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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두옥 Apr 08. 2018

단순한 삶을 위한 4가지 액션플랜

삶의 진북(真北)을 찾아서

최근 나는 참을성이 급격하게 줄고 피로는 늘어났다. 이전 같으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일에도 짜증내는 일이 많아졌고, 특히 일에 집중하고 있을 때 묻지 않은 정보를 보태는 사람들에게 정신적인 피로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원인이 뭘까?' 짜증과 피로 때문에 삶의 의욕을 잃기 시작할 즈음부터 긴 고민이 시작됐다. 그런데 오늘,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한 노천카페에서 혼자 보낸 일요일 아침에 그 힌트를 찾았다. 


그것은 삶의 단순화. 


나는 지난 몇년 간 너무 많은 것들을 내 삶에 허락했다. 내 욕심이, 과도한 책임감이, 때로는 이별에 대한 두려움이 내 삶을 제대로 복잡하게 만든 것이다. 복잡해진 삶 속에서 나는 집중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고, 효율성은 낮아졌다. 분주해 보이지만 제대로 한 것이 없는 날이 늘었고, 그런 생각은 내 자신을 더 불안하게 만드는 악순환이 시작됐다. 복잡해진 삶의 거미줄 속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나는 점점 숨쉬기 힘들어질 것이다. 


복잡한 삶의 악순환을 끊어내고 단순하게 살자

중요한 결심은 순간에 이루어진다. 

2018년 4월, 로테르담의 한 노천카페에서 나는 결심했다. 그리고 네 가지 액션플랜을 세웠다.




1. 삶의 장기플랜을 세우고, 그 중심에 '나'를 둔다.



어쩜 이렇게 전형적이고 당연한 말을 제목으로 쓸 수 있을까. 하지만 이 한 문장은 단순한 삶을 사는데 중요한 핵심을 그대로 담고 있다. 내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방향, 극 나의 '진북'이 어디인지, 그 과정에서 어떤 이벤트를 원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무엇을 할 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 나에겐 지금 이것이 필요하다. 물론 나는 언제나 삶의 계획이 있었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두 가지 오류가 있었다.


첫째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한다고 믿었던 것 - 더 정확하게는 사회가 나에게 기대하는 것이 투영된 계획이었다. 한마디로 나의 계획은 오염되어 있었다. 


둘째는, 그 중심에 '내'가 아니라 나의 '환경'이 있었다. 예를 들어, 내 오랜 계획 중 하나는 10년 안에 한국과 프랑스의 가족이 함께 살 수 있는 큰 집을 갖는 것인데, 여기에서 10년이라는 숫자는 '그 정도가 지나야 큰 집을 지을 충분한 돈이 생길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왔다. 나의 바램을 삶의 중심에 두지 않고, 실현가능성을 중심에 둠으로써 삶의 주도권을 내가 콘트롤 할 수 없는 환경에 넘겼다. 


이 두 가지 오류로 인해 내 계획은 나의 진정한 욕망이 소외된 껍데기가 되었다. 알맹이가 들어있지 않음을 본능적으로 인지하고 있었기에 집중력이 떨어졌다. 거기다가 '현실적'이라는 단어를 방패삼아 무의식적으로 내 자신을 수동적으로 만들었다. 


어쩌면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라도 이 오류를 수정하려 한다. 먼저,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끈질기게 물어보고, 필요하다면 인생 선배나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내 '알맹이'를 찾고자 한다. 동시에 그 바램 안에 환경의 개입을 허락하지 않겠다. 목표를 이루는 과정에서 현실상황은 반영돼야 할 요소임은 자명하지만, 항상 변하는 것이 환경이기에 아이러니하게도 환경에 의존해서 내 삶을 계획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생각이 든다. 나침판의 붉은 바늘은, 어떤 환경에서든 진북을 가리켜야 하므로.  



2. 인간 관계를 '정리'한다. 


'정리'라는 말이 불러올 오해를 예상하면서도 굳이 이렇게 과격한 단어를 쓴 이유가 있다. '사람'은 내가 가장 애착을 느끼는 대상이고, 그래서 사람 때문에 무모한 짓을 하기도, 엄청난 일을 포기하기도 하는 것이 나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나는 사람에 취약하다. 그래서 내 삶을 진북에 맞춰 이끌기 위해서는 가장 애착을 느끼는 '사람'으로부터 내가 영향을 덜 받도록 '정리'해야 한다. 


인간관계를 정리한다고 하면 보통은 관계를 내치거나 잘라버리는 것을 생각할 것이다. 책상을 정리한다고 할 때 불필요한 것을 휴지통에 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나도 그랬다. 내 시간을 반복적으로 빼앗거나, 집중력을 흐트러트리는 사람들에게 나는 '그만!'을 외쳤다. 물리적으로 떨어지거나, 연락을 안 하거나, 심지어 조용히 차단하기도 했다. 그들이 내 삶에 개입될 여지를 원천적으로 없애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함정이 있었다. 물리적인 정리가 곧 심리적인 정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에, 이후부터는 '죄책감'이라는 악마가 나를 따라다녔다. 물리적으로는 정리가 되었지만, 심리적으로는 이전보다 더 큰 방해를 받았다. 완벽한 역효과였다. 


