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를 걷는 소년> 어디에도 설 수 없던 소년의성장기
영화 <파도를 걷는 소년>는 제20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되며 한국장편경쟁부분 배우상과 심사위원 특별언급 2관왕을 달성했다. 방황하는 청춘, 이주 노동자 2세대, 청량한 바다의 서핑과 함께 제주의 속살을 들여다본다.
최창환 감독은 기획 초기, 학교 밖 아이들을 주제로 만들려고 했다가 청춘과 서핑이란 주제로 좁혔고 지금의 영화가 탄생했다고 말했다. 곽민규 배우는 전작 <내가 사는 세상>에서 설자리 없이 밀려나는 지역 예술가로 함께 한 바 있다. 이번에는 고향 하이난으로 떠난 엄마의 그리움을 간직한 채 제주 바다에 머무는 소년을 연기했다. 그래서일까. 어디에도 섞이지 못하고 서걱거리는 안쓰러운 등을 쓸어 주고 싶은 마음이 커진다. 푸른 바다와 파도 서핑을 즐기는 이국적인 풍경 뒤로 외국인 불법 취업 브로커로 일하는 소년을 중심에 세운다.
어디에도 설 수 없던 소년, 파도 위에 서다
영화 <파도를 걷는 소년> 스틸컷주인공 김수(곽민규)는 제주에서 나고 자랐지만 이주노동자 2세라는 은근한 차별을 겪으며 살고 있다. 사연 있어 보이는 얼굴을 하고 먼 발치에서 서핑족을 바라다보는 모습이 애잔하다. 수에게 서핑은 다가갈 수 없는 꿈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바다는 수를 불러내고 있었다. 엄마의 따뜻한 품처럼 넓고 깊게 수를 품어주는 유일한 존재였다. 바다는 차별하지 않았다. 스스로 일어설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려주고 어떤 모습이든 선택을 존중해 주는 태도를 취한다. 그래서 하염없이 지치고 힘들 때마다 바다를 바라보는 걸 멈출 수 없었다.
무엇보다 바다에는 왜인지 자유로워 보이는 서핑족들이 있었다. 수는 사실 서핑을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돈이 필요할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찾게 되는 필요악, 갑보를 찾을 수 밖에 없었다.
인력 사무소 사장 갑보(강길우)는 함께 일하는 동생 필성(김현목)의 발목을 잡고 있다. 갑보는 항상 “우리는 가족이야, 우리끼리 똘똘 뭉쳐야 해”라며 이들 붙잡는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기 이익만 챙기는 계산적인 사람이다. 때문에 수와 필성을 위협하고 갈등하게 만들지만 악인으로 그리지는 않는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캐릭터로 치환해 감정이입을 돕는다.
갑보는 일을 그만두려는 수에게 “네가 한국 사람처럼 살 수 있을 것 같냐”라는 날선 말도 남긴다. 갑보 또한 한국에서 오래 살았지만 한국사람과 쉽게 섞일 수 없는 사람이긴 마찬가지다.
흔들리는 인생을 붙잡아 줄 존재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영화 <파도를 걷는 소년> 스틸컷수는 먹고살기 바쁠 뿐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열중해서 빠져 지낼 수 있는 건 무엇인지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 해나(김해나)와 똥꼬(민동호)를 만나 조금씩 변화한다. 갑보와도 서서히 멀어져 간다. 해나는 파도를 미친 듯이 타다 보니, 길이 보이더라며 파도에 일단 몸을 맡겨보라 조언한다.
“처음엔 막 파도 잡겠다고 안간힘을 쓰면서 탔는데, 가만히 보니 길이 보이더라”
자신도 너와 같이 힘들 때가 있었지만 서핑을 시작한 뒤 좋아하는 걸 찾았다고 속마음을 먼저 내보인다. 파도를 타며 앞만 보고 달렸던 자기 자신이 보였고, 옆에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고 고백한다. 사실 서핑이 좋은 건지 사람들이 좋아서 서핑을 하는 것이 아직 잘 모르겠지만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는 것이라는 점은 확실히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똥꼬는 방황하는 청춘의 길잡이 같은 사람이다. 해나가 망망대해에서 떠도는 청춘을 찾아 레이더를 돌리면 똥꼬가 그들에게 용기와 희망으로 건져 낸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흔들리는 청년들에게 믿음직한 버팀목, 삶의 가이드가 되는 존재가 이들이다.
영화 <파도를 걷는 소년>은 파도를 타며 성장하는 청년들의 이야기면서도 인생에 대한 성찰이다.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인생의 길잡이가 필요한 어른들을 위한 영화다. 수처럼 앞뒤 재고 따질 것 없이 하고 싶은 일,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일이 있다는 건 행운이다. 많은 사람들이 삶에서 목적과 하고 싶은 일을 몰라 ‘마지못해 산다’라고 말하기도 하니까.
영화 <파도를 걷는 소년> 스틸컷잘하지 못하지만 좋아하는 일을 시작할 때는 정해져 있지 않다. 하퍼콜린스 편집장이자 영화 <매기스 플랜>의 원작자인 '캐런 리날디'는 17년 전 마흔에 서핑을 배웠지만 주의에서 잘 탄다는 말을 듣지 못하는 서퍼다. 뛰어난 서퍼였던 적은 없지만 바다에서 배운 것들이 삶을 살아갈 근간이 된다는 것을 몸으로 배웠다고 말했다.
그래서 더욱 수의 선택을 응원하고 싶다. 버려진 보드를 가져와 스티로폼을 덧붙여 만든 보드지만 주변 눈치 보지 않고 할 수 있는 용기가 부럽다. 서핑보드 위에서 유유자적 물살을 가르는 순간은 찰나다. 그 찰나를 위해 넘어지고 버둥거리며 실패를 경험하는 것이다. 모두가 끊임없이 파도(인생)에 자신을 밀어 넣으며 수차례 넘어질 것이다. 실패가 모여 생각지도 못한 인생의 찰나, 굳건히 견디는 힘이 되어 줄 것이다.
평점: ★★★
한 줄 평: 서핑도 인생도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