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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혜령 Oct 07. 2020

<우리가 이별 뒤에 알게 되는 것들> 섬세한 여성감성

이 영화를 보며 JTBC 드라마 [부부의 세계]가 생각났다고 하면 과한 걸까. 10년 전 이혼한 남편의 아내와 딸을 집에 들이며 분노와 증오가 아닌 갈등을 딛고 연대하는 모습이 닮았다. 여자의 마음은 여자만이 알 수 있다는 말이 떠오른다. 이 불편한 동거를 가능하게 만든 장본인은 바로 전 남편이다. 그는 더 이상 세상에 없지만 절대 엮이지 않을 관계를 만들어 주었다는 점에서 고마워해야 할까 싶을 정도다. 아침 드라마의 소재로 나올 법한 참으로 질기고 기구한 인연이 쿨하게 펼쳐진다.


<우리가 이별 뒤에 알게 되는 것들>은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영화다. 남편과 아빠와 이별한 후 알게 된 진솔한 감정을 다룬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죽음으로 인해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는 출발을 이야기한다. 여성이라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의 희로애락이 오롯이 한 영화에 담겨 있다.


죽음에서 시작된 뜻밖의 인연

영화 <우리가 이별 뒤에 알게 되는 것들> 스틸컷

이혼 후 한적한 외곽으로 이사 온 캐미(해더 그레이엄)는 사춘기 딸 애스터(소피 넬리스)와 오늘도 티격태격하느라 바쁘다. 요즘 최대 고민이라고는 마감이 코앞인 원고 정도로 평탄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 물론 애스터의 반항이 날로 심해지긴 하지만 흔한 십대의 감정 분출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정도다.


그러던 어느 날, 전 남편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을 듣고 내키지 않은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캐미는 순간 심란하다. 10년 전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집에 단란한 새 가정의 흔적을 보려니 복잡한 심경이 말도 못 하게 차오른다. 집을 천천히 둘러보던 중 껄끄러운 관계의 레이첼(조디 발포어)과 마주치게 된다. 이 험악한 분위기를 어떻게 돌파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거나 말거나, 전 남편의 딸 탈룰라(애비게일 프니오브스키)는 티 없이 해맑다. 10년 전 자신의 모습과 오버랩되며 이 모녀를 두고 세상을 떠난 남편이 순간 원망스럽다.


한편, 레이첼은 남편의 사망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쯤 또 다른 불행을 마주한다. 남편이 6개월간 대출을 갚지 않아 결국 집에서 쫓겨나 거리 생활을 해야 할 처지에 놓인다. 문뜩, 며칠 전 언제든지 도움을 주겠다는 캐미의 제안이 떠오른다. 자신을 가정 파탄자, 상간녀라 칭하는 손가락질 보다 당장 어린 딸의 보금자리가 절실했다. 레이첼은 어쩔 수 없이 자존심을 구기고 캐미의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된다. 캐미는 같은 여성이자 딸을 키우는 엄마로서 먼저 손을 내민다. 그렇게 네 여성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다.


네 여성의 갈등과 화해 그리고 연대

영화 <우리가 이별 뒤에 알게 되는 것들> 스틸컷

전 남편의 죽음으로 찾아온 세컨드 부인과 딸. 이들을 받아주라고 누구도 등 떠민 적 없다. 캐미는 연민인지 복수인지 일부러 자리를 내어 준다. 캐미와 레이첼은 뜻밖의 사건들로 상처를 주고받지만, 여성만의 공감과 이해를 나누며 보듬어 준다.


사실 전혀 얽히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이 유대감을 형성하게 되는 아슬아슬한 비밀이 숨어 있었다. 엉킨 실타래를 풀고 이해하게 되는데 많은 시간과 충돌을 겪지만 어쩔 수 없이 정이 들어 버린다. 이들은 그저 상처를 가진 인간들에 불과했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처음에 애스터는 레이첼을 못마땅히 여겼다. 엄마와 아빠를 갈라놓고 아빠를 뺏어간 불륜녀라고 거세게 몰아붙인다. 하지만 친한 친구의 남자친구와 몰래 바람을 피우는 자신을 이해해 줄 사람은 레이첼임을 깨닫는다. 언뜻 앞서 말한 드라마와 함께 영화 <춘희막이>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영화는 흔히 씨받이라 일컫는 예전 어르신들의 세계를 정겹게 다룬 다큐멘터리다. 대를 잇기 위해 첫째 부인이 둘째 부인을 직접 데려와 그녀와 40여 년을 살게 된 얄궂은 인생 이야기다. 오래전 영감은 세상을 떠났지만 본처는 후처를 버리지 않고 살뜰히 챙긴다. 두 할머니는 긴 세월을 나누며 단단한 유대감과 연민을 쌓아왔기에 가능했다. 이들에게 가족이란 혈연이나 제도로 묶인 게 아닌 오로지 시간의 두께로 형성되어 있다.

영화 <우리가 이별 뒤에 알게 되는 것들> 스틸컷

참으로 세상에는 다양한 인연이 많다. 이별 뒤에 알게 되는 것들은 어쩌면 빈자리라는 구멍을 채울 수 있는 작은 가능성을 말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남성이 없이 독립적이고 자립적인 여성상이 잘 구현되어 있다. 같은 상실을 가진 네 여성의 난처한 동거는 삐걱거렸지만 서로의 입장 차이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어간다. 누가 가을을 남자의 계절이라 했던가, 진한 여성 연대를 다룬 영화에서 깊어가는 가을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면 과한 걸까.


평점: ★★★

한 줄 평: 생각지도 못한 수확, 가을과 어울리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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