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사기 당하고 저혈압 치료 됐습니다.
'아니 도대체 저한테 왜 이러세요, 제 인생에 왜 나타나서 앞길 망치려고 하세요. 지금 장난치세요?'
난 그녀에게 더 심한 말도 할 수 있다. 이런 모진 말은 그녀가 나에게 준 스트레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할 때면 그녀는 일말의 감정 동요없이 AI챗봇처럼 똑같은 대답만 내놓는다.
'알았어요, 최선을 다할게요.' 혹은 '신경쓰고 있어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난 그녀에게 어떻게 하면 더 상처를 입힐 수 있을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후 다시 문자메시지를 보낸다.
'정말 낯짝 두꺼우시네요. 남의 돈으로 돈놀이 하더라도 피해는 주지 않으셔야죠. 안 부끄러우 세요? 아들뻘 되는 세입자 돈으로 돈놀이 한게요. 그쪽 때문에 저희는 지금 계획했던 결혼 일 정 다 미뤄야 할 판이에요. 당신 아들, 딸이 이러고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두 발 뻗고 잠이 오 세요?'
AI 채팅봇이 새로운 답변을 내놨다.
'결혼을 미루면 안 돼요?'
복장 터지는 답변을 내놓은 그녀는 내 전 집주인이자 나의 채무자다. 올해 3월까지 난 그녀의 건물에서 총 3년간 살았다. 계약에 따라 나는 그녀에게 그 집을 돌려주고, 그녀는 내 전세금 을 돌려줌으로써 우린 더 이상 연락할 필요가 없는 관계였다. 하지만 그녀는 내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았다. 계약을 지키지 않았음에도 처음에는 나도 그녀의 사정을 다 들어주며 웃으며 넘어갔다.
"4월까진 가능할 것 같으세요? 아 넵, 알겠습니다. 저희가 내는 이자도 있어서요. 이모님 그 때까진 꼭 부탁드릴게요! 감사합니다."
60대로 보이는, 엄마뻘 여자에게 싫은 소리 하기 싫었다. 내가 약간 손해보더라도 좋은 게 좋은 거지란 생각이었다.나와 솔은 내 보증금을 메꾸기 위해 매달 백만 원정도를 은행에 내고 있다. 여기서 솔은 나의 결혼예정자이자 현재 동거인이다. 올해 초부터 집을 합쳤다. 새로 마련한 집에 대한 대출 이자가 또 백만원, 거기다 가전제품이며, 침대, 소파, 식탁 등의 혼수, 가구에 대한 카드값이 다달이 백오십만원 정도. 그러니 고정지출만 해도 벌써 약 삼백오십 만원 정도다. 거기에 각자 통신비며, 교통비, 보험비, 결혼 준비에 쓴 카드값 등을 생각하면 우리의 가계는 정말 빠듯했다. 둘 중 하나라도 아프면 빚의 쓰나미가 덮쳐 거기에 떠내려 가 버릴 것 같은 위태위태한 위기의 가정이었다.
나의 채무자 양 씨는 약속의 4월에도 돈을 반환하지 않았다. 집을 사며 쓴 대출조건 때문에 난 '임차권 등기명령'이란 걸 걸고, 새 집으로 전입신고를 마쳤다. 4월까지 새 집으로 전입신고를 하지 않으면, 나에게 불이익이 생겼기 때문에 난 기다려 줄 수 있는 마지노선까지 기다렸다가 조치를 취한 것이다. 만약 '등기명령'을 하지 않고 주소지를 옮길 경우 내 보증금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하는 거나 다름 없기에 '등기명령'의 중요성은 마르고 닳도록 들었다. 며칠 후 양 씨에게 전화가 왔다.
"임차권 등기명령 때문에 계약하려는 사람도 안 해요. 그거 좀 해제해주세요. 집 보러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게 좀 걸리나봐요."
"예? 그거 해제하면 안 돼요. 그건 못 해드려요. 죄송해요."
"제가 이 건물에 살고 있잖아요. 나 한번 보고 해제해주세요. 그것만 해제해주면 잘 해결 될 것 같아. 00사 알아요? 아 모르시는구나, 그 절 되게 유명한데, 내가 얼마 전에 그 절에서 기도하고 왔어. 그러니깐 아무 일 없을 거에요. 자기는 맨날 이자 생각해달라면서, 내가 원하는 건 하나도 안 들어주잖아. 해제 좀 해줘~"
"좀 알아보고, 생각 좀 해볼게요."
침착한 척 전화를 끊었지만, 가슴 속에선 이미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이 여자가 미쳤나, 지금 누구 때문에 이 지랄을 하고 있는데. 유명한 절이고, 나발이고 부처님이 와도 개빡칠만한 이 상황에서, 이 아줌마한테 부처님한테 뭘 빌었다는 건지 묻고 싶었다.
