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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혜령 Aug 28. 2020

<후쿠오카> 이상한 사람들과 기묘한 여행에 빠져든다

<후쿠오카>는 장률 감독의 도시 트릴로지 마지막 작품으로 <경주>,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와 비슷한 결을 갖고 있는 영화다. 전작 <경주>와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에 박해일이 있었다면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 <후쿠오카>에는 박소담이 연결고리다. 


일본의 책방에서 발견한 인형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빨간 기모노를 입은 인형은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에서 주은(박소담)의 애착인형이자 엄마를 떠올리게 하는 상징물이다. 영화에서 흥얼거리던 일본 노래까지 <후쿠오카>에서 다시 한번 재현된다. 또한 <경주>에서 등장한 촛불 장면도 반가운 기시감이 들 것이다. 앞서 두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숨은 보물을 찾는 재미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어딘지 아리송하고 몽롱해서 명확하지 않은 꿈, 현실, 과거를 넘나들며 경계를 허무는 자유로운 스토리텔링이 매혹적이다. 


경계 없는 스토리텔링과 다르게 박소담, 윤제문, 권해효의 꽉 찬 존재감은 생각만큼 강렬하다. 걷고,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뿐인데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기대하게 되는 구석이 있다. 스스럼없이 언젠가 와본 것 같은 장소와 본 것 같은 데자뷰 속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별다른 사건 없이 후쿠오카를 어슬렁거리는 세 사람을 따라간다. 핸드헬드로 찍은 장면들을 통해 춤추듯이 흔들이는 감정과 공간을 묘사했다.


재중동포 출신 장률 감독은 경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영화에 녹여 냈고, 후쿠오카라는 낯선 장소까지 의미를 확장했다. 후쿠오카는 재일동포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자, 작은 항구도시이며, 윤동주 시인이 형무소에서 죽음을 맞이한 곳이기도 하다. 한국 배우들과 재중감독, 일본을 무대로 한 영화의 관계 연결성이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가 된다.


후쿠오카에서 생긴 기묘한 삼일

영화 <후쿠오카> 스틸컷

헌책방 단골손님 소담(박소담)의 엉뚱한 여행 제안으로 제문(윤제문)은 일본 후쿠오카에 도착한다. 일단 짐을 풀고 하릴없이 배회하다, 대학 선배였던 해효(권해효)를 찾아간다. 해효는 후쿠오카 텐진 뒷골목에서 술집 들국화를 운영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후배 제문이 썩 반갑지만은 않다. 술 한 잔하고 가라는 말도 꺼내지 않는다. 분위기는 서먹하다 못해 험악하기까지 하다. 사실 두 사람은 28년 전 이후 끊어졌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사연은 이랬다. 28년 전 동시에 좋아하던 '순이' 때문에 절연한 상태가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순이는 제문과 해효를 동시에 사랑했고, 한 사람만 고르라는 채근에 종적을 감추어버렸다. 순이와 연락이 닿지 않기에 서로를 탓하기만 했고 오해는 커졌다. 첫사랑을 잊지 못해 제문은 순이가 좋아하던 헌책방 주인 살아가고, 해효는 순이의 고향 후쿠오카에서 술집을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순이를 다시 만나고 싶다'라는 한 가닥 희망이 지천명을 넘긴 아저씨의 근간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제문과 해효에게서 이 시대에 남은 마지막 로맨티스트가 겹쳐 보인다. 한 여자를 동시에 사랑했던 기억을 잊지 못하고 있는 것부터, 소담이 이상한 행동을 해도 말만 그럴 뿐 내치지 않는 모습까지. 입으로는 투덜거려도 마음만은 따뜻한 아재들이다. 머리가 희끗하고 배가 어느 정도 나온 50대 아저씨지만,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순정남의 면모가 귀엽게도 보인다. 티격태격 아웅다웅하는 두 사람을 향해 소담은 이런 말을 읊조린다. "둘이 똑같아. 똑같아서 동시에 사랑했고 동시에 떠나간 거예요"라고 말이다.


꿈과 현실, 낯선 상황의 무경계성

영화 <후쿠오카> 스틸컷

<후쿠오카>는 불쑥 후쿠오카에서 얽히게 된 세 사람의 3일을 관찰하는 로드무비다. 마치 연극을 보고 있는 듯한 상황과 시(詩) 적 설정이 카메라 프레임 안에서 벌어진다. 그래서 흐름에 따라 자르는 막과 장의 끊어짐이 종종 생긴다. 갑작스러운 장면 전환과 연결되지 않는 상황은 극에 몰입도를 떨어트리는 브레히트의 소격효과를 연상케한다. 


앞서 언급한 기묘한 여행이란 의미는 전적으로 소담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한국말로 일본인과 중국인과도 소통할 수 있다. 때때로 홀연히 사라지고, 터무니없어 보이는 말이 맞아떨어지기도 한다. 처음에는 '이상한 애'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아저씨들도 점차 소담을 의지하게 된다. 결정적으로 소담은 제문과 해효를 한데 붙여주기도 한다. 다시는 안 볼 것처럼 단단히 걸어 잠근 빗장이 스르르 풀릴 수 있었던 것은 소담의 뜬금없는 말과 행동이 있어 가능했다. 두 사람을 꿰뚫어보는 듯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다.


이렇듯 한 여성과 다수 남성의 조합은 전작 <춘몽>과 오버랩 된다. 예리(한예리)를 좋아하는 세 남자(익준, 정범, 종빈)가 봄의 나른한 꿈같은 찰나를 포착한 영화다. 실명을 그대로 쓰는 것도 닮았다. 그래서일까. 러닝타임 내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세 사람이 오래도록 잔상에 남는다.

영화 <후쿠오카> 스틸컷

영화는 긴장하지 말고 살라는 소담의 대사처럼 85분 동안 몽환적인 분위기에 흠뻑 취하게 만든다. 느슨한 마음을 가져볼 여유 없는 현대인에게 잠시 쉬어도 좋은 시간을 제공한다. 깜빡 졸았다가 잠이 덜 깬 몽롱한 상태 그대로, 어쩌면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의 읽고 난 뒤의 감정과도 엇비슷한, 나른하고 기분 좋은 꿈과 현실의 언저리처럼 느껴진다.





평점: ★★★☆

한 줄 평: 기기묘묘한 삼인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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