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이성적인 사고와 윤리, 그리고 존엄성을 가지기 때문일까? 하지만 생존 본능에 위협을 받았을 때도 인간다움이 지켜질 수 있을지 궁금하다. 영화 <더 플랫폼>은 인간의 삼대 욕구라고 불리는 식욕, 수면욕, 성욕 중에서 ‘식욕’에 포커스를 맞추었다. 장르적 메커니즘 속에서 사회 불평등과 팬데믹의 혼란이 현재 시대상과 때마침 잘 통한다.
먹지 않으면 살지 못하는 극한으로 몰아넣었을 때 그 한계를 서서히 지켜보는 고문이다. 끔찍하고 잔혹해 차라리 눈 감고 싶다. 한 끼를 굶어도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나는 만약 감옥에서 깨어난다면 살아 나갈 재간이 없다고 상상했다.
사회의 축소판 수직 시스템의 질실
영화는 시작부터 수위가 높다. 현대 신자본주의 시스템을 그대로 투영한 은유가 돋보인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수직 감옥에서 깨어난 남자 고렝(이반 마사구에)의 시선으로 이어진다. 이미 1년을 버틴 룸메이트 트리마가시(조리온 에귈레오)는 그동안 모은 정보를 조금씩 쏟아낸다.
그의 말에 따르면 하루에 한 번 위에서 음식을 담은 플랫폼(식탁)이 내려오고 한 달 주기로 방이 랜덤으로 바뀐단다. 층을 이동할 때마다 새 계급을 받는 것. 아랫사람을 업신여기고 위층 사람과는 말을 섞지 않는다. 때문에 배설물은 물론, 다른 사람도 먹지 못하도록 멀쩡한 음식도 망가뜨리는 일을 서슴없이 한다.
소위 구덩이라 불리는 건물은 몇 층까지인지 알 수 없어 절망적이다. 누구라도 꼭대기에서 밑바닥까지 추락할 수 있다는 예측불허의 묘미가 팽팽한 긴장감을 선사한다. 마치 돈이 있을 때와 돈이 없을 때가 달라지는 우리 사회의 축소판인 것 같아 씁쓸함이 커진다.
확실한 것은 밑층으로 내려 갈수록 먹을 음식은 줄고, 분노와 욕심이 커진다는 거다. 꼬리칸에서 머리칸까지 직진하는 <설국열차>의 수직 버전 같다. 꼭대기에 있는 자, 바닥에 있는 자, 추락하는 자만 있는 서열화의 표본, 명확한 피라미드다. 궁지에 몰린 인간이 앞서 말한 동물과의 차별성이 끝까지 지켜질지가 의문이다. 이야기가 점점 흥미로워진다.
영화는 타인과의 연대, 고착된 시스템을 바꾸는 게 얼마나 힘든지를 충격적인 이미지로 보여준다. 이 건물에는 나름의 규칙이 있다. 닥치는 대로 먹어두지 않으면 언제 또 먹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플랫폼 위에 있을 때만 섭취가 가능하며 음식을 쟁여 놓았을 경우 여지없는 제약이 가해진다. 때문에 더더욱 지금 먹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커진다.
먹을 만큼 먹는다는 말을 절대로 지킬 수 없다. 마치 뷔페에서 먹지도 못할 음식을 접시 가득 담아오는 것과 비슷하다. 배가 고파서 먹는 것인지, 남이 먹기 전에 내가 먹으려는 욕심인지 이유 없는 행동이 이어진다. 하지만 자신이 어떤 층에서 깨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보복은 자제하는 것이 좋다. 방이 무작위로 재배치되면 특권층과 아래층의 계급은 언제든지 전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굶주림은 인간의 광기를 자극해 먹히는 것보다 먹는 편이 낫다는 인식을 누적한다. “어떻게 인간으로서 저럴 수가 있을까”라는 경악스러운 행동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여야 하는 인간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난다.
고렝은 사실 다른 사람들과 들어온 경위가 좀 다르다. 6개월을 버티면 학위를 준다는 말에 덜컥 지원한 것이다. 이참에 담배도 끊고 책이나 보자는 심산으로《돈키호테》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가 책을 고른 건 다소 의아하다. 딱 하나의 물건만 반입 가능한데 책을 가지고 온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다들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거나 생명을 지킬 것을 오지만. 고렝은 세상을 향해 저돌적으로 직진하는 고독ㅁ한 돈키호테를 자처한다.
고렝은 처음에는 역겨워 먹지 못하지만 차차 시스템에 순응한 듯 보인다. 하지만 아직까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이타심이 살아 있다. 과연 그를 구원자나 전달자로 볼 수 있을까. 그는 최후의 수단을 선택한다. 바로 플랫폼을 타고 바하랏(에밀리오 부알레)과 바닥 향해 내려가자는 것. 가만히 6개월만 버티면 나갈 수 있는 길을 버리고 고난을 자처하게 된다.
한 층씩 내려가며 그동안 먹지 못했던 사람들을 위해 음식을 지켜낸다. 그리고는 설계자에게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판나코타를 지켜낸다. 과연 고렝이 지키려고 했던 것은 인간의 존엄일까, 목숨일까? 판나코타가 완벽한 상태로 시작하는 층은 하층민의 메시지에 응답할 것인가?
새로운 시스템이 살아남기 어려운 이유
민주주의 사회란 낙오자 없이 모두를 위한 사회다. 나만 살고자 하는 이기심, 개인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이곳의 모두가 생존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게 설계되어 있지 않다. 조금씩만 가지고 함께 연대하면 오래 지속할 수 있지만, 어리석은 인간은 머리로만 알지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때문에 이 시스템에서 25년간 일했던 이모구리(안토니아 산 후안)의 주장이 꽤나 의미심장하다. 이 회사의 사무직이었던 그녀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자청해 들어왔다. 그녀는 접시에 챙겨둔 것만 먹고 2인분의 접시를 따로 마련해 밑의 층 사람들이 먹도록 배려하자는 새로운 시스템을 제안한다. 배식의 칼로리를 나누면 모두가 살 수 있는 자발적 연대를 주장하고 나선다.
하지만 연대의식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음식을 먹을 만큼 먹는다면 더 많은 사람이 살 수 있지만 나도 당했다는 분노와 욕심은 보복 심리를 부추긴다. 음식을 밟거나 배고프지 않아도 욱여넣음으로써 심리적 만족을 얻는 거다. 점점 인간성을 잃고 괴물만 남게 된다. 고립, 불안, 배고픔 앞에서 우리보다 어려운 사람을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영화는 이기적 쾌락과 사회 전체의 행복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낱낱이 보여준다.
안타깝게도 영화 속 모순적인 체계는 삐걱거려도 대충 굴러가게 되어 있다. ‘어쩔 수 없고 뻔한 것’이라 포기해 버리면 언젠가 자신마저 거대 시스템의 한낱 부품으로 희생될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오늘은 내가 아니었지만 내일은 내가 될 수 있다는 공포가 영화 전반을 지배한다.
영화 속 사람들은 굶어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인간성을 저버린다. 그 매개를 한정된 음식 배급으로 보여주었다. 열심히 살려고 안간힘을 써도 결국 가난과 허기를 벗어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계급은 고작 6미터의 층간 높이다.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하는 시대에 <더 플랫폼>은 묻고 있다. 지금 시스템에 순응할 것인가 6미터를 넘어 바꿀 것인가.
평점: ★★★★
한 줄 평: 다이어트 할 때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