양 씨 아줌마한테 엿멕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그녀가 이렇게 뻔뻔하고 무자비한 채무자란 걸 알까? 그녀가 활동하고 있는 생활반경, 커뮤니티 속으로 들어가 그녀의 민낯을 다 까발리고 싶었다. '이 여자가요, 제 돈 칠천삼백오십만 원을 떼먹고 지금 이러고 있어요. 전 이 여자 때문에 여자친구랑 매 달 백만 원씩 이자 내고 있어요. 대박이죠?' 카톡 프로필 사진을 보면 그녀의 시그니처 포즈가 있는데, 손가락이 모인 브이를 얼굴 옆에 대고, 팔을 올린 방향으로 몸을 기울이며 웃는 포즈. 뒤가 제비꽃이 만개한 꽃밭이든, 바다가 보이는 호텔이든 배경은 다채롭게 바뀌지만 그녀만은 시그니처 포즈를 하며 활짝 웃고 있다. 이 여자의 카톡 프사를 내려주고 싶었다. 파란 배경에 동그라미 하나, 반원하나만 있는 기본 프로필 사진으로.
3년간 양 씨 아줌마 집에 살며 알아낸 정보는 슬하에 아들, 딸이 있었다. 나이는 30대 중반 정도로 둘 다 결혼을 한 듯했다. 명절이면 사위와 딸 가족이 우리 빌라로 왔고, 가끔씩은 사 위에게 꽃바구니가 왔다.
'사랑하는 장모님 생신 축하드립니다. 사위 올림' 이런 식으로.
사위는 사랑하는 장모님이 남의 돈 떼먹는 악덕 건물주란 걸 알까. 뭘 어떻게 복수해야할지 구체적으론 모르겠지만, 그녀를 머릿속에서 추적하기 시작했다. 양 씨 아줌마 평일 일과는 보통 장사하러 나가거나 새로 짓는 절에 봉사하러 나간다고 얼핏 들은 기억이 났다. 네이버와 구글에 양** 절, 양** 관악구, 관악구 양** 사장, 양** 장사, 양** 가게 이런 식으로 검색하며 그녀를 디깅했 다. 카톡 프사에 절에서 찍은 사진이 있으면 그 절이 어딘지 양 손가락을 있는대로 벌리며 확대를 해봤다. 모르긴 몰라도, 그녀는 절 커뮤니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녀와 관련된 절 홈페이지가 서치가 되면,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모두 투고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 검색망 안 엔 전국의 다른 양** 사장님, 관악구 양** 의원만 검색될 뿐, 나의 채무자 양 씨의 꼬리는 잡 히지 않았다.
민사재판은 채무자에게 소장이 도달해야만 재판이 진행된다. 양 씨 아줌마는 내가 보낸 소장 등기를 계속해서 피해왔다. 7월이 돼서야 그 내용이 송달되어 지금은 재판일을 기다리고 있다. 이마저도 공시송달로 겨우 도달해싸. 그동안 양 씨 아줌마는 방이 계약이 되려고 한다, 계약자가 대출심사를 받고 있다, 안 되면 딸이 대출을 해주기로 했다 등의 말을 하며 나를 구워 삶았다. 난 그 말을 믿고, 고소장 접수를 최대한 미뤄왔다. 사실 복잡한 일에 뛰어들고 싶지 않았고 귀찮았던 점도 있었다. 고소장 접수 후, 15분에 20,000원을 내고 변호사와 전화 법률 상담을 했는데, 변호사는 시간을 왜 이렇게 많이 지체했냐며 나를 타박했다. 빨리 진행했으면 채무자에게 이자 이백만 원은 더 받을 수 있었을 거라고 하는데,
"음... 그러게요..."라고 밖에 대답이 안 나왔다. 그리고 나처럼 다가구주택 케이스는 나중에 경매가 진행되더라도 선순위에서 밀려 돈을 못 돌려 받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근데 경매가 시작되면 약 1년 정도 걸린단다. 판결문 나오는데 3개월, 경매하는데 1년, 차라리 양 씨 아줌마를 믿고 싶다. 그 전까지 돈을 구해줄 수 있지 않을 까?
등기부등본을 떼보니, 나처럼 보증금을 못 돌려받고 이사 간 사람, 즉 돈 떼인 사람이 세 사람이나 더 있었다. 이쯤되니, 양 씨 아줌마가 궁금해졌다. 지금 뭘하고 있을까? 돈을 구하려 여기 저기 전화를 돌리고 있을까? 돈을 못 갚아 마음은 불편할까? 내게 미안하다 보낸 문자는 진심일까?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민사소송 소식을 듣자마자 한 세월 걸리겠다며 걱정했고, 빚의 쓰나미가 일고 있는 우리 가계 소식을 듣곤 돈이 없으면 서로 싸우게 된다며 또 걱정했다. 그리고 시간이 남으면 어디 알바라도 나가라며.
양 씨 아줌마와 마지막으로 나눈 메시지는 곧 돈 나오는 날짜를 알 수 있게 될거란 메시지다. 돈이 나오는 날이 아니라, 돈이 나오는 날짜 를 알 수 있다. 재판으로 가든, 아줌마에게 돈을 받든 하염없이 기다려야하는 건 마찬가지다.
주인이 있는 개들은 밥 먹기 전 기다려 훈련 후에 밥 먹는다. 이 훈련의 목적은 주인과의 유대감 형성, 인내심 배양에 있다. 양 씨 아줌마와의 유대감은 말할 것도 없이 쌓였고, 친구들은 나에게 부처라고 하니, 이제 '먹어' 싸인이 나올 완벽한 타이밍이지 않을까! 그러니까 이제 양 씨 아줌마, 제 인생에서 나가주실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