이 역효과를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나는 '정리'의 다른 의미를 깨달았다. 필요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것도 정리지만,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들을 제자리에 놓아두는 것도 정리라는 걸. 무언가의 존재를 거부하지 않으면서 균형잡힌 상태를 유지하는 것. 그리고 이 또 다른 의미의 '정리'는 인간관계에도 비슷하게 적용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새로운 의미의 '정리'를 어떻게 인간관계에 적용할 수 있을까? 그 실행의 첫 번째 방법은, 내가 죄책감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나서서 사과하는 것이다.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몇 년까지 올라가서, 물리적으로는 만나지도 연락하지도 않지만 계속해서 내 마음에 최책감을 일으키는 이들에게 메일을 보내 사과를 하는 것이다. 메일 보다는 물론 전화나 일대일 만남이 더 좋겠지만 아직 그 정도의 용기는 없다. 


지금 대 여섯 명 정도 사과할 대상들이 떠오르는데, 유럽을 여행하는 동안 진심으로 시간을 내어 그들에게 사과 메일을 보내려 한다. 이 사과에는 내 마음을 전하는 소극적인 의미 뿐 아니라, 행여 원망을 받거나 추가적인 사과를 요구해도 기꺼이 수용하겠다는 적극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렇게 과거의 관계를 '정리'한 후에는, 현재 인연을 맺고 있는 사람들과 가능한 약속을 하지 않을 생각이다. 솔직히 나에 대한 기대를 가진 이들에게 모종의 '약속'을 하는 것은 마치 마약과 같다. 나로 인해서 행복해하는 눅누가의 모습을 보는 것 만큼 쾌감이 없기 때문이다.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존재감과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고. 


하지만 여기엔 중독성이 있다. 그래서 내가 원하지 않을 때 조차 스스로 지운 의무감에 약속을 하고 그 약속을 지킬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남에 의해서 세운 껍데기 계획 안에서 나는 또 힘들어 한다. 시간의 부족함에, 기대만큼 해 주지 못한다는 죄책감에. 마음이 힘들어지면 집중력은 더 떨어지고 시간은 더 부족하다. 이런 악순환의 시작은 바로 선의로 자행되는 '약속'에 있다. 


그래서 앞으로는 의식적으로 이 '약속'을 안 하려고 한다. 약속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도 우선은 기록만 해두었다가 최소한 며칠은 고민을 해 보고, 그 사이에 객관적인 조언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가 의논한 후 결정을 하려한다.  



3. 거절한다. 특히 시간 낭비러에게.



고백컨데 나는 거절이 어렵다. 

내가 거절을 잘 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거절하기까지 혼자 힘들어하는 시간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혼자 힘들어하다가 한계에 다다르면 그제야 큰 소리로 '그만'을 외치기 때문이다. 


이렇게 거절하지 못하고 타의적으로 끌려가는 시간 동안 내가 받는 스트레스는 상당하다. 테트리스 게임을 하다 실수로 [Space] 버튼을 누른 것처럼 빠른 속도로 스트레스가 쌓인다. 어찌어찌 그 시간을 견뎌내고 나면 반사적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다시는 이 상황 근처도 가지 말아야지. 그래서 심할 때는 만남 자체를 피하기도 한다.


그 중에서도 내가 거절을 못해서 반복적으로 힘들어하는 상황이 있는데, 필요 이상으로 길어지는 대화나 미팅이다. 특히나 한 명이 1분 이상을 쉼없이 이야기하면 나의 집중력은 급격하게 저하된다. 내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이 아니거나 거의 관련이 없는 경우에는 정도가 훨씬 심해서, 핸드폰의 녹음 기능을 켜 놓고 화장실에 가서 한 10분 앉아있다가 오는 편이 낫겠다는 무례한(?) 생각까지 든다. 


1분, 5분, 10분.. 한참 자기 이야기에 빠지면 대부분 얼마나 많은 시간이 갔는지 모른다. 간혹 나는 주제를 전환하려고 일부러 제 3자에게 다른 주제의 질문을 할 때도 있는데, 그 질문조차 다시 긴 이야기의 시작이 될 때도 이다. 그럼 나는 더 효과적인 '질문'을 준비하지만, 그 질문을 던질 물리적인 틈 조차 없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럴 경우, 정석은 그냥 말을 끊는 것이다. '오늘 모임의 원래 주제와 관련된 이이기인가요?' 혹은 '뒤에 약속이 있어서 저는 5분 후에 나가볼께요' 라고 단호하게 말해야 한다. '이제 그만 듣고 싶어요'라고 확실하게 사인을 해야 상대방도 자신만의 스토리 세계에서 깨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내게는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어렵다. (오타가 아니다, 정말로 너무나 어렵다) 자칫 무례하게 보일까봐, 혹은 상대의 행복을 깨는 사람이 될까봐 그냥 듣는 척을 한다. 속으로는 지금이 몇시나 됐을지, 어떤 이야기를 해야 이 지루함을 넌지시 알릴 수 있을까 딴 생각을 하면서 멍하니 상대의 눈만 바라본다. 


