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멈춰서도 괜찮아
2019년 2월 26일, 지난 반년간 바쁘게 돌아가던 시간이 한순간 멈췄다. 수백 번 고민해 온 일이었음에도 막상 그 주체가 되어 보니 그동안의 모든 노력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파혼’. 낙태나 유산을 하게 된다면 이런 기분일까 생각했다. 뱃속에 있던 아이의 심장 박동이 갑자기 멈춰 버린 것처럼,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어떤 생명이 내 안에서 조용히 숨을 거둔 것 같았다. 예정되어 있던 결혼식이 딱 두 달 남은 시점이었다. 바쁜 예비 신랑 대신에 청첩장 디자인과 폐백, 이바지 음식 업체 선정을 마치고, 신혼여행, 혼수, 가전 등을 알아보며 스트레스가 정점에 달해 있던 시기였다.
스트레스의 원인은 같은 행성, 같은 나라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 제목처럼 서로가 너무 다르다는 사실이었다. 숲을 보듯이 큰 그림을 잘 그리는 그와, 나무를 보듯이 작은 디테일들을 채워 나가는 걸 잘했던 나. 하지만 오히려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 줄 수 있는 천생연분이라 여기며 만난 지 얼마 안 되어 양가 부모님께 서로를 소개했고, 그 후로 결혼 준비는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처음 몇 달은 모든 것이 완벽했다. 인생관이나 자녀 교육관, 경제력을 포함한 가정 환경과 분위기, 학력,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이 비슷했고, 각자의 까다로운 ‘기준’에 대체로 부합하는 대상이라고 여겨졌다. 서로에 대해 아직 모르는 것이 많긴 하지만, 결혼을 무를 만큼 결정적인 ‘하자’는 없다고 판단했기에 굳이 남들이 말하는 것처럼 최소 사계절을 겪어보며 결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결혼을 단순히 두 사람의 결합이 아니라 두 가족의 결합이고 팀 플레이라고 친다면 이 사람은 꽤 괜찮은 인생의 파트너라고 생각했다.
단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그전에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느꼈던 강렬한 감정은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찌 보면 이 또한 다행이었다. 사랑이 우리의 눈을 가리고 ‘사랑하니까 그렇다’라는 아름다운 명목으로 나 자신과 상대방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아로새기는 일이 얼마나 비일비재한가? 찰랑찰랑 넘치는 마음은 아닐지라도 하한선(下限線)에는 부합하니 이만하면 된 것 아닌가?
그간의 연애를 장황하게 늘어놓고 싶지는 않다. 이미 끝나버린 마당에 이제 와서 하나하나 떠올려 봐야 마음만 아프고 독자들도 지루할 테니. 결론만 말하자면, 스스로도 하한선이라고 일컬은 사랑의 감정이었다면 거기(결혼)까지 가면 안 되는 거였다. 감정에 휩쓸려서 해서는 안될 결혼을 하는 것도 당연히 문제이지만, 결혼이라는 건 계산기 두드리듯이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판단해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주변에 누군가가 결혼을 생각하고 있다면, 마음속의 빨간 불을 무시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열에 아홉, 아니 백의 구십구가 오케이여도 어떤 하나가 계속 마음에 걸린다면 결국 그 하나로 인해 당신의 결혼, 혹은 앞으로의 삶 전체가 망가질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단 하나의 요소가 결핍되어도 그게 당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라면 절대 타협해서는 안된다. 돌이켜 보면, 나에게는 사랑이 그런 가치를 지닌 요소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결혼에 골인하지 못한 것 같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