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예뻐.

RETIRE, 두 번째 삶의 첫 문장

by 두니

빈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막막했다.


TV는 하루 종일 혼자 떠들고 있었다.

내 눈은 핸드폰 화면에 붙어 있었고

귀는 그들이 내는 소리를 붙잡느라 곤두섰다.


TV 리모컨과 휴대폰을 쥔 손까지,

내 모든 감각은 쉴 틈이 없었다.


이건

빈 시간 속에서 벌어지는

나와의 싸움이었다.


소파는

무너져가는 나의 하루를 받아내며

언제 끝날 지 모르는 이 소모전의 무게를

고스란히 버티고 있었다.


나의 하루 24시간은

어디로 향하지도

무엇으로 나뉘지도 않았다.


밥을 먹으면 식사 시간이 되었고

눈이 감기면 취침 시간이 되었다.


시간은 그렇게

방향 없이 흘러갔다.


하지만

내 기억 속의 하루는

늘 그렇게 흐릿하지만은 않았다.


국민학교 3학년 무렵.

담임선생님의 성함.

손을 잡고 등교하던 친구.

교실 뒤쪽에 있던 낡은 내 책상.


그 기억 속의 하루는

늘 가득 차 있었다.


숙제를 하고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방바닥에는

책과 노트, 종이와 연필이

늘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해야 했고,

했고,

해냈다.


나의 60년은

그렇게 숨차게 살아 온 시간이았다.


빨간 날짜를 기다리며

은퇴 후 하고 싶은 일을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그중에

가장 먼저 꼽은 일은

'놀고먹기'였다.


여행하기,

글 쓰기,

멍 때리기,

커피 마시며 음악 듣기,

그림 그리기

그 모든 일들은

그저 시간을 즐기기 위한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보였다.


"난, 놀고먹을 거야."


내 손에서 일을 놓은 지

정확히 열흘째 되던 날이다.


막상 은퇴하고 나니

놀고먹을 시간은 넘쳐흘렀다.


그런데 나는

먹고 노는 방법을 몰랐다.


긴 기다림 끝에

마침내 온전히 내 것이 된 시간 앞에서

나는 그저 손을 놓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손을 어떻게 다시 잡아야 할지

알지 못했다.


막막했다.


시간이 버거웠다.

그 시간을 견디는 나도 버거웠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각성은

늘 밤 시간에 찾아왔다.


온종일 자다 깨다 하다가

다시 잠자리에 드는 시간.

이런 나를 더는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때

문득

이상한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사람들은 하루를 어떻게 보내지?”


질문은

딸아이에게 향했다.


“지나야, 넌 집에서 뭐 해?”


딸아이는

어이없다는 듯

눈만 깜박거렸다.


그리고 여전히

내 빈 시간은

TV와 핸드폰,

소파에 맞닿은 두통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무언가를

시작해야 했다.


나는 알람을 맞췄다.


아침 6시 30분.


예전과 같은 시각이었다.


그리고

아침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비어있는 열 시간을

잘게 쪼갰다.


은퇴 전

나를 붙들고 있던

바로 그 시간의 자리였다.


그 자리에

나를 키우고

나를 확장하기 위한 일들을

하나씩 채워 넣었다.


월, 화, 수, 목, 금.


쉰 개의 시간 마디에

해야 할 일을 넣고

좋아하는 색을 채웠다.


무지개 빛 징검다리가 놓였다.


내가 딛고 걸어 나갈 수 있는 길.


그 위에

나를 다시 세워 넣었다.


RETIRE.


이렇게

나는 두 번째 삶을 시작했다.


타이어를 새로 갈아 끼우고

다시 출발선에 섰다.


지금 이 시간,

예전의 나는

출근 준비로 분주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의 시간은

바쁘지 않다.


천천히 커피를 내리고

느린 아침을 준비했다.


창문을 열고

먼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멀리 북한산이

창 너머

내 시간 속으로

천천히 들어왔다.


밤새 비가 내렸는데

북한산에는

눈이 내린 모양이다.


하얗게 눈 덮인 산.


나도 모르게

맑은 감탄이 흘러나왔다.


"아, 예뻐!"


오늘,

새로운 시작의 첫날에

입에서 나온

첫 번째 한마디였다.


RETIRE 후,

나의 첫 빈 시간은

이렇게 채워졌다.


나의 하루가

나의 남은 시간이


이 한마디처럼

맑은 예쁨으로

가득하길 바란다.


“아, 예뻐.”


그리고

언젠가

내 삶의 마지막 한마디도

이 말이기를 바란다.


“아, 예뻐.”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