수 없는 원리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문득 ‘왜 이러고 살고 있나’는 끊임없는 질문이 이어졌고, 우리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향하는지, 세상에 던지는 여러 물음표를 영화 속에 녹여냈다.     


대체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11살 동춘(박나은)은 이것저것 해봐야 적성과 재능을 알 수 있다는 엄마의 실험체 같았다. 그것도 아니라면 대학 내내 장학금을 놓쳐본 적 없고 대기업에 취직해 연봉 6천까지 찍었지만 산후우울증으로 무너졌던 엄마의 대리만족 결과지일지도 모르겠다. 어른보다 더 빡빡한 시간표대로 국영수, 창의과학, 태권도, 미술, 코딩 등 하교 후 학원으로 뺑뺑이 돌리고 있었다. 내 나이 11살, 왜 이렇게 살아야 할까? 동춘은 인생 최대 고난에 봉착했다.     


이것저것 해봤지만 큰 성과 없던 지루한 일상 중 동춘이 가장 잘하는 건 바로 ‘멍 때리기’. 태권도는 싫지만 명상 시간을 핑계로 공식적인 공상에 돌입할 수 있어 꾸준히 다녔던 진실은 함구하도록 하자. 그러던 어느 날, 엄마 혜진(박효주)은 계속해서 바뀌는 입시 정책 중 페르시아어 전형이 생긴다는 소문을 듣고 당장 페르시아어 학원 등록을 마쳤다.     


대체 어디까지 해야 하지? 모스부호에 이어 페르시아 언어라니, 11살 인생은 그저 부모의 극성에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 두 번 끄덕여 주는 것으로 끝내자고 합의했다. 그래, 좋은 게 좋은 거잖아. 부모님은 기대에 찬 눈빛이었고 동춘은 영 탐탁지 않았지만 흥미를 부칠만한 사건이 생겨나자 눈에 불을 켜고 공부하는 유일한 과목이 되었다.      


발단은 며칠 전 수학여행에서 가져온 생막걸리 때문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아침햇살을 먹고 버스에서 멀미해 사경을 헤맸다. 아이들은 레크리에이션이다, 불꽃놀이다, 분주한 때 숙소에서 숙면을 취하던 동춘. 문득 잠에서 깨어나 이끌리듯 복도를 서성이다가 소화전에서 들리는 이상한 소리에 이끌렸다. 데구르르.. 동춘 발밑에 당도한 막걸리 한 병. 잠깐만, 소화전이 막걸리를 뱉었다고?     


어리둥절한 동춘 앞에 순간 상상의 비밀친구 ‘털북’, ‘숭이’가 말을 걸어왔다. ‘술이라는 걸 잊었냐고..’ 고민 끝에 동춘은 다 마신 아침햇살 병에 막걸리를 조금 덜어 집으로 가져온다. 이후 막걸리는 경쾌한 탄산 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도통 한,중,일, 영어, 프랑스어도 아닌 해석 불가의 언어로 떠들어댔다. 결국 엄마의 선견지명은 틀리지 않았던 걸까. 엄마는 다 깊은 뜻이 있었던 거다. 막걸리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는 페르시아어만이 통했고, 로또 4등 번호까지 맞추자 확신의 찬 기대를 품게 했다.     


아이의 시선에서 바라본 어른의 세상     

영화는 사교육부터 공교육까지 빼곡한 스케줄에 허덕이는 어린이의 삶을 따라간다. 숨 쉬는 것조차 정해진 방법이 있는 것 같은 자유롭지 못한 굴레는 어릴 때부터 시작된다. 대체 이런 것들을 왜 해야 하는지 궁금해하는 것조차 무시해 버리는 시스템 속,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11살 인생이 참 고달프다.      


자녀 교육열이 높기로 유명한 대한민국의 사교육은 안 하면 뒤처진다는 두려움을 좀 먹고 웃자란다. 하나라도 더 가르치고 싶은 부모의 마음을 대변하는 단어 바로 선행학습. 어릴 때부터 학교와 학원을 드나들며 배움의 길로 일찍 들어선다. 학습관 관련된 질문이 아니면 사전에 차단하는 행위는 아직도 말뿐인 창의인재를 억압하는 모순이다. 그저 어른의 편리함에 내몰려 문제풀이 기계로 전락한 불운한 현실이다.    

 

내 아이만 도태될까 두려운 건 성적만이 아니다. 키로 환산된 우월한 외모도 남들 보다 떨어지면 안 된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오죽하면 일찍 자야 몸도 마음도 쑥쑥 자라지만 엄청난 숙제와 예, 복습에 치인 늦은 취침은 안쓰러움과 아이러니의 줄다리기다. 물리적인 시간을 파괴하는 과제는 너무 많고, 키 크려면 잠도 일찍 자야 하니. 딜레마도 이런 딜레마가 없다.      


일찍 적성과 재능을 찾는 게 나쁜 건 아니다. 문제는 교육 시기와 분양의 완급조절이다. 하루라도 빨리 발굴하는 게 중요하다지만 획일적이고 무리한 교육은 미성숙한 뇌를 멍들게 한다.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후 힘들게 취직한 대기업을 그만두고, 자연인으로 살아가는 동춘의 삼촌(김희원)이 대표적인 사례다. 조기 교육도, 창의력 발휘도 좋지만 아이는 아이답게 마음껏 놀아야지 않을까?      


자연인이 된 삼촌은 직장, 가족을 버리고 전 세계 수행기에 올랐다가 한국으로 돌아와 물욕 없이 산다. 종종 적재적소에 나타나 로또 한 장도 살 수 없는 동춘을 돕기도 하고, 막걸리와 대화를 이해하는 유일한 조력자가 되어준다. 두 사람의 귀여운 케미를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막걸리어를 학습한 어린이의 최후     

원형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동춘의 동그란 눈에서 시작해 까만 웜홀로 이어지는 상징은 우주의 티끌이지만 살기 위해 아등바등 허우적거리는 태초의 미생물과 인간은 같은 본능의 존재임을 암시하는 의미심장이다.결국, 막걸리의 지시대로 따라가다 마주한 양조장 장면은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결말에 도달한다. 이 모든 게 멀미 때문에 앓아누워 있던 동춘의 꿈인지, 한 폄 더 자라난 성장인 건지, 머나먼 우주와의 소통인 건지, 다양한 해석을 열어 놓는다.      


어린이가 상상해 볼 만한 엉뚱하고 기발한 사고가 곳곳에 녹아들어 가 있어 웃음을 유발한다. 아이의 시선에서 시작하고 끝난다. 그 중심에는 연기가 처음이라며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박나은 배우의 뚱한 표정과 말투가 뒷받침되었다. 한국 영화에서 잊지 못할 독보적인 캐릭터의 탄생을 예고한다.      


원작을 장편 영화로 만들면서 달라진 점은 수학여행 차편이 여객선에서 관광버스로 수정되었다. 이름 붙이기 좋아하는 동춘이 막걸리에 ‘김동막’이라는 이름을 지어주는 소소함이다. 초등학교 4학년의 12시 취침은 너무 가혹했는지 11시 취침으로 변경되었다. 새벽 4시 막걸리어를 깨달은 동춘은 바로 양조장으로 향한다. 그 사이 비어있는 간극은 삼촌 캐릭터를 넣어 살을 붙이고 중간 에피소드를 늘려냈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주는 영화다. 성장 드라마인 줄 알았는데 로드무비, 모험극이고 나아가 SF까지 섭렵하는 재기 발란한 시도에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없었다. 스토리텔러의 가능성을 보여준 박다민 감독의 차기작이 벌써부터 기다려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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