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혜령 Aug 25. 2020

<69세> 나는 치워야 하는 쓰레기가 아닙니다

한 여성이자 노인, 그리고 인간입니다

성폭력은 신고율이 낮은 범죄이자 피해자 없는 범죄로 불린다. 피해자 스스로 신고해야 하는 수치심은 물론 의심부터 하고 보는 지인과 경찰의 태도는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내 말을 믿어주지 않는 두려움은 더 어둠속으로 파고들게 하고, 이내 포기하게 만든다. 주로 물리적, 사회적, 정신적 약자를 대상으로 일어난다. 69세의 가족 없는 노년 여성에게 닥친 일은 어쩌면 예견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오프닝의 암전 효과는 적절했다. 실제 피해자의 상황과 고통을 전시하지 않음으로써 관객이 목소리만 듣고 상황을 유추하도록 했다. 직접 보여주기보다 상황을 상상하도록 유도했다. 마치 내가 직접 겪은 것 같은 생생함이 그대로 전해진다.

영화 <69세> 스틸컷

영화는 69세 성효정(예수정)이 물리 치료를 받다가 29세 간호조무사(김준경)에게 성폭행을 당하면서 시작된다. 고민 끝에 효정은 동거 중인 동인(기주봉)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경찰서에 함께 가줄 것을 부탁한다. 그러나 경찰부터 주변 지인까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효정을 치매 환자로 몰아세운다. 충격받은 피해자가 전하는 세부 진술이 조금만 달라져도 미심쩍어 한다. 억울함을 법 앞에 호소하고 싶지만 법원 역시 나이차와 증거 불충분, 사건의 개연성을 빌미로 구속영장을 기각한다. 이 모든 부당함은 바로 효정의 69세라는 나이 때문이다. 


<69세>는 우리 사회의 만연한 노인을 향한 시각, 언어폭력을 대리 경험할 수 있다. "나이에 비해 몸이 아가씨처럼 좋으시네요.", "나이치고 옷을 참 잘 입으세요.", "누가 뒷모습만 보면 아가씨라고 하겠어요.", "다리가 참 예쁘시네요." 영화에서 이런 말들이 아무렇지 않게 발화되며 최소한의 인권조차 지켜지지 않는다. 효정은 이런 말을 듣고도 감사해야 하는 나이 69세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영화 <69세> 스틸컷

한 여성의 존엄성도 지켜지지 못하는 상황은 차고 넘치도록 계속된다. 효정은 피해자가 사건을 알리고 증명해야 하는 안타까운 현실, 가해자의 나이차를 듣고 비웃는 이들의 편견, 효정이 받은 피해를 인지하지 않는 경찰의 태도. 갖은 폭력의 2차 가해 속에서 '나이'로 인해 받는 고통까지 짊어지게 된다. 소위 상식이니 논리라는 말이 적용되면서 피해자는 짓눌리게 된다. 노인을 향한 예의는 바라지도 않는다. 더구나 효정은 병들고 쇠약해진 육체를 끌어안고 가난과 외로움까지도 극복해야 하는 노인, 여성, 인간이다.


한국 사회에서 나이는 생각보다 중요한 기준이 된다. 나이듦은 더 이상 긍정적인 단어가 아니다. 농경사회에서 필요했던 연륜과 지혜는 현대 사회로 넘어오며 쓸모없음이 된지 오래다. 그래서 나이 들면 밝고 따뜻한 양지보다 자꾸만 어두운 그늘만 찾게 되고 움츠러든다. 이는 효정이 종종 '늙은이','노인네'라고 자신을 낮춰 부르는 말로 함축된다. 노년은 죄가 아닌데 죄가 되어 버리는 현실이 갑갑하다. 영화 내내 효정이 느꼈을법한 불쾌감과 분노, 그리고 슬픔이 차올랐다. 노인을 쓰레기 취급하는 젊은 세대에게 너희들은 늙지 않느냐고 반문하고 싶다. 언젠가 나이 들어 노인이 될 텐데 벌써부터 두렵기 시작했다.


영화는 어두운 톤으로 힘들게 사는 효정을 쫓지만 결코 절망만을 보여주지 않는다. 인생이란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는다. 포기하기엔 아직 이른 나이 '69세'에 비로소 용기 내어 봄볕을 맞는다. 이에 효정은 법이 아닌 자신만의 방법으로 가해자 응징에 나선다. 그 시작이 보잘것없어 보일지라도 가만히 참고 견디는 것보다 한 발짝 나아간 의지를 응원하고 싶다. 우리 주변에 수많은 69세 성효정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용기를, 우리들에게 인식의 변화를 가져야 할 때이다.




평점: ★★★★

한 줄 평: 인생은  싫다고 눈 감아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더라




매거진의 이전글 <워터 릴리스> 셀린 시아마 감독의 눈부신 데뷔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