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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장cine 수다

<벌집의 정령> 5살 아이의 눈으로 들여다 본 비극

by 장혜령

1973년 공개된 <벌집의 정령>은 빅토르 에리세의 데뷔작이다. 1940년대 스페인 내전을 어린아이의 시점에서 관찰하는 영화다. 최근 <클로즈 유어 아이즈>까지 오랜만에 선보여 과작 감독 반열에 오르며 클래식 반열에든 <벌집의 정령>이 개봉하게 되었다.


두 영화는 시작과 끝이란 단어와 어울린다. 둘을 함께 본다면 빅토르 에리세의 처음과 현재의 변함없는 문법을 찾아낼 수 있다. 영화를 현실과 모호하게 만드는 재능, 보는 행위를 영화적 메타포로 묶어낸 재주라 하겠다. 특히 주인공 아나를 연기한 아나 토렌트가 50년 후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서 실종된 배우 훌리오의 딸 아나를 연기하며 영화적인 순간을 만들어 냈다. 영화가 필름에서 디지털로 전환되고 극장 관람에서 OTT로 관함 행위가 달라지는 순간에도 영화 그 자체라 할만하다.

영화가 온다! 시간, 삶을 부유하는 이동성

<벌집의 정령>은 이동 영화 트럭에서 본 영화 <프랑켄슈타인>(1931, 제임스 웨일) 속 소녀와 괴물의 관계를 궁금해하던 아나(아나 토렌트)가 신비로운 경험을 하며 성장하는 이야기다. 자매의 친밀함과는 다르게 서로 소원한 부모는 프랑코 정권을 피해 시골로 낙향한 지식인을 대표한다. 아버지는 서재에 빼곡한 책과 시간 날 때마다 적어 내려가는 은유적인 일기로 좌절감을 드러낸다.


겉으로는 양봉업자 같지만 염세적인 현실에서 도망친 아빠, 결혼 전 연인을 잊지 못해 괴로운 엄마는 서로 대화를 멈추었다. 비참한 삶을 간신히 버티고 있으며 그나마 가정이란 안온함은 지키려는 부모다. 냉기와 환멸, 무관심과 무기력으로 만든 가정은 바삐 움직이는 벌이 빼곡한 겉과 속이 다른 거대한 벌집 같다. 벌집 모양의 육각형 창살을 자주 비추는 카메라는 집안을 환히 밝히는 노란빛으로 물든 모양새와 같다. 흔히 노란색은 희망을 상징하지만 영화 속에서는 벌집에 갇힌지도 모른 채 움직이는 꿀벌이 떠올라 안쓰러움까지 느껴진다.


전쟁 전후 배경으로 삼은 영화는 스페인 내전을 다룬 <판의 미로>나 홀로코스트를 다룬 <인생은 아름다워>가 떠오른다. 어린이의 순수한 눈으로 본 어른들의 흉포한 세상은 스스로 환상을 만들 수밖에 없는 슬픈 현실이다. 영화 속 아나는 언니 이사벨에게 <프랑켄슈타인>의 결말을 묻는다. ‘왜 괴물이 소녀를 죽였으며, 사람들은 왜 괴물을 죽인 거지’라면서 궁금해한다. 이사벨은 당황하지 않고 즉석에서 꾸며낸 이야기로 해석한다.

사실 괴물도 소녀도 죽지 않았으며 괴물은 영혼이 되어 주변을 떠돈다고 말이다. 그럴듯하게 둘러댄 거짓말을 아나는 철석같이 믿어 버린다. 정령은 누군가가 간절히 부르는 소리에 이끌려 나타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수업 시간에도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야 만다. 급기야 원하면 대화도 나눌 수 있다고 결론 내려 방과 후에도 온 동네를 배회한다. 그렇게 찾은 외딴 집과 우물은 아나에게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안긴다.


아나는 마을로 흘러 들어온 저항 군인을 괴물로 착각하게 되고 <프랑켄슈타인>의 소녀처럼 음식과 옷을 가져다주며 살뜰히 챙긴다. 그러나 저항군은 곧 발각되어 사살되고 군인이 착용했던 아버지 옷에서 발견된 시계는 아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눈을 떠야 비로소 볼 수 있는 것들


아나는 자신이 영화 <프랑켄슈타인>의 소녀가 된 듯 현실과 허구를 구분하지 못한다. 아직 현실과 상상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은 5살 아이 눈에 비친 세상은 결국 보이지 않는 존재를 끌어들인다. 결국 상상의 친구’를 만들어 내 외로움과 죄책감을 극복한다. “영화는 가짜야”라고 얼버무린 아사벨과 확연히 다른 입장이다.


오프닝에서 분주하게 “영화가 온다”라고 외치고 다니던 아이들이 이동 영화관 트럭을 에워싸며 묻는다. “이번 영화는 뭐예요?", 주인아저씨는 장르나 만듦새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저 “아름다운 영화란다”라고만 답한다. 이는 빅토르 에리세가 <프랑켄슈타인>을 평가하는 방식이며 영화의 아름다움을 은유하는 존경심이다.


그렇다. 영화는 오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순간이 있고, 카메라(눈)를 통해 세상을 보는 간접적인 행위가 바로 영화다. 아나가 학교 수업 중 돈 호세(마네킹)의 눈을 달아준 것도 같은 이치다.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본 영화와 세상은 잔혹한 현실을 잠시 잊게 한다. 괴물을 찾아 돌아다니는 아나의 바쁜 발걸음을 쫓다 보면 내전 후 폐허가 된 곳곳을 발견하게 된다. 잔혹한 현실을 눈 감아 버리는 어른들 대신, 맑고 동그란 눈을 뜨고 직시하는 존재가 아나다.


빅토르 에리세 감독의 최신작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서는 결국 눈을 감는다. 노장 감독이 22년 전 실종된 배우이자 친구 훌리오를 찾아 나서며 결국 자기 과거와 마주하는 이야기다. 미완성 영화를 보던 훌리오가 마지막 눈을 감고 떠올리던 건 무엇이었을까. 푸른빛이 감도는 캄캄한 밤 “내 이름은 아나야”라며 정령을 부르던 아나처럼 눈을 뜨고 행동할 필요성을 느낀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도록 하는 멋진 상상을 우리는 ‘영화’라 부른다.


인간은 버거운 현실을 잊기 위해 영화를 보는 것일까?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영화를 보는 경험 그 자체로 주인공이 되는 예술적 주제와 관련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며 영화는 현실로 들어가는 관문이라 말했다. 지치고 힘든 삶이라도 영화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눈을 떠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발견하려 오늘도 우리는 영화라는 필터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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