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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둥그레 May 02. 2019

04. 이미 벌어진 일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

일단 멈춰서도 괜찮아

* 본 회차는 영화 ‘미성년’에 대한 리뷰 및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파혼 후 처음으로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게 됐다. 제목은 ‘미성년’, 얼핏 들으면 로리타 콤플렉스 영화 같은 제목이지만 사실은 배우 김윤석 아저씨가 처음으로 연출을 맡은 불륜 영화(데뷔작)이다. 점점 나이가 들어서인지, 언제부터인가 불륜이라는 주제를 새롭게 해석한 작품들에 관심이 간다. 그중 인상 깊게 본 작품은 JTBC ‘이번 주 아내가 바람을 핍니다’라는 드라마. 불륜이라는 것 자체가 상대방과 그 가족, 나아가 본인 스스로에게도 용서받기 어려운 잘못이지만, 단순히 손가락질하는 게 아니라 그 전후를 보여주며 화두를 던져주는 드라마였던 걸로 기억한다. 이 영화도 그랬던 것 같다. 너무 차갑지도 않고, 그렇다고 지나치게 따뜻하지도 않은 담담한 시선으로, 불륜이라는 사건이 당사자들과 그 딸들에게 가져온 파장을 보여준다. ‘사고 치는 어른들과 꿋꿋하게 수습해나가려는 아이들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저널리스트 이은선)’이라는 표현으로 영화의 전개를 심플하게 설명할 수 있겠다. 신인 감독 김윤석은 성년인 어른들보다 더 성숙한 미성년 딸들에 더욱 초점을 맞추어 그 모습을 잔잔하게 앵글에 담았고, 별 기대 없이 보았던 이 영화는 아마도 꽤 오래 기억될 것 같다.


 살아가다 보면 어떤 일들은 우리의 마음속에 예상보다도 더 큰 파도를 일으키곤 한다. 그리고 이미 벌어진 일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는 ‘미성년’ 속 인물들처럼 때때로 몹시 다르기 마련이다. 어떤 이는 그 파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누군가는 철저히 회피하기에 급급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이도 저도 못하고 방황한다. 그런데 삶이 흥미로운 이유는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대처방식이 늘 같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에 기인한다. 이는 동시에, 나와 당신이 상대방을 섣불리 재단하면 안 된다는 작은 근거이기도 하다.  


  내가 결혼을 그만두게 되었다는 어마 어마한 사실을 부모님께 전해야 했을 때, 이상하리만큼 나는 아빠의 반응이 무서웠다. 그래서 사건 다음 날 엄마에게 제일 먼저 말한 다음, 저녁에 돌아오실 아빠에게 당신의 딸을 혼내지 말라는 말을 꼭 해달라고 했다. 내가 평소에 생각하던 아빠라는 인물은 속상함과 당혹스러움을 오히려 화로 드러낼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웬걸, 아빠가 갑자기 나를 안아 주시는 게 아닌가. 곰살 맞지 못한 딸이라 먼저 다가간 적도 많지 않아, 아빠와 나 사이에는 항상 어느 정도의 선이 있었고, 어른이 된 이후로 아빠가 나를 먼저 안아준 적은 정말 단언컨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제정신이 아니었던 시기인지라 구체적으로 어떤 말씀을 해주셨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아빠가 그렇게 펑펑 우시는 모습은 살면서 두 번째 봤다. 그 이후로도 지금까지 나한테 호통 한 번 치신 적이 없다. 뜬금없이 독립을 외친 딸에게 무력하게 ‘아빠가 집을 나가고 싶다’ 고 말한 것 정도 밖에는……. 실로 아빠의 재발견이라고 할 만한 사건이었다. 


 되려 무조건 내 편이라고 생각했던 엄마의 대응 방식이 더 나를 힘들게 했다. 아, ‘무조건 내 편’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는데, 내 감정을 배려하기보다는 엄마 본인의 감정에 충실해서 어항 속 물고기와 비슷하리만큼 민감해진 나에게는 독이 되었던 것 같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도 그렇게 느껴져서 일정 수준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예전에 나였더라면 그 과정에서 엄마가 나에게 한 실수들을 그냥 그러려니 하고 꾹 참고 넘겼을 테지만, 이미 ‘효녀 포기 선언’을 한 마당에 조금 더 내가 느끼는 바를 솔직히 표현하기로 했고 그게 엄마는 아직 적응하기 어려우신가 보다. (부모님이 만족할 만한 사람을 만나 결혼하려다가 너무 큰 후회를 했기 때문에 흡사 효녀 포기 선언 비슷한 말을 했었다.) 앞서 말한 영화에서, 불륜을 저지른 엄마(미희)의 미숙한 태도를 보다 못한 딸(윤아)이 “엄마를 더 좋아하게 할 수는 없었어?”라고 하는 대사가 나오는데, 순간 울컥했다. 나도 딱 그 상태인 것 같아서. 우리 엄마가 불륜을 저지른 건 아니지만, 당분간 혼자이고 싶어 집까지 나온 내게 수시로 연락하면서, 딸 본인도 용서하지 못한 전 남자친구를 종교와 신앙을 명분으로 감싸주려 했을 때 정말 학을 뗐다. 지금도 나는 엄마를 아주 많이 사랑하지만, 설령 그게 엄마라고 할지라도 당장은 내 회복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엄마도 나를 많이 사랑한다면, 앞으로의 관계를 위해서라도 내가 엄마의 어떤 말과 행동에 불편함을 느끼는지는 아셔야 하니까.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 조금은 더 이기적이었으면 좋겠고, 조금은 더 본인의 상처를 먼저 보듬어 주었으면 좋겠다.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당신의 슬픔에 접근하는 사람들로 인한 2차, 3차 상처로부터 스스로를 방치하지 않았으면 한다. 느낀 바를 솔직히 표현하는 게 어렵다면 차라리 조금 거리를 두고 혼자 속상한 마음을 달랠 시간을 가지기를 바란다. 그래도 괜찮다. 당장은 그런 모습에 서운해 할 수 있어도, 정신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떨어져 있는 그 시간 동안에 상대방도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을 갖고 결과적으로는 더 건강한 관계가 될 수도 있을 거라고 믿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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