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O2>는 동면 중에 깨어난 한 여성이 잃어버린 기억에서 서서히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렸다. 하지만 가까스로 깨어나 보니 알 수 없는 장막에 둘러싸여 있었고, 단단히 고정된 몸은 구속복처럼 옥죄어왔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 어딘지 분간할 수 없는 공간에 갇힌 게 분명했다. 대체 여기는 어디고 지금 상황은 무엇이란 말인가.
여성은 도와 달라고 소리치며 가까스로 빠져나가 보려 하나 대답해 주는 것은 인공지능 '밀로'뿐이었다. 밀로를 조작해 확인해 본 결과 의료용 극저온 캡슐 오미크론 276에 들어간 상황을 파악한다. 때문에 자신은 병원 치료 상태라고 생각하지만 밀로는 특별한 질병이 없다며 기대수명 80세를 제시한다. 이어 밀로는 산소 보유량이 35%뿐이라며 고갈까지 90여 분이 남은 상태라고 일러준다. 시간이 지날수록 산소는 점점 줄어들고 , 탈출하기 위해서는 기억을 빠르게 되살려야 했다. 과연 나는 누구란 말인가.
기억을 통째로 잃어버린 여성은 DNA와 SNS를 통해 조금씩 신원에 접근해갔다. 이름은 엘리자베스 앙센. 주로 '리즈'라고 불리고 극저온 공학 박사이자 노벨상을 받았던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레오라는 남편과 아이를 가지려고 했지만 실패, 남편은 바이러스에 감염돼 사망했다는 정보를 알아낸다.
섬광처럼 떠오르는 기억 속의 남편과 경력을 연결하던 중 가까스로 외부와 연결된다. 자신을 모로 경감이라 밝힌 남성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했지만 속 시원한 대답은 찾을 수 없었다. 반복되는 말로 시간을 끌고 도와주려는 의도까지 불순해 보였다. 무언인가 숨기고 있는 듯한 찜찜한 기분이 동반되며 리즈는 속수무책으로 죽어갈 수밖에 없었다.
영화는 리즈가 캡슐을 열기까지 꽤 오랜 시간을 할애해 정체성 탐구에 바친다. 바쁘게 사느라 잃어버린 나라는 존재, 방황하는 현대인의 또 다른 모습 같다.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지 못한 채 쳇바퀴 구르듯 산 인생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죽음이 가까워지자 비로소 자세히 들여다보는 철학적 질문이다. 나는 어떤 삶을 살았고, 누구와 관계 맺었는지를 오랜만에 반추하는 시간을 갖는다. 평생 인류를 위해 인생을 바쳤지만, 지금은 미로 속에서 출구를 찾아 떠도는 실험실 쥐가 된 기분이다.
<O2>는 영화 <베리드>, <패신저스>, <더 길티>, 드라마 [웨스트 월드]가 떠오르는 기시감이 크다. 크게는 밀실에 갇힌 한 사람이 움직일 수도 없을 만큼의 좁은 공간에서 사투를 벌이는 설정이 <베리드>를 연상케 한다. 극적으로 연결된 전화로 상황을 유추한다는 점에서 <더 길티>, 동면 중 갑자기 깨어난 상황은 <패신저스>, 깨어난 후 정체성을 확인하는 부분에서 드라마 [웨스트 월드]나 <더 문>와 비슷하다.
새롭지 않은 스토리임에도 저예산을 극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흔적이 역력하다. 잔혹한 고어, 피 튀기는 호러 장르에 일가견 있는 '알렉산드로 아야' 감독이 새로운 시도를 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그는 <엑스텐션>으로 데뷔, <힐즈 아이즈>, 한국 영화 <거울 속으로>의 리메이크판 <미러>, 고전 영화 리메이크 <피라냐 3D>, 최근 악어와 재난을 결합한 <크롤> 등. 화려한 데뷔 이후 할리우드로 건너와서 그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신작 <O2>는 오로지 1인 밀실극으로 설정해 배우 '멜라니 로랑'의 연기력에 승부수를 띄웠다. 정적인 연출과 늘어질 만하면 튀어나오는 점프 스퀘어로 오감으로 체감하는 밀실 공포를 만들었다. 캡슐에 고정된 채 누워만 있는 주인공의 상황과 공기가 희박해져 오는 압박감이 극심한 고통을 유발한다. 발전하는 과학 기술과 더불어 다루어야 할 주제의 범주를 넓혀 심도 있게 접근했다.
또한 오랜만에 자국어로 선보인 영화이기에 할리우드가 아닌 유럽 스타일의 SF 장르를 만나는 이색적인 상황도 연출했다. 최근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자 바쁘다는 핑계로 지나쳐버렸던 '나'를 들여다본 지난날이 오버랩되기도 했다.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답답한 시국과 맞물리는 상황이 몰입을 유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