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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두옥 May 06. 2019

신은 인간을 심판하지 않는다. 단지 사랑할 뿐

<예수와 함께 한 저녁식사> 1,2 요약


이 글은 <예수님과 함께 한 저녁식사 1,2> 두 권을 읽는 동안, 내가 이해한 것을 정리한 글이다.


나는 신실한 가톨릭 신자인 아버지 덕분에 어릴 적부터 성당을 다녔고, 대학에서는 '아녜스(Agnes)'라는 세례명도 받았다. 고등학교 친구 중에는 신부가 된 친구도 있다. 그러나 나는 독실한 신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일년에 몇 번씩 성당을 갔지만, 그건 파리 관광객이 노트르담 성당을 둘러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대학교 동창 때문이었다. 유럽에서 공부하는 친구의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이 책이 언급되었다. 자세한 소개도 아니고 이 책의 제목이 짧게 언급되었을 뿐이었는데, 포스팅의 맥락 때문이었을까 나는 이 책의 내용이 무척 궁금했다. 핸드폰을 켜서 바로 이북을 구입했고 하루만에 읽어버렸다.


그 내용을 굳이 이렇게 정리한 이유는 간단하다. 삶에서 힘듦이 찾아왔을 때, 이 정리를 읽으면서 빨리 회복하길 원해서다. 나는 지난 수십년 간 신에 대한 이야기와 뜻을 오해했다. 이 책은 나의 잘못된 이해를 단박에 바로잡아 주었고, 그래서 진정으로 힘든 시기에 위안이 되었다. 앞으로 삶에서 비슷한 시간이 찾아올 때 나는 이 요약을 읽을 것이고, 그 다음엔 다시 이 책을 읽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진심으로 기도를 드릴 것이다. 이 요약은 그 때를 위해서 남겼다. 


<예수와 함께 한 저녁식사 1,2>의 영어 원서



예수님의 존재, 그리고 기적들은 사실인가?


책에서는 그렇다고 말한다. 이미 역사적으로 필요한 증거는 모두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믿을 것이냐 부정할 것이냐를 결정하는 마음이란다.


책에 의하면 천지창조는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증거다. 우주의 정교함과 복잡합은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곳서는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주가 자연적인 우연에 의해서 지금처럼 정교하게 만들어졌을 확률은, 블랙홀 이론을 정립한 과학자인 로저펜로즈(Roger Penrose)에 의하면 1천억의 123배 분의 1이란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수치다.



그런 신이 인간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어떤 종교인들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바라는 게 선을 행하고 자신을 '받드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책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목적은, 인간과 관계를 맺고 세상의 행복과 사랑을 만끽하도록 돕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을 자신의 몸 안에 모시고, 그 몸을 빌어 하나님이 세상에 살도록만 하면 하나님의 인간을 위해 준비한 많은 행복(열매)를 맛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책은 이 행위를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 책에 의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이유는 그것  뿐이다. 자신을 받들고 선을 행하게 하기 위해 창조한 게 아니다. 하긴, 하나님이 고작 그런 이유로 인간를 만들었다면  너무 신스럽지 않긴 하다.



그럼 신은 인간을 심판하지 않는다는 건가?


그렇다. 신은 인간을 심판하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란, 테레사 수녀든 히틀러든 완전함과는 아주 거리가 먼 비슷비슷한 수준에 있을 뿐이다. 우리 인간으로서는 아무리 잘 해도 저 아래고 아무리 못해도 저 아래란 의미다.


그렇기에 애초부터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해서 천국과 지옥으로 나눌 생각이 없다. 갓난아기가 태어남과 동시에 부모에게 조건없는 사랑을 받는 것처럼, 인간은 태어남과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조건없는 사랑을 받는다. 중요한 건 그걸 온전히 믿고, 하나님이 만든 세상 속에서 그 흐름을 믿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의지만 선을 행한다는 건 자신의 선함을 믿는다는 의미다. 그것은 인간의 오만한 시각이다. ‘나’의 시각을 넘어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선이란 하나님을 통해서 발현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을 믿어야 한다.



그럼, 인간이 신을 섬기지 않아도 된다는 뜻인가?


그렇다. 하나님은 워낙 가진게 많고 아는 게 넘치는 분이다. 인간이 힘을 보태지 않아도 온 우주를 한치 오차도 없이 움직일 줄 안다. 그런 존재를 섬기고 뭔가를 해 준다는 생각은 겸손이라기 보다는 건방에 가깝다. 정말로 인간의 도움이 하나님에게 필요할까?


하나님을 자신을 노예처럼 섬길 존재가 필요해서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다. 섬김은 신과 인간이 한 가족이 되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행동에 불과하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강조하지만 인간은 사랑받기 위해 창조되었다.



그럼 왜 '율법'이라는 것을 지키라고 하는가?


