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활용도가 생활 전반으로 퍼지며 의존도가 높아지고 있다. 서칭, 요약, 가공 등에 필요한 시간을 절약해 주기 때문에 대체되는 일자리는 단순 업무만이 아니다. 최근 신입 변호사 채용이 감소하고 있다는 뉴스가 나온 만큼 변호사, 회계사 등 전문직 분야도 안전하지 않다. AI 시대에 사라질 직업 중 하나가 법조계라는 사실은 어쩌면 현실이 될지 모른다.
고작 3년 뒤 이야기
영화 <노 머시: 90분>은 지금으로부터 3년 후인 2029년을 배경으로 코앞까지 다가온 미래를 보여준다. 변호사, 판사, 배심원, 사형 집행인까지 모두 AI로 대체된 근미래를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손가락 하나로 일상생활 전반이 가능해진 디지털의 편리함, 그 뒤에 숨은 어두운 진실과 피해를 보여준다.
합리적 의심조차 배제된 ‘머시 사형 법원’은 시작부터 끔찍하다. 의자에 결박된 형사 레이븐(크리스 프랫)이 술에서 간신히 깨어나 상황을 파악하려 든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유죄 지수 92%가 넘으면 사형집행 시스템이 작동하는 냉혹한 사법 시스템 앞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다.
문제는 이 시스템을 만들어 낸 사람이 레이븐 형사라는 점이다. 어찌 된 영문인지 사태를 파악할 시간도 없이 급작스럽다. 데이터만으로 범죄를 판단하는 AI 판사 매독스(레베카 퍼거슨)로부터 아내 살인 혐의로 사형이 확실시되었다는 통보를 받는다. 레이븐은 90분 동안 무죄를 입증할 시간을 할당받고 추리와 단서, 인맥을 총동원해 스스로를 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90분 후 그는 세상을 등지게 된다.
‘서치’와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기시감
<노 머시: 90분>은 두 영화가 떠오른다. 첫 번째 영화는 <서치>다. 스크린 라이프(디지털 기기 화면을 영화 장면으로 보여주는 기법)를 적극 활용한다. 모든 CCTV, 휴대폰 기록, 금융, 교통 데이터, 개인 SNS가 시립 클라우드에 저장되는 극단적 세계관은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노트북, 데스크톱, 영상통화, 보디캠을 관객이 그대로 보도록 한다. 타인이 기록이나 사적 영상을 훔쳐본다는 죄책감으로 긴장감이 더해진다.
두 번째는 <마이너리티 리포트>다. 머시는 프리크라임 시스템의 최신 버전 같다. 프리크라임은 범죄 예측을 통해 사건 발생을 줄이는 최첨단 치안 시스템이다. 세 예언자의 환영으로 범죄를 애초에 막는다는 좋은 의도지만 애초부터 정보가 잘못되었다면 오류인 문제점이 발생한다.
또한 아무리 극심한 범죄가 판치는 LA라고 해도 모두의 개인 정보를 마음대로 열람하는 머시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다. 모든 권한을 국가 시스템 하나로 통제하는 제약도 심하다. 치안을 이유로 감사와 억압은 또 다른 문제를 부를 수 있다.
AI 사법 시스템의 경종
원제 ‘머시(Mercy)’와 정반대인 한국 제목만 들어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아차리기 힘들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면 AI 사법 시스템의 허점을 지적한다는 게 느껴진다. 완벽함 속의 결함을 들추며 생각할 거리를 던지며 끝난다.
90분 동안 벌어지는 재판 시간과 러닝타임 100분이 비슷해 체감 시간이 극대화된다. 화면에 표시된 시간의 흐름이나, 유죄 확률 퍼센트 등을 숫자로 시각화해 현장감을 더했다. 게임의 주인공이 되어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것 같은 일종의 체험이다. 몸이 결박된 한계를 파트너, 증인, 딸을 통해 해결해 나가며 데이터만 읽을 수 있는 매독스의 사각지대를 파고든다.
마치 알파고와 인간의 대결의 업그레이드 버전 같지만 레이븐과 매독스의 팽팽한 싸움은 점차 날카로움을 잃어간다. 냉철한 판단으로 LA의 범죄율을 낮춘 사법 시스템이 유독 레이븐에게만 관대한 한계점이다.
후반부로 갈수록 긴장감 떨어진다. 90분 제한 시간 동안 시험 문제 풀듯 달려가는 빠른템포는 초반 시선을 끌 뿐 지속되지 않는다. 신박한 소재를 흔한 할리우드 식 범죄 스릴러, 가족 서사로 마무리한다. 결국 AI는 인간을 돕기 위한 도구일 뿐 인간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다는 윤리적 관점을 제시하는 데 그친다. 팥 없는 찐빵, 바나나 향만 넣은 바나나우유 같다. 킬링 타임용으로는 적절하나 SF 영화의 철학적인 깊이감과 통찰력은 부족한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