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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혜령 Feb 27. 2024

<바튼 아카데미>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바튼 아카데미>는 크리스마스 연휴를 맞아 학교에 남게 된 세 사람의 결핍을 보듬는 이야기다. 소외된 사람을 바라보는 온기와 위로를 넌지시 던진다.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작품상, 남우주연상, 여우조연상, 각본상, 편집상 총 5개 부문 노미네이트되어 있다.      


<사이드 웨이>, <디센던트>, <다운사이징>을 만든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신작이다. <사이드웨이>이후 폴 지아마티와 또 한 번 협업했다. 이혼 후유증을 와인으로 달래는 영어 교사 ‘마일즈’의 20년 뒤 모습 같은 <바튼 아카데미>의 ‘폴’이 인상적이다.      


폴 지아마티의 나이 든 버전 같으면서도 술 없이는 살 수 없게 된 엉망진창 인생을 후회하는 상황도 비슷하다. 두 남자가 여행을 통해 진실을 깨닫고 교사이면서도 출간을 꿈꾸는 예비 작가인 점도 닮았다. 전작의 상황과 묘하게 오버랩되는 감독과 배우, 캐릭터의 관계를 찾는 재미도 있다.      


1970년대 유행하던 패션 스타일과 아날로그 느낌이 물씬 풍기는 필름 촬영을 가능하게 한 렌즈,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다수의 히트곡이 흐른다. 보는 내내 마치 70년 대 바튼 아카데미에 들어가 있는 듯 몰입감을 선사한다. 오프닝에서 들리는 바스락거리는 소리, 그 시절 유행했던 디졸브 편집 기법은 아련한 향수를 자극한다.      


아웃사이더가 바라본 아웃사이더     

1970년 크리스마스 2주 전 바튼 아카데미의 방학은 설렘과 기대감으로 들떠있다. 다들 감옥 같았던 기숙사를 떠나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거나 휴가를 즐기려고 신났다. 하지만 이곳에 남아 야만 하는 슬픈 인생도 있었으니. 텅 빈 학교에 인기꽝 역사 선생님 폴(폴 지아마티), 머리 좋은 문제아 털리(도미닉 세사), 아들을 잃은 요리사(더바인 조이 랜돌프)가 어쩔 수 없이 2주 동안 동고동락하게 된다.      


서양의 크리스마스란 우리나라로 치면 명절과도 같다. 크리스마스 전후로 연말까지 흥분된 분위기가 고조된다.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연휴를 꿈꾸겠지만 세 사람은 자의든 타의든 싸늘한 학교에 남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바튼 출신인 ‘폴’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하버드를 중퇴하고 모교에서 역사 선생님으로 지내고 있다. 고대 문명사에 관심이 많아 유물, 유적을 찾고 싶은 마음을 품고 있다. 탐험가를 꿈꾸지만 현실은 저질체력, 교수실에서 추리소설이나 쌓아놓고 읽는 외골수다. 학생들 사이에서 짠 점수로 유명한 괴짜로 불린다. 교사 사이에서도 평판이 좋지 못해 친한 사람이 없다. 한때 제자였던 교장마저도 정치를 해야 살아남는다며 폴을 몰아세우지만. 절대 넘어가지 않는다. 아닌 건 아닌 거니까. 적당히 넘어가는 것도 있어야 될 텐데, 쓸데없는 고집과 자신만의 신념을 지키는 뼛속까지 바튼맨이다.      


최근 엄마가 재혼해 새아빠를 얻었다. 크리스마스에 해변으로 여행 갈 생각에 들떠 있던 ‘털리’는 버튼의 유명한 문제아다. 학교에 그런 애가 꼭 한 두 명씩 있다. 머리는 좋은데 오만한 말버릇과 행동 때문에 기피 대상 1호이자 누군가와 투닥거리느라 바쁜 아이. 바튼에 전학와서도 아슬아슬한 줄타기 중이다. 벌써 세 번 퇴학 위기를 넘겼고 바튼까지 쫓겨나면 더 엄격한 군인 학교로 가야 할 처지다.그나마 바튼에서는 조용히 있었던 털리가 폭발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방학인데 부모가 연락 두절이다. 희망이 절망으로 바뀐 순간이다. 재혼을 언제 했는데 둘만의 허니문을 간 야속한 엄마. 미성년자라고 뭐하나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불만은 극에 달한다.     


자랑스러운 바튼 졸업생 아들을 둔 요리사 ‘메리’는 최근 아들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다. 올해가 아들 없이 보내는 첫 크리스마스라 마음이 무겁다. 혼자 있는 것보다 아들이 다녔던 학교에 있는 게 편할 것 같았다. 가난한 형편 때문에 대학 대신 군대를 보낼 수밖에 없었던 메리. 금쪽같은 아들이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전사한 생각만 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시도 때도 없이 차오르는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위안인 건. 곧 조카가 태어날 예정이라는 희망이다.      


별거 없어 보이지만.. 젖어드는 위로     

영화는 그들의 외로움을 포근히 안아준다. 그게 바로 바튼 아카데미의 힘이다. 각자 말 못 했던 상처(비밀)를 하나씩 꺼내며 연대하고 서로를 응원한다. 특히 폴과 툴리는  바튼을 떠나 잠시 보스턴에서 겪은 일련의 사건사고로 전우애를 쌓는다.     


세대는 다르지만. 둘은 하얀 거짓말로 실수를 덮어주고, 네 잘못이 아님을 깨닫게 도와주며,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다독인다. 인생은 닭장의 횟대와도 같아서 언제나 위태롭고 더럽기 마련이고, 나 혼자 잘 살자고 태어난 게 아니기 때문에 부대끼면서 알아가야 하는 실천을 깨우쳐 준다.     


하지만 진입장벽도 있다. 과거 인종(문화)의 용광로라 불렸던 미국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영화적 재미가 반감될 수 있다. 크리스마스 연휴에 생긴 일은 <나홀로 집에>를 연상케하기 때문에 홀리데이 시즌 영화의 클리셰를 따라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영하의 추위, 넉넉지 않은 식재료의 한계 속 버텨야만 한다는 설정도 식상함이 느껴질 수 있다.     


그럼에도 영화는 천천히 스며들어 내면의 소용돌이를 만들어 낸다. 별일 없이 산다는 말을 온전히 체감하게 만들다가 감동을 안긴다. 고독, 외로움이라는 상처를 유난 떨지 않고 넌지시 달래준다. 묵묵하게 들어주는 경청, 아무렇지 않은 듯 툭하고 휴지를 내미는 관심이 이 영화의 미덕이다.     


역사 선생님 폴의 입으로 전해지는 다양한 문헌, 명언도 인상적이다. 역사(과거)는 현재를 알아가는 가장 중요한 열쇠기 때문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인류의 DNA다. 폴은 이성에게 매력을 어필하긴 글렀지만 훌륭한 선배, 괜찮은 어른, 좋은 친구, 영화의 스토리텔러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꼰대 같아 보여도 가장 꼰대 같지 않은 인물이 폴이다.     


헤어짐은 또 다른 만남인 것처럼 ‘또 보자’라는 인사는 다시 만나자는 약속인 셈이다. 진정한 친구란 단점을 말해주는 사람임을 종종 잊어버리고 산다. ‘저 사람은 왜 이렇게 꼬였지?’라며 당장은 상처로 다가오겠지만. 돌고 돌아온 깊은 애정임을 조금 늦게 알게 되는 뭉클함이 <바튼 아카데미>에 담뿍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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