인간을 훈련시키기 위해서다. 인간이 얼마나 큰 죄를 항상 저지르는 지 알려주고, 이를 구제해 줄 존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이 말인 즉슨, 하나님을 영적으로 받아들이면 그런 계율들은 필요가 없어진다는 의미다. 그때부터는 율범에 따라 살려고 발버둥칠수록 - 이런 저런 규정들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쓸 수록 풍성한 삶을 살기 어려워질 따름이다. 심지어는 영적인 사망상태에 이를 수도 있다.  



선한 일을 하고, 성당(교회)를 잘 다녀야 신이 좋아하지 않을까?


그건 오만한 인간의 생각이다. 하나임의 사랑은 '행위'가 아니라 '존재' 자체에 토대를 두기 때문에, 인간이 무엇을 하든 하나님은 사랑해 주신다. 그럼에도 사랑받기 위해서 이런저런 노력을 하는 건, 책의 표현을 빌리면 ‘하나님이 대가 없이 주는 것을 무진장 애를 써서 얻으려고 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자격 따져서 사랑을 주지 않는다. 인간이 얼마나 선하게 사는지를 따지고서야 은총을 베풀지 안 베풀지 결정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의미다.


하나님의 은혜는 자신의 사랑과 목적을 근거로 베풀어진다. 인간이 선한 일을 하든 안 하든, 종교생활을 잘 하든 안 하든, 하나님은 인간을 존재 자체로 사랑하며 어떤 사람이든 행복을 느끼길 바란다. 다만 그 행복을 느끼려면 인간을 창조란 창조주와 정신적으로 통해야만 한다. 즉 하나님과 내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에게 온전히 의지해야 가능하다. 그것은 선악을 행하는 것이나 종교생활을 하는 것과는 별개의 이슈다.


인큐베이터에서 28개월만에 태어난 1kg 이 갓 넘는 아기를 생각해 보자. 아기가 아빠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엄마 젖을 빨 줄도 모른다. 쌕쌕 자고 똥오줌이나 싸는 게 고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기는 부모에게 더할나위 없이 깊은 사랑을 받는다. 부모는 아기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른다. 아기는 무조건적인 사랑의 수혜자인 셈이다. 그래서 특별히 뭘 할 필요가 없다. 인간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그렇다. 인간이 죄를 짓고 하나님을 밀쳐내지만 그것은 눈곱만큼도 하나님의 사랑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인간이 무슨 짓을 해도 그 뜨거운 사랑을 식힐 수가 없다. 아울러 무슨 공부를 해도 그 사랑이 더 깊어지지는 않는다. 잊지 말길. 성부/성자/성령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존재'에 토대가 있다.



그렇다면 왜 신은 인간이 고통을 느끼도록 내버려두나.


인간이 느끼는 고통은 훈련이지 처벌이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행하는 일은 예외없이 처벌이 아니라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고통이라고 하더라도 결국은 인간을 더 사랑하려고 하는 과정이다.


또 하나, 인간은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필요를 절감한다. 상처투성이의 세상에서 인간은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필요를 느끼고,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받아들이게 된다. 하나님의 자신의 전지전능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자유의지'를 통해서 하나님을 받아들이게 하는 이유는......  



'영생'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영원히 산다는 의미인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영생이란, 인간의 영혼과 하나님의 영혼이 연합하게 된다는 의미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인간 안에 살려고 하실 때, 그것을 인간이 받아들이면 그 순간 '영생'이 시작된다는 의미다. 인간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렇게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 뿐이다. 하나님의 영과 인간의 영이 하나가 되면 그때부터 '영생'이 시작된다.


그 연결은 매우 단단해서 죄를 짓는다고 끊어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잠깐 하나가 됐다가 금방 분리가 되는 식의 관계도 물론 아니다. 영혼이 연합하게 되는 그 순간부터 인간의 죄는 완전히 씻겨져 나가고, 그게 시작이자 끝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가 말끔히 씻겨져 나가고, 그러므로서 영원한 생명이 시작된다.



신을 받아들이게 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를 간절히 원하게 된다. 놀라운 사실은, 인간이 순종하려고 하는 하나님이 바로 그 인간의 중심에 선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 자신의 명령을 약속으로 바꿀 뿐 아니라,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경이롭게 그 약속을 지켜주신다. 인간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려는 욕심만 없다면 하나님은 늘 인간의 옆에 계신다.



’신은 곧 사랑’이라는 건 어떤 의미인가?


신을 받아들이면 사랑받고 사랑하지 읺을 수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바다와 같다. "바다에 갔더니 물이 많더냐?” 라는 질문이 우스운 이유는 바다가 물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이 사랑이 많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다.


