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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혜령 Oct 10. 2020

<어디갔어, 버나뎃> 다시 시작해볼 용기

태어나면서 부모인 사람이 있을까. 이번 생에 모두 부모는 처음이라 서투르다. 그래서 자녀의 나이만큼 경력을 갖는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아이에게 사랑과 정성을 쏟아붓지만 적당한 거리 두기도 필요하다. 영화 속 버나뎃을 보며 들었던 생각이다. 자녀가 성장해 둥지를 떠나듯이 부모도 졸업할 수 있다면 좋겠다. 홀가분하게 인생 2막을 시작하고 말하고 싶었다. 


<어디갔어, 버나뎃>은 마리아 셈플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졌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과 케이트 블란쳇의 만남으로 일찌감치 주목받았다. 오랫동안 농밀한 내면을 주제로 가족, 연인의 관계를 조명한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 특유의 재능이 유감 없이 발휘되는 각본이다. 그리고 건축계 천재였지만 20년 만에 동네 트러블 메이커로 전락한 버나넷을 연기한 케이트 블란쳇은 육아에 지친 경력단절 엄마, 열정을 잃어버린 현대인, 번아웃과 매너리즘에 빠진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했다. 


천재 건축가의 잃어버린 20년..

영화 <어디갔어, 버나뎃> 스틸컷

버나넷(케이트 블란쳇)은 최연소 맥아더상을 수상한 건축계의 아이콘이었지만 20년 전 돌연 시애틀로 떠났다. 이 동네 최고의 괴짜에다 흔한 친구 하나 없다. 까칠하고 예민해 이웃과의 다툼은 기본, 금방이라도 귀신이 나올 것 같이 여기저기 비가 새는 집이 어지러운 버나넷의 심경을 말해준다. 학부형들과는 아예 단절, 가족 말고는 말도 잘 섞지 않는다. 길거리에서 팬임을 자처하는 건축학도가 살갑게 대해도 어쩔 줄 몰라 쩔쩔 매는 사회부적응자가 되어버렸다. 마이크로소프트에 다니는 남편 엘진(빌리 크루덥)과 친구 같은 딸 비(엠마 넬슨)와 최소한의 인간관계를 유지하며 은둔생활 중이다. 최근에는 온라인 가사도우미 만줄라와 급격히 친해져서인지 집순이 모드로 완벽히 전환했다. 어쩌다 보니 만줄라에게 할 말 안 할 말까지 다 털어놓아버렸다. 


버나뎃의 변화무쌍한 심경 변화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서 당신의 단편을 발견하고 놀랄지도 모르겠다. 편집증, 불면증, 대인기피증 삼 종 세트를 달고 살지만 나름 평온했던 일상에 최근 폭탄 하나가 떨어졌다. 딸아이가 사립 학교 입학 전 남극으로 가족 여행을 가자고 했기 때문이다. 버나뎃은 그날 이후 여행에 대한 부담감인지, 사람 많은 곳의 불편함 때문인지 일정이 가까워지자 급속도로 예민해진다. 그 과정에서 기상천외한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급기야 FBI까지 파견되고 졸지에 정신병원에 입원할 처지에 놓인다. 너무 놀란 나머지 자신의 문제를 인정하지 않고 도망가 버렸다. 과연 버나뎃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버나뎃은 우리 모두의 모습일지도

영화 <어디갔어, 버나뎃> 스틸컷

영화는 엄마로서 사느냐 잃어버렸던 세월에 다가가는 모험이다. 전반부가 버나뎃의 성격과 가족, 주변을 소개하는 데 할애했다면 후반부는 여성이자 건축인이었던 과거를 회상하는 심리 묘사가 주를 이룬다. 어디로 튈지 어떻게 진행될지 예측불허의 순간들이 펼쳐지면서 궁금증을 유발하는 사랑스러운 영화다. 


버나뎃은 지난 20년간 모종의 사건과 가족에 대한 소중함이 강하게 얽혀 자각하지 못한 스트레스를 쌓아갔다. 영혼의 동반자라 생각했던 남편과는 소원해진지 오래, 일중독 남편을 두고 하루하루를 무기력하게 보낸다. 4번의 유산 끝에 얻은 딸아이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존재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던 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밝고 건강한 모습이 대견하기만 하다. 하지만 요즘 통 잠을 못 자 약국에서 수면제를 처방받고 아무데나 널브러져 자기 일쑤다. 동네 사람들과 마찰은 일상, 최근 남편 회사의 새 직원 수린도 무척이나 신경 쓰인다.

 

어딘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 못되었다. 창작 통로가 막혀버린 버나뎃은 불면, 짜증, 무력이 찾아왔다. 본인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찌들어 극약처방이 필요했다. 이 모든 것이 총체적 원인이 되어 스스로를 좀 먹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버나뎃 자신이었다. 심혈을 기울여 만든 건축물이 한낱 폐기물로 전락한 일은 일생일대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슬럼프를 극복할 줄 모르고 창작 스위치를 내려버렸다. 

영화 <어디갔어, 버나뎃> 스틸컷

그렇게 버나뎃은 남극에서 영감을 다시 얻는다. 하고 싶은 일을 할 때의 기쁨을 다시 찾게 된다. 거창하지 않은 일, 남들에게 하찮게 보일지라도 내가 즐거운 일을 할 때 나로서 우뚝 선다. 인간은 누구나 해야 할 일이 있을 때 살아갈 이유가 있다. 영화는 우리 주변에 열정이 식어버린 모든 이에게 고한다. 육아 때문에, 번아웃이 와서,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 접어 둔 일을 다시 시작해 보라고 말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말을 팔색조 매력의 케이트 블란쳇의 열연으로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사랑스러움과 유쾌함, 용기를 주는 부푼 기대까지도 모두 한 영화에 담겨 있다. 세상이 나만 비껴가는 것처럼 지치고 힘들 때, 세상과 달라 고민일 때 버나뎃을 떠올리며 작은 위로를 받길 바란다.


평점: ★★★☆

한 줄 평: 귀엽고 통통 튀며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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