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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원길에 만났습니다, 스무 살의 나

라디오 교통정보에서 시작된 추억 여행

by 둥리지
도심 쪽도 차가 많이 늘고 있습니다.
대학가 주변도 3월부터는 차가 많아지는데요.
이대 후문까지 정체고요, 혜화동 일대부터…

도로 상황을 실시간 중계하는 리포터의 명랑한 목소리가 차 안에 울려 퍼진다.


잊고 있었다. 3월 4일 화요일, 내복 입고 거실에서 뒹굴던 어린이들이 유치원으로, 학교로 돌아가는 날이라고 생각했다. 친한 언니의 첫째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날인 줄로만 알았다.


나의 상상력은 딱 그만큼이었다. 오늘은 대학생들이 처음으로 캠퍼스에 발을 딛는 날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아이들을 태우고 달리는 새 학기 첫 등원길, 차 안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덕분에. 노란불 앞에서 속도를 줄이며 내 납작한 상상력에 살을 붙여 본다.



몇 달 전만 해도 떨리는 손으로 수능 답안지에 마킹을 하던 친구들은 이제 25학번 새내기가 되었겠다. 문패를 일일이 확인하지 않고도 전공수업 강의실을 찾아 들어가는 경력직 선배님과는 달라도 한참 다른 티가 나겠지.

지하철역에서 학교까지 걸어가는 동안 몇 번이고 지도를 들여다보느라 멈칫거리는 걸음.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도, 자리 배치표도 존재하지 않는 세상 속에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선배들을 바라보는 경탄의 눈빛. 복도 게시판에 붙어 있는 대자보를 들여다보면서, 다음 수업을 듣기 위해 길 건너편에 있는 강의실로 뛰어다니면서 느끼는 한 가닥의 설렘.




올해로 꼭 15년 전이다. 지하철역 출구에서부터 학교 입구까지 쭉 늘어선 카페를 세어보며 캠퍼스로 향하던 나의 발걸음. 기출문제집이 아닌 전공책을 처음 손에 들었을 때 느껴지던 짜릿함. 중앙도서관 햇살 잘 들어오는 자리에 앉아 과제하던 나날. 수업이 일찍 끝나는 날, 파란 버스에 몸을 싣고 아르바이트를 하러 이태원으로 향하던 여름날.


낮보다 밤이 아름다운 날도 많았다. 열람실에서 밤을 새우며 동기들과 준비하던 첫 중간고사. 수업이 끝나자마자 사물함에 전공책 던져 넣고 동기들과 호들갑 떨며 미팅 가던 저녁. 오후 다섯 시부터 시작하는 전공수업이 끝나고 건물을 빠져나오면 눈에 들어오던 봄날의 밤. 가로등 아래 흐드러진 벚꽃과 삼삼오오 사진을 찍던 학우들, 달큼한 밤공기, 캠퍼스 뒤로 보이던 남산타워의 불빛. 어떤 날은 맥주를, 어떤 날은 꿀동동주를 마시며 제각각의 고민을 풀어놓던 한여름날의 밤까지.


하지만 모든 낮과 밤이 아름다웠던 것은 아니다. 이 학교가 내 학교라는 걸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조금 필요한 신입생이, 캠퍼스에는 생각보다 많다. 나 역시 그중 한 명이었다. 매 순간 최선을 다했지만 확신이 없어 늘 불안했던 학기의 연속. 중앙도서관과 지하 열람실, 학교 앞 하숙집을 오가며 일 년을 꼬박 준비한 시험, 그리고 불합격. 같은 시험에 합격한 학우들의 이름이 크게 걸린 현수막 앞에서 졸업사진을 찍어야 했던 2월의 어느 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은 빛나고 찬란한 시절로 기억된다. 찬란했던 그때를 떠올리면 종종 가슴이 저릿하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지금의 내 처지 때문이 아니다. 이렇게 살려고 그렇게 애썼나 하는 마음은 더더욱 아니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오늘을 나는 사랑한다.


그런데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오늘의 내 하루가 아름다울수록 그때의 찬란함이 더욱 강렬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시간의 비가역성에서 비롯된 효과일까. 아직 명쾌한 답을 찾지 못한 이 문제 앞에서 나는 몇 번을 더 멈칫거리게 될까.




어쩌면 돌아갈 수 없어 더 빛나는 시간일지도 모르는 그때. 그 시간 속에 뛰어들기로 작정한 청춘들로 대학가가 북적거린다는 교통정보에 잠시 가슴을 떨었던 오늘은 새 학기 첫날.


추억과 그리움을 끌어안은 채로 나는 오늘 하루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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