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테면, 못 본 척하지 않기. 이것은 내가 아이를 사랑해 온 방식이다.
“애가 좋아할 옷은 딱 하나지. 용사 옷 어디 없나?”
유치원 할로윈 행사 때 아이에게 어떤 옷을 입힐지 고민이라는 나의 말을 들은 남편이 거 참 쉬운 길 어렵게도 간다는 표정으로 답한다.
어쩜, 이걸 모를 수가 있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뿅망치를 들고 용사를 흉내내느라 바쁜 아이를 매일 보면서도 차마 떠올리지 못했다. ‘할로윈 코스튬’, ‘남아 할로윈 의상’과 같은 단어를 이리저리 변주해 가며 검색하면서도 용사의 옷을 찾아볼 생각을 못하다니!
나라는 사람은 이리도 납작하구나, 하는 마음에 1차 시무룩. 그런데 아이가 좋아하는 캐릭터의 의상은 어디에서도 판매하지 않는다. 용사가 되어 등원하는 아이에게 손 흔들어주기 직전이었는데, 정녕 구할 수 없는 것이었던가 하며 2차 시무룩. 그렇게 검색창을 닫으려는데 돌연 한 줄의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엄마표 DIY 코스튬 제작기>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 옷을 아이에게 입혀주고 싶어 직접 옷을 만든 엄마가 이 세상에 있었던 것이다. 그뿐이랴, 세상에 없는 그 옷을 찾아 헤맬 나 같은 엄마들을 위해 필요한 재료와 구매처를 상세히도 적어 두었다. 앗, 정말 감사한데요,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알려 주시면 제가 도망칠 핑계가 없잖아요. 사진 속 아이가 뿅망치를 머리 위로 치켜든 모습과 화면을 뚫고 나오는 아이의 의기양양한 표정을 한참 바라본다. 그리고 결심한다. 그래, 해 보자.
용사 옷을 입은 아이가 교실 문을 활짝 열고 뛰어 들어가는 모습을 상상한다. 기분이 좋을 때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어오르는 아이의 버릇을 떠올린다.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를 조잘조잘 늘어놓을 아이를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펼친 상상의 나래를 함부로 접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이를테면, 못 본 척하지 않기. 이것은 내가 아이를 사랑해 온 방식이다. 아이와 읽을 책이 도서관에 도착했다는 예약 문자가 온 날, 세차게 내리는 비를 핑계로 집에 머물고 싶지만, 우산과 함께 책이 비에 젖지 않도록 담아 올 가방까지 챙겨 집을 나서는 일.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은 날, 아이가 좋아하는 식재료가 냉장고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것을 한참 노려보다가 결국 냄비에 물을 올리는 순간. 나는 아이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장바구니에는 평생에 담아본 적 없는 물건-이를테면 인조 가죽 원단, 나일론 실, 열 전사 필름과 같은 것들이 담기고야 말았다. 아이가 잠든 밤이면 옷장 속에 숨겨 두었던 가죽을 둘둘 펼쳐 재단을 한다. 가죽에 바느질을 하려면 보통 힘이 필요한 게 아닌지라 바늘 밀어 넣는 요령이 날로 늘어 간다. 바늘에 찔린 자국과 가위날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는 나름의 훈장이라고 해 둘까.
너의 ‘덕질’을 응원하는 힘이 어디에서 오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나의 엄마를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엄마의 손을 붙들고 시내의 한 신발 가게로 걸어 들어갈 것이다. 그곳에는 다섯 살 난 아이와 부모가 있다. 그들 앞에는 미키마우스 얼굴이 큼지막하게 그려진 넓적한 운동화와 별 모양 자수가 새겨져 있어 그 시절 아이 신발답지 않게 세련된 느낌을 풍기는 샌들, 두 켤레가 놓여 있다. 아이의 부모는 세련된 신발을 권하고 싶어하나, 다섯 살의 눈에 귀여운 생쥐 두 마리를 능가할 신발은 그곳에 없다.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던 실랑이를 끝낸 건 아이의 엄마였다. “제 맘에 든다는 것 고르게 해 주자.”
스스로 고른 신발을 품에 안게 되어 기뻐하던 아이는 어느덧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막상 부모가 되어 보니 내 아이의 취향과 선택에 당황하게 될 때가 많다고, 그리고 부끄러움은 늘 내 몫이라고 말하는 딸의 고백에 신발 가게에서 아이의 손을 들어주던 엄마는 말한다. “목숨을 좌우하는 일 아니면 존중해 줘. 얼마나 기특해, 스스로 선택하고 공들이고 마음 쏟는 그 모습이.”
뿅망치와 태극봉을 들고 온 집안을 뛰어다니며 악당을 물리치는 너의 나날은 유한할 것이다. 무기를 손에 쥐고 괴팍하게 뛰어다니며 노는 건 어딘가 어린애들의 놀이 같아 보이는 날도 오래지 않아 올 테다. 상상 속의 악당보다 당장 눈앞에 놓인 숙제가 더 두려운 날이 생각보다 빨리 올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용사가 되어 온 집안을 누비는 오늘의 너를 사랑하고 응원할 수밖에. 그런 너를 생각하며 얼얼해진 손끝을 비비며 가죽을 꿰매고, 행여라도 그 흔적을 들킬까 싶어 바닥에 떨어진 실밥과 조각난 가죽을 쓸어 담아 쓰레기통 깊숙한 곳에 숨기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자러 가는 밤.
이 밤에 더 달콤한 꿈을 꿀 사람은 아이일까, 나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