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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혜령 Oct 13. 2019

<여배우들의 티타임> 카메라가 꺼져도 빛나는 은발

여배우들의 티타임, Nothing Like a Dame, 2018, 로저 미첼


흔히 여배우라면 우아한 몸짓, 아름다운 언행, 완벽한 사생활을 떠올린다. 하지만  네 명의 배우는 여성으로서 당당히 자신만의 길을 걸었다. 여배우란 말보다 '배우'라는 말을 더 좋아할 것 같다. 모두 영국이 사랑하는 세계적인 배우기 때문이다.


영국을 대표하는 배우와의 티타임

영화 <여배우들의 티타임>


영화는 마치 네 배우를 위한 헌사 같다. <노팅 힐>의 '로저 미첼'감독의  온기가 가득하다. 영국 왕실로부터 남자의 기사(Sir)에 해당하는 '데임(Deme)'작위를 받은 살아 있는 전설들이 한자리에 모였으니 말이다. 총 필모그래피 700여 편, 평균 연기 경력 70년, 영미 아카데미, 골든 글로브, 에미상 등 131회 수상에 빛나는 세기의 여배우들이 말하는 일, 사랑, 가십, 추억을 꺼내는 시간이다.


목가적인  전원 풍경과 자연스레 나오는 삶의 여유가 관객을 티타임에 인입시킨다. 주디 덴치, 매기 스미스, 에일린 앗킨스, 조안 플로라이트의 연기 인생을 듣는다는 것은 곧 영국 문화산업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과 같다. 가히 살아있는 화석이라고 칭할만하다.


네 배우는 가끔 시골집에 모여 티타임을 갖는다. 은발이 되었지만 여전히 입담은 살아 있고, 연기에 대한 열정도 식지 않았다. 전형적인 미인 상이 아니라 배우가 되지 못할 거란 말에 보란 듯이 틀렸음을 증명하고도 남았다.  주디 덴치는 열여덟 때 외웠던 대사를 줄줄 외우는 장면을 보여준다. 프로의 세계란 이런 것일까 놀라움을 금할 길 없다.



아름답게 나이 듦을 보여주는 표본

영화 <여배우들의 티타임> 스틸컷


그들은 연륜, 당당함, 우아함이 세월을 타고  녹아들어가 있다. 젊은 시절에는 정치나 종교 이야기는 집에서 할 수 없었고, 예쁘지 않은 외모가 걸린다는 말을 수없이 들어왔다. 남성 중심 서사에서 주변 캐릭터에 머물던 시기를 지나 여성 서사, 여성 캐릭터로 극을 이끌어나간 공이 크다 하겠다. 그런 네 배우를 지탱하는 힘은 잃지 않는 자신감과 흔들리지 않는 연기혼이었다.


솔직 담백한 수다는 수위를 넘나들 때도 있다. 나이를 물어보는 질문은 짓궂게 대답하기도 하고, 연신 사진을 찍어대는 스태프에게 불편한 심기를  재치있게 드러내기도 한다. 같은 사건에 서로 다른 말을 할 때면 버럭 하다가도 서로의 친분이 묻어난 존경도 잊지 않는다.


네 배우와의 품격 있는 티타임에 가장 많이 거론되는 사람은 바로 영국의 배우 겸 연출가, 프로듀서였던 '로렌스 올리비에'다. 수십 년이 지났고 이제는 말할 수 있다고 선언하는 것 같다. '비비안 리'의 남편으로 유명한 그는 '조안 플로라이트'와 결혼했고 남편이자 동료, 제작자로서의 많은 일을 해왔기 때문이다. 로렌스 올리비에와의 호흡을 떠올리며 네 배우는 많은 이야기보따리를 꺼내놓았다.



그 밖에도 남편들과의 연기 호흡이나 데뷔 시절의 뒷이야기, 젊은 시절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 등 허심탄회한 비하인드스토리가 펼쳐진다. 초창기 시절부터 전성기를 지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 편의 영화 같은 인생이 배우들의 입을 통해 전해진다. '주디 덴치'는 007영화의 'M'을 맡게 된 이유를 사실 남편의 팬심 때문이었다고 말해 폭소를 자아낸다.


배우는 타고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다

영화 <여배우들의 티타임> 스틸컷


영화 <여배우의 티타임>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코 이 장면 아닐까. 비록 보청기를 껴야 하고 눈이 침침해 큰 글자 대본을 봐야 할지라도 모두가 한목소리로 대답했던 말이 있었다. 계속 일하고 싶냐는 질문에 '계속해서 불러준다면 언제든지!'라는 말이 이구동성으로 나왔다. 열정이 식지 않았다면 언제라도 연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이 가슴에 와닿는다.


젊은 시절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고민하는 장면은 전성기 때 모습을 떠올리는 타임머신같다. 참 멋진 배우들이 아닐 수 없다. 나이 듦을 최고의 아름다움으로 만들어 낸 네 배우들. 이들이 털어놓는 수다를 듣다 보면 연륜이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지혜임을 실감한다. 지금 무엇을 시작하기에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는가? 배우들은 절대 적당한 때란 없다고 말한다. 화양연화는 언제든지 다시 찾아올 수 있다는 신념으로 정진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깊은 주름은 나이가 들어 얻어지지만 연륜의 깊이는 거저 얻어지지 않는다.




평점: ★★★


한 줄 평: '여배우'란 말이 없어지는 그날을 위해 (한국배급사 제목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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