또, 우리가 바다에 뛰어들면 물에 흠뻑 젖을 수 밖에 없듯이 하나님을 받아들이게 되면 사랑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맘에 드는 일을 했을 때만 사랑을 한 바가지씩 퍼주는 게 아니다. 하나님 자체가 사랑이기 때문에 무얼 어쩌지 않아도 저절로 사랑이 넘친다. 인간은 그런 사랑을 받도록 만들어졌고, 그것을 타인과 나누도록 만들어졌다. 이 사실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나에게도 신앙에 기쁘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뭔가 피곤하다. 나만 그런가?


중심을 잃은 전형적인 종교인의 모습이다. 기초에 실금이 가기 시작하면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기 위해 시작했던 일이 차츰 종교규범이 되어간다. 처음에는 하나님과 만나는 게 즐거워서 아침 일찍 일어나 성경을 펴고, 하나님의 음성이 듣고 싶어서 말씀을 읽고, 그 분의 가르침이 필요해서 기도를 하고, 그 짜릿함을 혼자 누리는 게 아까워서 전도를 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동기가 변질된다. 그래야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않을 것 같아서, 안 그러면 서운해 하실 것 같아서 눈치를 봐가며 마지못해 움직이는

것이가. 마치 오래된 연인처럼 하나님과의 데이트가 부담스럽고 피곤해진다.



신앙적인 삶을 살고 있는데도 허무하고 힘든 이유는 무엇인가?


출발점이 인간인 나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다. ‘내가’ 마음가짐을 이렇게 바로잡아야겠어, 경건해지려면 ‘내가’ 이런 일을 해야해.. 라는 생각들이 문제라는 것이다. 거룩한 삶의 출발점은 인간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많은 종교인들은 하나님을 빨리 해치워야 하는 과제처럼 대한다. 이것도 해야하고, 저것도 해야하고, 성당(교회)에서 하는 이 프로그램에도 들어가야 한다고.


하지만 그렇게 인간 스스로 열쇠가 되려는 식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 그분의 삶을 살기 위해 인류를 지었다. 그런 창조주가 갑자기 입장을 바꿔서 제각기 제 힘으로 제 삶을 살라고 요구하실 리가 없다. 그런데도 많은 종교인들은 어떻게든 그렇게 살아보려고 발버둥을 친다. 그렇게 인간이 스스로 뭔가를 이루려고 작정하는 순간 율법에 매이게 된다. '이렇게 해야 해! 남편을 사랑하라! 자녀를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도대체 어떤 인간이 그렇게 살 수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짐을 인간이 스스로 짊어진다면 지체없이 율법 아래로 들어가게 된다. 인간의 수준에서 스스로 애쓰고 노력하다가 실패에 이르는 악순환을 되풀이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삶을 살도록 인간을 짓지 않았다. 그렇게 스스로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는 대신 하나님이 살아주시도록 맡겨야 한다.



힘든 일을 만났을 때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흔들리기도 하고 마음이 시시각각 널을 뛰기도 한다. 그때마다 힘든 일은 하나님의 큰 계획의 일부이고, 그 안에는 하느님이 함께라는 사실을 떠올려라.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는 한 그 어떤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니까.



어떻게 해야 신과 협력하면서 살 수 있을까?


백퍼센트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 된다. 그리고 신뢰해야 한다. 언제든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자신이 쓰일 준비를 갖추면 된다. 자신을 포기하고 완전히 하나님에게 맡길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스스로에게서 헤어나와 하나님이 이끄는 대로 '사랑'의 손발이 되어야 한다.


인간은 겉보기에는 자신이 사는 것 같다, 하지만 실제로 그 삶을 사는 건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인간 삶의 근원이란 뜻이다.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삶을 살았지만, 밖에서는 예수가 사는 듯 보였던 것과 같다. 예수가 인간 세상에서 지내는 동안 행했던 모든 일들은 무엇하나 예수가 마음대로 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살았을 따름이다.


인간의 생각으로 스스로 살려고 하기 보다는 "예수님이 하실 거야!"라는 생각으로 살면 된다.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 모든 상황에 개입해서 모두에게 가장 유익이 되는 일들만 골라 행한다. 그러니 인간으로서는 그 때마다 서서 묻기만 하면 된다 '여기서는 뭘 하실 작정이세요?' 그렇게만 하면, 예수님이 인간을 통해 살 수 있는 준비가 된 셈이다. 그때부터는 하나님의 그분만의 방식으로 - 때로는 기막힐 만큼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인간에게 사랑을 베푼다.


믿음의 눈을 가지면 세상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도구로 보이게 된다. 주변에서 벌어지는 상황 하나하나에서 갖가지 형태로 찾아온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결국 삶의 모든 것 가운데서 하나님을 보는 셈이다.




<핵심만 말할께>는 전문을 읽는데 15분 이상 소요되는 책/강연/스토리 등의 핵심을 3분 이내에 이해할 수 있도록 필자가 쉽게 요약해 놓은 브런치 매거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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