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넋두리'라는 이름으로
다이어리 대신
SNS에 글을 남기기 시작한 것은
사진을 함께 붙잡아 둘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친한 친구’에게조차
공개하지 않은 글들이
SNS 속에 차곡차곡 쌓여 갔다.
공개 범위 설정
'나만 보기'.
내가 아닌 나로
읽히는 것이 불편했던
내가 선택한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오늘,
나는 그 기억 속에서
한 줄의 글을 불러냈다.
'무슨 일이 있었지?'
다시 마주한 글.
그러나 그날의 마음은
이미 기억 속에서 사라져 있었다.
어떤 아픔도
어떤 기쁨도
그곳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이미 치유되었거나
그저 사진 한 장의 추억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수많은 사진과
그 곁에 남겨진 글들.
나는 왜
이 많은 것들을
버리지 못했을까.
돌이켜 보면
‘나’라는 이름보다
역할이 먼저였고
감정보다
의무가 앞서던 시간이었다.
그 시간 속에서
나는 조금씩
나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것은
어떤 날의 아을 견디기 위해
나를 흘려보낸 넋두리였고
어떤 날의
찬란하고 따뜻했던 기쁨을
조금 더 오래 붙잡아 두고 싶었던
작은 미소였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오랜 시간
'넋두리'라는 이름으로
나에게 말을 걸며 걸어왔다.
어떤 넋두리는
사건 없이
감정만 뜨겁게 남아 있었다.
그래도 그 안에는
그날 그대로의
내가 있었다.
다섯 남매의 셋째였던 어린 시절,
살아남기 위해
나는 ‘순응’의 기술부터 익혔다.
혼자 놀고
혼자 먹고
혼자 영화를 보고
혼자 여행하기.
나와 이야기하며
나를 토닥이는
혼자 놀기는
'나만 보기'만큼이나
내게 가장 쉬운 일이었다.
일찍 어른이 된 후
나는 수많은 역할 속에서
무거운 시간을 지탱하기 위해
리더십과 계획력을
생존의 무기로 삼았다.
사람들은 말한다.
참 단단하게 잘 살아왔다고.
그러나 나는 안다.
그 단단함이
얼마나 많은 침묵 위에
쌓여 있었는지를.
그 삶이
얼마나 많은 넋두리를
받아냈는지를.
삶과 일을 주도하며
수없이 선택하고
이끌어 온 시간 속에서
내 감정은
자주 뒤로 밀려났고
조용히 눌려 있었다.
그리고 어떤 날의 풍경은
기억조차 하지 못할
깊은 마음속으로
숨어 버렸다.
은퇴 후
비로소 나에게 시간이 주어졌다.
그림을 다시 그리고,
글을 꺼내 읽고 다시 쓰고,
사진을 찾아 버리고 모으며
나였음에도 낯설기만 한
내 안의 감정과
시간의 풍경을
하나씩 마주하기 시작했다.
멈춰 서서
나를 바라볼 수 있는 시간.
숨을 돌려
나를 안아 줄 수 있는 시간.
그 흔적들을
치우고, 모으고, 다시 바라보며
나는 알게 되었다.
그 넋두리 안에
여전히 살아남은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그 모든 역할을 넘어
끝내
‘나’로 살아온 한 사람이.
침묵해야 했던
내 안의 나를
버리지 않기 위해
끝내
나로 살기 위해
나는 오랜 시간
나에게 말을 걸며
여기까지 걸어왔다.
이 넋두리 앞에서
나는 나에게 묻는다.
너는 지금 자유로운가.
너는 지금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오늘도 나는
'넋두리'라는 이름으로
나에게 말을 건다.
포기하지 않기 위해
'나만 보기'를 열고 나와
세상의 두려움과
마주 서기 위해
그래서
지금 이곳은
또 다른
나의 처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