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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두옥 Sep 03. 2019

올해, 불혹(不惑)이 되었다

40세에 흔들리지 말아야 할 가장 큰 유혹은 '내 관점'이다


올해 나는 '불혹(不惑)'이 됐다. 나이로 내세울 수 있는 게 급속하게 줄어든 시대. 꼰대처럼 나이 한탄을 하려는 건 아니다. 불혹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기록하고 싶어서다. 


학창시절 '불혹'이라고 하면, 나는 멋진 남자, 넘치는 돈, 허무한 유명세, 지적 허영 같은 걸 떠올렸다. 40살이 된다는 건 그런 것에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생기는 나이라고 생각했다. 마흔이 되어보니 그 말이 틀리진 않더라. 다만 가장 큰 유혹 하나가 빠졌을 뿐. 



그것은 '자아'다


정확하게 말하면 내 시선, 내 입장, 내 관점이다. 수십 억 명의 관점 중에 하나에 불과한 내 시선, 그것도 인간이라는 수백만 생물 종(種) 중 하나에 불과한 '내 시선'에서 보는 세상은 그 자체가 왜곡일 수 밖에 없다. 굳이 수학적인 확률을 들먹이지 않아도, 한 개인이 판단하는 삶은 불완전하고 편협하다. 


출처 : https://mackelevationforum.com/are-you-guilty-of-self-deception/


그런 삶은 언제나 고통이다. '내 시선'으로 봤을 때 세상이 옳은 방향으로 움직일 확률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내 시선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데 방해가 된다. 왕에게 아첨하는 신하처럼 너무 익숙하고 가까운 것이라 알아채기 더 어렵다. 


정의는 지금 세상에 일어나는 일 그 자체지, 내 관점에서 생각하는 '옳은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세상에는 수십 억 개의 정의가 존재할텐데, 이는 정의(正義)의 정의(定義)에 맞지 않다. 개인의 독특한 관점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내 관점이 존재하는 것과 내 관점이 옳다고 믿는 것은 별개의 문제일 뿐.



내게 나쁜 일, 누군가에게 고마운 일


이 원론적인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다시 들여다보자. 나는 오늘 사랑하는 사람과 말다툼을 했다. 그 시간은 고통스러웠고 그래서 내게 말다툼은 '나쁜 일'이었다. 잠시 후, 나는 기분을 삭히며 말다툼의 본질과 진행과정을 리뷰했다. 그리고 중요한 인사이트를 몇 가지 얻었다. 그 통찰에 스스로 감탄하고 있을 즈음, 네덜란드 베프가 메신저로 안부를 물었다.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사냐 묻기에 방금 깨달은 통찰을 나눴다. 그리고 그걸 들은 친구가 말했다. 


"아그네스, 오늘 이 이야기를 내게 전하려고 누군가가 너를 보낸 것 같다. 사실 며칠간 OO문제로 힘들었는데, 네 통찰을 들으니 희망이 보여. 고마워"

그 말을 듣는데 소름이 돋았다. 내 관점에서 '나쁜 일'이었던 말다툼이 다른 대륙에 있는 친구에게는 희망을 주는 '고마운 일'이 된다는 걸 깨달은 순간, 나는 진실로 겸손해졌다. 내 관점에서 보이는 세상이 전체의 지극히 작은 부분이라는 걸 깨달아서다. 내 관점에서 보이는 요소로만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게 얼마나 바보같은 현실 왜곡인지를 깨달았다. 



'자아'를 지킬수록 나는 불행했다 


나는 학교에서 '자아'가 중요하다고 배웠다. 그런데 잘못 적용해서 그런지 모르지만, 나는 자아를 지킬수록 불행했다. 경쟁에서 승리하고, 남과 비교해서 자랑스럽고, 남에게 뭔가를 가르칠수록 이상하게 난 허무하고 허탈했다. 그것이 왜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지 의심스러울 만큼, 그때의 감정은 행복과는 분명 반대였다. 


오히려 행복은 내가 '자아'를 내려놓고 그 너머의 큰 우주가 있음을 믿을 때 느껴졌다. 내 트로피를 패자와 나누고, 내 부끄러움을 솔직히 드러내고, 상대의 생각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내가 먼저 사과할 때. 도덕책에나 나올 것 같은 그런 행동을 내가 할 때 이상하게 오히려 행복했다. 어쩌면 그게 바로 세상의 수많은 신들이 말하는 '사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불혹(不惑)을 넘어 지천명(知天命)으로


불혹을 영어로 찾아보면 '기만당하지 않고 속지 않는 나이(not being deceived)'다. 우리를 기만하고 속이는 것들 중 가장 큰 것은 멀리 있지 않다. 그건 '내 관점'이다. 


40세가 불혹(不惑)이라면, 50은 지천명(知天命)이다. 지천명이란, 하늘의 뜻을 이해한다는 뜻인데, 쉽게 말해 자신의 소명(calling)을 아는 나이란 뜻이다. 50세로 향하는 40대의 중요한 과제가 어쩌면 이걸지도 모른다. 40세에 이르러 세상을 왜곡하는 '혹(惑)'에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면, 이제는 유혹없이 바라보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서 내가 태어난 이유(소명)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렇게 십년을 연습하면 비로소 지천명이라 불리는 50세가 될 것이다. 내 말이 아니라, 지혜로운 선인들의 깨달음이다. 



'자아'를 지키려는 관성 


아직 나는 '자아'를 지키려는 관성 안에 있다. 40년을 그렇게 살았고, 심지어 그렇게 사는 맞다고 생각했다. 진정한 '자기답게'는 나를 내려놓고 자연스럽게 의식하지 않고 살아야 가능한데, 나는 반대로 자기답게 사는데 집착했다. 그러는 동안 진짜 나는 사라졌고, 나라고 믿었던 포장지만 남았다. 그 포장지를 '나'로 기만한 건 다름아닌 나였다. 


인생의 거의 전부를 이런 식으로 살아서 새삼 사라진 나를 찾는 게 쉽지 않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아'에서 벗어나 세상을 보는 걸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문득문득 '자아를 버리면 무너지는 거 아니야?'하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무의식적으로 인간의 차원을 넘어선 우주를 불신하고, 자아를 과대평가하고 있다. 한마디로 내 자신을 자만한다. 


하지만 이제 나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불혹(不惑)'이 되었다. '자아'를 내려놓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와는 별개로, 내 육체와 정신은 이미 충분히 그게 가능한 나이가 되었다는 의미다. 그래서 노력하기로 한다. 매일 채찍을 휘두르는 인위적인 노력이 아니라, 깨달은 것을 나누고, 되뇌이고, 받아들이는 방식의 고요한 노력을 하기로 한다. 



이렇게 긴 글을 남기는, 단 하나의 이유


나처럼 '불혹'의 미션을 완수하고픈 사람들이 있다면, '지천명'으로 가기 위한 과제들을 천천히 해나가고픈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진심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리고 그들이, 수많은 제약과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그 길을 걷기로 결심하는 지금의 나를 통해서 희망을 갖길 바란다. 


그 한가지로도, 이 긴 글의 목적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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