하지만 이제는 단호하게 거절하려 한다. 

설사 무례하다는 태그가 달리더라도, 상대방의 욕망이아니라 나의 억눌려진 욕망 - 듣기 싫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은 욕망을 먼저 챙기려 한다. 가능하면 상대방이 난감하거나 불편하지 않도록 거절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전문가의 도움도 받을 생각이지만, 어째튼 앞으로는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되는 대화에 내 시간을 버려두려 하지 않는다. 


말 끊어서 죄송해요. 근데 저는 약속이 있어서 5분봐야 할 것 같아요


4. 한번에 하나만 한다.



아는 것이 더 많아지고 그 만큼 고려할 것도 늘어나면서 나타난 부작용 중에 하나는 한번에 하나씩만 하는게 어려워졌다는 사실이다. 물론 여러 사람과 일하다 보면 멀티태스킹이 필요할 때가 있고, 이 때는 어렵더라도 멀티태스킹을 하는 게 맞다. 하지만 문제는, 멀티태스킹이 필요없고 하나에만 집중해야 하는 상황에서조차 습관적으로 멀티태스킹을 한다는 것이다. 


처음에 나는 이게 습관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일부러 핸드폰을 끄고, 알람을 없애고, 한번에 하나의 윈도우만 띄워 놓으면 해결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내 경우 그 효과는 단 며칠, 심지어 단 몇시간에 그쳤다. 핸드폰을 끄고 알람을 없애도, 내가 받아야 할 알람과 메세지가 많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지금 핸드폰을 끄고 알람을 없애는 것은 그저 언젠가 해야할 일을 지연시키는 것에 불과했다. 내게는 근본적인 해결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관여하는 일 자체가 많다는 것이었다. 나의 직업적 정체성을 위해 해야하는 일을 포함해서, 개인적인 성장과 취미생활을 위해서 해야하는 일까지. 거기다 가족으로서, 연인으로서, 팀의 리더로서 해야하는 책임감까지 더하면 나의 삶 자체에 '일'이 너무 많았다. 


이것들은 모두 내가 '해야하는' 일이 맞지만, 이렇게 해서는 어떤 것도 만족스러운 퀄러티로 잘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 빨리 덜 중요한 일을 (혹은 그 일의 퀄러티를) 포기하지 않으면 정말 중요한 일에 치명적인 흠집을 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두 가지 실천 전략을 세웠다. 


첫째, 내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려 한다. 우선순위가 없는 일들은 과감하게 버리고 꼭 해야하는 일만 리스트에 남기려고 한다. 그 다음에는 우선순위가 가장 높은 것부터 시간과 노력을 집중하되, 꼭 한번에 하나씩만 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가 끝날 때까지는 그 다음을 시작하지 않는 것이다. 적어도 의식적으로는. 


둘째, 우선순위는 높지 않아도 꼭 해야하는 일이라면 위임을 하려고 한다. 첫번째 전략대로 했을 때 버려지진 않았지만 우선순위 상 아직 시간과 노력을 들일 수 없는 일들이 여기에 속한다. 사실 많은 양의 일을 하려면 위임이 필수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내가 하지 못한 이유는 단 하나, 일의 퀄러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일의 퀄러티가 외부에 의조하는 상태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간과한 것이 있다. 일의 퀄러티를 아무에게도 의존하지 않으려고 했다가, 내가 그 일을 건드릴 시간조차 내지 못해는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한다는 사실이고, 그것은 내가 가장 바라지 않는 상황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작지만 큰 깨달음. 그래서 앞으로는 우선순위가 낮은 일에 한해 퀄러티에 대한 기대를 과감하게 버리려고 한다. 적어도 퀄러티를 내가 콘트롤하겠다는 욕심은. 


여기까지 생각하니 지금 내가 위임해야 할 일들이 머리속에서 착착 리스트업이 된다. 나 대신 그걸 잘 할 수 있는 사람들도. 

 




나와 함께 네덜란드로 출장을 온 코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진짜 원하는 것을 알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자신을 상상하면, 힘든 현재의 상황을 이길 힘이 생길 뿐 아니라 삶의 순간순간이 감사하고 행복하다고. 로테르담의 한 노천 카페에 앉아서, 이렇게 긴 글을 한 시간만에 단숨에 써 내려가는 지금 내 기분이 그렇다. 


곧 노트북을 닫고, 우리 멤버들이 있는 Airbnb 아파트로 자전거를 타고 갈 동안 어제 코치님이 말씀하신 그 삶의 감사와 행복을 좀 느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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