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 ‘켄 로치’ 감독은 <나, 다니엘 블레이크> 이후 은퇴 선언을 했다. 하지만 과도한 시간으로 가정의 행복과 개인의 삶까지 좀 먹는 신자유주의 경제를 가까이에서 목격하고 다시 카메라를 들었다.
영화의 시작. 일용직을 전전하던 가장 리키(크리스 히친)는 택배회사 면접을 본다. 택배기사는 프랜차이즈 형태로 고용된 자영업자라 사고가 나면 책임은 기사에게 있다는 말을 듣는다. 아무렴 어때, 열심히 일해서 집도 사고 대출도 갚자고 생각한 리키는 아내의 차를 팔아 택배차량을 구입한다.
첫날부터 쉽지 않다. 주차 딱지 떼이는 건 예사 CCTV처럼 2분만 자리를 비워도 배송추적 기계는 불같이 화를 낸다. 택배 배송추적 시스템은 실시간으로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검색할 수 있다. 시간 안에 물건을 배달해야 하기 때문에 항상 고객에서 감시당하는 기분이다. 밥 먹을 시간도 쉬는 시간도 없이 물건을 날라야 돈을 받을 수 있다. 하루 24시간이 모자란다. 온종일 돌고 나면 집에 와서 아이들 얼굴 볼 새도 없이 파김치가 된다.
한편, 시간제 간병인으로 일하는 애비(데비 허니우드)는 자기 일에 자부심을 느낀다. 돌봄이 필요한 환자에게 최대한 가족 같은 마음으로 다가가고자 한다. 그러나 최근 남편의 새 일자리 때문에 버스를 타고 이동하게 되었다. 이동시간이 길어져 길에서 낭비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환자를 제때 돌보지 못해 스스로 화가 났다. 삶의 질과 환자 만족도 모두가 떨어지고 있다. 일과 가정 모두 양립할 수 없을까? 애비는 무척 서글프다.
돌봄으로 종일 14시간 일하지만 최저임금으로 계산된다. 정해진 시간 외에 일하더라도 수당을 받지 못할뿐더러 교통비, 식비 모두 본인이 부담하고 있다. 하지만 나름의 원칙과 책임감을 가진 애비는 업무 시간이 끝났다고 환자를 버리고 갈 수 없다. 환자의 불편한 곳을 살피고 주말에도 신경 쓰이는 환자를 한 번 더 들여다본다.
리키와 애비는 ‘긱 워커(GIG Worker)’다. 긱 워커로 일하는 수많은 노동자는 복지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근로자 보호는 어림없고 때로는 창살 없는 감옥이 되기도 한다. 열심히 일을 해도 여전히 가난하기만 한 ‘워킹 푸어’가 늘어나고 있다.
긱 워커는 신자유주의 경제와 4차 산업혁명으로 대세가 된지 오래다. 긱(GIG)이란 원래 음악 업계에서 쓰이던 용어로 음악가가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정해진 시간 동안 관중 앞에서 공연하는 행위를 말한다. ‘긱 워커(GIG Worker)'란 다양한 산업에서 단기 일자리를 수입으로 하는 임시직 근로자를 지칭한다.
‘긱 경제(GIG Economy)'는 자영업, 프리랜서가 되어 자유롭게 일하는 구조를 말한다. 융통성 있게 시간 조율을 할 수 있지만 과도한 업무시간, 부족한 복지 등 폐해도 만만치 않다. 평생직장은 사라진지 오래, 필요에 따라 단기 계약을 맺고, 시간제로 근무하며, 교통비, 식비, 휴가나 복지는 본인이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 긱 워커는 또 다른 노동착취의 형태다.
<미안해요, 리키>는 영국 이야기지만 유난히 공감 가는 부분이 늘어난다. 우리나라는 20년 전 IMF 이후 급격한 가계부채와 비정규직, 명예퇴직을 겪은 혼란을 겪었다. 영화에서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노던록 은행이 파산하며 건축회사에서 실직, 주택융자를 받지 못해 여러 집을 전전하는 리키네 가정을 다룬다. 아내 또한 또 다른 긱 워커이며 부부가 밤낮없이 일하며 아이들을 돌볼 시간이 부족하지만 가계 사정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영화 속 이야기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낯설지 않은 집안 풍경이 씁쓸하기만 하다.
부모의 맞벌이에 아이들은 방치되고 우등생이었던 세브(리스 스톤)는 미래를 믿지 않게 되었다. 대학을 가봤자 빚 갚느라 아르바이트해야 하고, 졸업해봤자 변변치 않은 직장을 다니며 주말마다 술에 취해 현실을 잊고 싶지는 않아서이다. 보이지 않는 미래를 위해 사느니 현재를 즐기며 하고 싶다.
점점 심각해져만 가는 세브 문제로 갈등이 커지며 리키네 가족은 심하게 흔들린다. 방황하는 오빠와 힘든 부모를 지켜보는 딸 라이자(케이티 프록터)는 일찍부터 철이 들어 버렸다. 아빠와 택배 차량을 타고 이곳저곳을 함께 다니며 부모를 돕기도 한다. 라이자는 약간 우울하지만 괜찮다. 그저 예전처럼 행복했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 과연 라이자의 바람대로 위기의 가정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전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보여준 복지제도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다시 돌아온 켄 로치는 여전히 다큐멘터리를 보듯 꾸밈없는 시각을 담아 따스한 위로는 건넨다. 너무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차갑고도 각박한 현실을 그대로 담아 위태롭다가도 간절해서 위대한 희망을 보여준다. 여전히 연기 경험 없는 비전문 배우들로 구성되었고, 감정을 왜곡할 수 있는 음악은 줄여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자 했다.
리키는 현재 사람답게 살기 위한 최소한의 행복을 누릴 기회조차 박탈당했다. 우리 사회는 표면적으로 워라벨을 외치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여전히 워킹 푸어가 존재한다. 이는 개인이 바꿀 수 없다. 사회 전체 시스템이 변하지 않는 한 리키네 같은 일은 언제나 일어날 수 있다. 본인은 물론 가정, 나아가 사회까지 무너지는 악순환은 국가를 넘어 세계 문제가 되고 있다. 당일 배송이란 허울 좋은 마케팅 때문에 오늘도 야간근무와 새벽 배송, 주말 배송에 내몰린 택배기사의 이야기를 이제 뉴스에서 그만 보고 싶다.
원제 ‘쏘리 미 미스드 유(Sorry missed You)'는 영국에서 택배 수신자가 부재 중일 때 남기는 쪽지의 표현이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쪽지에 휘갈겨 쓰는 가족을 향한 메시지는 묵직한 울림을 준다. 이로써 원제처럼 우리가 놓친 수많은 리키들을 기억하는 계기가 된다. 미안해할 사람은 누구인지, 우리는 어디로 시선을 향해야 하는지를 가리키고 있다.
평점: ★★★★★
한 줄 평: 신자유경제 시대 거장의 따스한 일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