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신문이 태동했을 때 종이신문의 시대는 갔다고 했다. 하지만 어떤가. 아직 종이신문은 미비하나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지면 신문을 발생하던 신문사도 인터넷이란 괴물 앞에서 살아남기 위해 변화를 모색했다. 인터넷으로 위기를 맞을 거라 예측했던 것도 쉽사리 사라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영화 <신문기자>는 언론의 본질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이상한 기시감, 어디서 들어본 이야기
진실을 추적하려는 믿음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언론인의 본질은 진실을 알리려는 저널리즘의 정신이다. 그러나 권력의 감시견에서 경호견이 되고 있는 요즘 언론은 점점 누구의 편에 서야 할지를 잊어버리고 있다. 진실에 눈 감지 않고 정의를 위해 싸우는 언론의 역할이 희석되고 있는 요즘, 영화 <신문기자>는 경종을 울리는 영화다. 이는 얼마 전 한 연예인의 죽음을 보도하는 과정에서 언론이 지켜야 할 자세에 대한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다.
영화는 가짜 뉴스, 여론 조작, 댓글 부대, 민간 사찰, 신상털기 등 국가라는 큰 골리앗과 진실을 밝히려는 작은 다윗의 싸움이다. 아베 정부가 세계를 겨냥해 작업해 온 역사왜곡의 물밑작업 또한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서서히 슬며시 아무도 모르게 진행하되 들켰을 경구 돈, 두려움을 건드려 기필코 막아야 하는 무엇. 그들은 정권 유지가 곧 이 나라 평화의 유지라고 말한다. 가족의 안위와 미래를 거들먹거리며, 나라의 민주주의는 형태만 있으면 된다고 돌려 말한다. 이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다면 나와 가족, 모두가 위험해질 수 있다.
영화 <신문기자>는 '모치즈키 이소코'기자가 쓴 동명의 책을 모티브로 한다. 일본 사회를 다루고 있지만 한국 사회 또한 이상하리만큼 기시감이 크다. '후지이 미치히토' 감독은 현 일본 사회를 다루고 싶었다고 했다. 여러 장면에서 강한 리얼리즘이 담겨 있다. 예로 들면 내각정보자료실은 무미건조하고 푸른 무채색의 콘트라스트를 주었고, 토우토 신문은 투박하지만 옅은 색감을 이용한다. 모티브가 된 모치즈키 이소코 기자가 실제로 등장하는 장면은 픽션과 논픽션의 간극을 허물었다.
메타포로 들여다보는 일본 사회
영화 <신문기자>는 팩트를 생명으로 하는 신문에서 다양한 메타포를 활용한다. 영화는 픽션이지만 다큐멘터리라고 봐도 될 만큼 경계가 열려있다. 일단 '양'이다. 양은 순종적인 일본 국민을 빗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직접적인 언급은 1968년 미국에서 벌어진 '더그웨이 양 사건'을 상징한다. 더그웨이 양 사건은 정부의 군 연구소에 신경가스가 유출돼 대량의 양이 죽은 사건을 말한다.
이는 은폐되고 정부의 이슈를 고발하는 시작이면서도 영화의 가장 큰 메타포로 쓰였다. 검은 눈을 가진 양은 흡사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하다. 블라인드에 가려 진실을 보지 못하는 국민을 말하고 있다. 언제까지 선글라스를 씌우고 블라인드를 내리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것인가. 마지막 장면에서 목소리 없이 입모양으로 유추할 수 있는 말은 모두를 향한 미안함이라고 봐도 좋다.
배경이 가을이기 때문에 간과할 수 있는 메타포도 있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장면이 많다는 것이다. 한 인터뷰에서 감독은 붙어있지 못하고 떨어지는 낙엽을 일본 시민의 목소리에 빗댄다고 말했다. 시민이 연대해 큰 목소리를 낼 수 있지만 혼자 있을 때는 그저 강한 바람에 힘 없이 떨어지는 낙엽일 뿐이다. 거대한 무언가에 대응하기 위해 서는 여럿이 의기투합해 위기를 헤쳐 나가야 함을 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부녀관계를 빗대 국가와 언론을 말하고 있다. 영화에서는 유독 부녀관계가 강조된다. 요시오카(심은경)와 아버지는 세대를 이은 기자 출신이다. 공무원 스기하라(마츠자카 토리)는 곧 딸 출산이 예정되어 있다. 모든 짐을 지고 극단적인 선택을 한 칸자키(다카하시 카즈야)도 딸이 있다. 일본은 남성의 권력이 강하다. 권력에 쉽게 대응하지 못하고, 정부의 나팔수가 되어버린 언론은 흡사 부모와 자식 관계처럼 보인다.
하지만 요시오카는 좀 다르다. 기자에게 치명적인 오보를 냈다는 이유로 자살했던 아버지는 불의에 순응하지 않는 기자였다. 일본인이나 미국 뉴욕 출생으로 한국인 어머니와 일본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탄탄대로를 버리고 일본 신문사에 입사했다. 사회부 4년 차 기자지만 매번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으로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어느 날, 양 그림이 그려진 한 문건을 받고 집요하게 추적하기 시작한다. 뭔가 있다는 직감은 위험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강한 이끌림으로 요시오카를 내몰고 있다.
요시오카는 국가와 가족을 위한 일이라는 정부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때문에 작은 언론사의 사회부 기자임에도 총리 직속 내각정보관의 행태와 내각정보실이 만드는 대학의 이면을 파헤치기 위해 집요한 취재를 강행한다. 요시오카의 앞날은 순탄치 않다.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뜻을 이어가려는 명분, 순수한 기자로서의 피 끓는 사명감인지 명확하지 않다. 아마 요시오카는 가시밭을 걸어갈 가능성이 크다.
우리 사회는 다수가 바라는 안정성을 뒤흔드는 변화와 혁신의 물결을 생각보다 반기지 않는다. 그러나, 인류 역사가 한걸음 진보했을 때는 희생으로 다수의 혜택이 있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 매달려 있기조차 벅차 떨어진 낙엽(시민)이 수북이 쌓였지만 언젠가 불쏘시개로 쓸 수 있는 일말의 희망을 꿈꾸고 싶다. 꺼지지 않은 작은 불씨는 언젠가 타오른다.
평점: ★★★☆
한 줄 평: 영화가 끝난 뒤 비로소 다시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