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마지막 임무를 마친 청부살인업자 인남(황정민)과 태국에서 벌어진 아이 유괴 사건, 그리고 인남이 죽인 남자의 동생 레이(이정재)의 쫓고 쫓기는 하드보일드 액션영화다. 무자비함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분노의 칼끝은 춤추듯이 복수를 향해 나아가고 정글의 왕이 둘 일 수 없듯이 숨 막히는 혈전이 벌어진다. 죽지 못해 사는 인남과 죽이기 위해 사는 레이의 폭주가 시작된다.
<신세계> 이후 7년 만에 다시 만난 황정민, 이정재의 투톱 액션과 진중함을 기본으로 하되, 박정민의 감초 역할로 무거운 분위기를 환기한다. 태국과 일본의 이국적인 풍경과 홍경표 촬영 감독이 만들어 낸 빛의 마술이 영화의 비주얼을 덧칠한다. 멈출 수 없는 두 사나이의 농밀한 시간은 <오피스>로 일찍이 칸영화제의 초청을 받은 홍원찬 감독의 각본과 연출로 탄생했다.
마지막 미션 때문에 엮인 악연
8년 전 토사구팽 당한 인남은 이후 해외로 나가 살인청부업자로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최근 한 남자를 죽이라는 미션을 받았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애써 스스로를 다독이며 파나마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고 했다. 하지만 마지막 일은 하는 게 아니었다. 인남은 백정이란 별명을 가진 무자비한 레이에게 쫓기게 된다.
레이는 자기 형의 복수를 향한 레이스를 시작한다. 이유는 없다. 레이가 목표물로 잡았으면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인남의 주변 인물부터 시작해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 온다. 지구 끝까지 쫓아가겠다는 일념으로 일본, 한국, 방콕까지 따라간다.
한편, 인남은 8년 만에 헤어진 연인 영주(최희서)의 다급한 연락을 받는다. 하지만 자신과 접촉하면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 있는 상황. 그녀의 연락을 애써 무시한다. 하지만 주검으로 나타난 영주의 시신을 대면한 것도 모자라 실종 상태의 딸이 있음을 알게 된다. 인남은 자신의 딸일지도 모를 아이를 찾아 방콕으로 떠난다.
지칠 줄 모르는 수컷 사이에서 씬스틸러 등장
영화는 수컷 냄새 물씬 나는 누아르 장르에 빠른 타격감을 붙인 액션으로 포장했다. 심연의 어두음을 담은 정통 누아르라기 보다 하드보드 추격 액션이란 장르로 불리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쫓는 이유조차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악다구니에 받힌 레이의 복수는 두 사람의 악연이 어디서부터 인지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멈출 줄 모르는 끈질긴 질주를 통해 영화 내내 조바심을 유도한다. 이만큼 도망 갔다고 생각하면 저만큼 따라붙었고, 이쯤에서 숨돌리려고 하면 가쁜 숨을 바투 잡아 도시 달릴 수밖에 없다.
내내 브레이크가 고장 난 폭주기관차처럼 바삐 달리다가도 이내 심폐소생술이라 할만한 캐릭터를 등장시켜 숨통이 트인다. 그 주인공은 트랜스젠더 유이 역의 박정민이다. 영화의 진정한 치트키, 숨겨진 보물처럼 단숨에 분위기를 사로잡는 유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러블리함은 기본. 위험에 처할 줄 알면서도 인남을 돕는 조력자의 운명을 택한 이유가 같은 아버지(?)의 책임감 때문인 건 신의 한수다.
처절하고 가여운 인남이 곤경에 처할 때마다 적시에 나타나 요정처럼 묘수를 부리는 유이는 단연코 돋보인다. 박정민의 캐릭터 변신이 어디까지인지 가늠하기 힘들 정도의 존재감이었다. 트랜스젠더의 시선이 비교적 자유로운 태국에서 성 정체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수술 기회를 꿈꾸는 것도 영화가 80% 태국 로케이션인 이유다.
다만 한 가지 흠이라면 킬러 본능을 가진 수컷의 운명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된다는 것이다. 팽팽한 두 남자의 총, 칼 격돌은 누아르 장르의 클리셰를 답습한다. 단순한 줄거리는 영화<아저씨>나 <테이큰>이 떠오른다. 그러나 피비린내와 땀 냄새 가득한 투우장에서 죽음을 면치 못하는 정해진 운명의 사내답게 말보다는 행동으로 단숨에 무마한다. 황정민과 이정재의 캐릭터는 살아 있는 활어처럼 미쳐 날뛴다. 지친 표범 같은 황정민과 달리 차갑고 매끈한 뱀이 떠오르는 이정재의 이미지가 시선을 빼앗는다.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라 할만한 눈에 띄는 액션과 화면을 만들어 낸 홍경표 촬영감독의 인장이 크다. 15세 관람가답게 직접적인 묘사는 줄이고 정황만 보여줌으로써 상상하는 맛이 있다. 만약 청불이었다면 훨씬 이해되는 장면들이 늘어날 것 같아 살짝 아쉽다.
액션 장면에서는 스톱모션 기법과 슬로우 모션의 혼합으로 제한된 공간 안에서 미적 감각을 깨운다. 이는 이건문 무술감독이 있어 가능했던 액션 카타르시스다. 빠름과 느림의 적절한 타격감은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영화의 미장센은 큰 몫을 하고 있다. 홍경표 촬영 감독은 <기생충>, <인랑>, <버닝>, <곡성> 등에서 본인의 촬영 방식을 인정받은 아티스트다. 여기에 <엑시드>, <마녀>, <밀정>의 모그의 음악이 만나 영화 다시없을 영화적 완성도를 선보인다.
인천의 잊을 수 없는 석양과 무심한 방콕의 빛바랜 햇볕, 그리고 쿨하다 못해 차가운 일본의 질서정연함이 이국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주기도문의 한 구절인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악행을 저질러온 한 남자가 처음으로 살고 싶어졌던 마음과 한 줄기 구원의 손길을 바란 부정(父情)이 사뭇 처연하기까지 한 제목이라 할 수 있다.
평점: ★★★★
한 줄 평: 오랜만에 순수 오락 액션으로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