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광 Jul 31. 2016

옥상 화단이 사라진 날

그 많던 흙을 어떻게 다 퍼옮겼을까?

#등장인물
문광: 대학생. 노가다 초보.
공명: 65년생. 노가다 경력자. 꽃중년.
돌비: ㅊ종합수리 사장.
설비: ㅊ종합수리 부사장(?). 돌비의 아들.
주머님: 건물주의 아내.
주님: 건물주.
 
 
#어느 토요일, ㅅ인력대기소
-ㅅ인력대기소는 토요일에도 막일꾼들로 빼곡하다. 노가더(노가다하는 사람들)에게는 휴일이 따로 없다. 일하러 나오지 않는 날이 곧 휴일이다. 반대로, 일하러 나오는 날이 곧 평일이다. 만약 일 욕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달을 평일로 가득 채우는 것도 가능하다. 쉬는 날 없이 매일 새벽마다 인력대기소로 나오면 된다. 물론 웬만한 사람들은 몸이 버텨내지 못한다.
 
-토요일을 평일처럼 보내는 사람 가운데 문광과 공명이 있다. 인력소장은 이들에게 일거리를 준다. ‘ㅎ동 ㅊ종합수리, 7시 50분까지. 아침밥은 따로 없으므로 그 근처 편의점에서 컵라면이라도 사 먹을 것.’
 
 
#ㅎ동 ㅊ종합수리 근처 편의점
-문광과 공명이 ㅊ종합수리 근처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7시. 아직도 50분이 여유롭다. 이들은 근처 편의점으로 들어간다. 문광은 김밥 한 줄을 고른다. 공명은 땅콩크림빵과 우유를 고른다. 말 없이 먹는다. 밖으로 나온다. 담배를 피운다. 공명의 표정이 좋지 않다.
 
공명: 아침부터 기분 나쁘게, 편의점 일하는 놈이 반말을 찍 하네. 빵이 어디 있냐고 물어보면 좋게 대답해 주면 될 것이지, 왜 들은 체 만 체 하다가 “저기”라고 짧게 말하고 마냐고. 막일하는 사람이라고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기분 나쁘게. 내가 뭐라고 한소리 하려다가 참았어.
 
 
#ㅎ동 ㅊ종합수리 앞
-오전 7시 30분. 흰색 차량 한 대가 ㅊ종합수리 앞에 주차한다. 차종은 렉서스다. 70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내린다. ㅊ종합수리 사장이다. 그는 문광과 공명에게 걸어간다.
 
돌비: 일하러 온 사람들이죠? 잠깐만 기다려요. 필요한 공구들 꺼내 올 테니까. 오늘 하는 건, 어려운 일 아니고, 옥상에 있는 조그만 화단의 흙을 퍼내는 거예요.
 
-ㅊ종합수리 사장 돌비는 필요한 장비를 꺼내러 지하로 내려간다. 문광과 공명은 작업복을 여민다.
 
공명: 다행히도 사장님이 인상이 좋네. 오늘 일하는 데 까다롭지는 않겠어.
 
문광: 그러게요. 다행이네요.
 
-돌비가 마대 한 묶음과 삽을 꺼내 나온다. 공명이 종종걸음으로 돌비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삽자루를 뺏어 든다. 문광은 마대를 받아 든다.
 
 
#ㅎ동 5층짜리 오피스텔 건물의 옥상
-옥상 한 귀퉁이에 ‘ㄱ’ 모양으로 화단이 있다. ‘ㄱ’ 모양의 화단을 ‘ㅡ’ 모양으로 펼쳐서 그 부피를 계산하면, 가로*세로*높이가 8m*1m*1m 정도다. 거기에 작은 나무가 몇 그루 심어져 있다. 단풍나무, 오가피나무, 철쭉나무, 난초. 단풍나무와 오가피나무는 잎이 무성하다. 철쭉은 시들시들하다. 난초가 나무와 나무 사이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다.
 
돌비: 여기에 있는 나무나 난초는 다 뽑아버리고, 흙은 마대 자루에 담으면 돼. 흙을 담은 마대는 저기 한쪽에 쌓아 두고. 화단이 그렇게 크지 않아서 어려운 일은 아니야. 오늘은 이것만 하면 돼. 천천히들 해. 이따가는 내 아들이 와서 같이 일할 거야.
 
-문광과 공명은 삽자루를 쥐었다. 먼저 난초와 나무부터 뽑아내기 시작했다.
 
 
#같은 옥상, 건물주 부부의 등장
-건물주 부부가 옥상에 올라왔다. 돌비와 공명과 문광에게 어젯밤 있었던 일을 하소연한다.
 
주머님(건물주 아주머님): 화단에 있는 나무며 난초며 흙이며 이제 필요 없으니까, 이것들 싹 다 치워주세요. 어젯밤에 비가 많이 내렸잖아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세요? 말도 못해요. 아주 옥상에 물난리가 났어요. 물바다가 따로 없었어요. 배수가 잘 안 되니까 여기에 물이 넘쳤어요. 건물 무너지는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그 새벽에 잠도 못자고 비 쫄딱 맞아가면서 나랑 우리 아저씨랑 둘이서 물을 퍼냈어요.
 
주님(건물주): 아주, 쌩 난리였지.
 
-주머님은 주의사항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주머님: 올라오면서 보니까 엘리베이터에 천막도 안 씌어져 있고, 바닥에도 아무 것도 안 깔려 있던데, 그대로 작업하는 건 아니죠? 특히 엘리베이터는 다치면 안 돼요. 전에 여기 이사하던 사람들이 천막도 안 깔아놓고 물건들 옮기는 바람에 바닥에 얼마나 많이 기스가 났는지 몰라요. 좀 신경 써 주세요. 그리고 저기 화단 옆에다가도 뭐라도 깔아 놓고요. 흙 떨어지면 더러워지니까.
 
돌비: 아이고, 당연하지. 걱정하지 마세요, 사모님. 내가 일 한 두 번 해요? 이 동네에서 일한 지 벌써 30년도 넘었슈. 말씀하신 내용은 기본 중의 기본이죠. 내가 그런 것도 모르고 작업할까봐? 걱정 붙들어매슈. 다 알아서 할 거니까.
 
주머님: 고마워요, 사장님. 내가 사장님만 딱 믿을게요. 잘해주세요. 날도 더운데 제가 카페 가서 커피라도 사올게요.
 
-건물주 부부는 커피 사러 가고, 돌비는 마대를 더 가지러 갔다. 옥상엔 문광과 공명만 남았다. 둘은 삽자루를 한쪽에 치우고 담배부터 피워 문다.
 
 
#화단의 민머리가 드러나고
-노가다는 쉽다. 단순작업의 무한반복. 문광과 공명은 삽질을 한다. 난초를 잡초처럼 뽑는다. 철쭉나무를 아이스크림 퍼내듯이 뿌리째 떠낸다. 웬만큼은 화초들을 없애고 나니 화단의 민머리가 드러난다. 공명이 문광에게 말한다.
 
공명: 이제 나무 뽑는 일은 그만하고, 여기서부터 흙을 퍼내기 시작하자고. 내가 여기서 삽질할 테니까, 자네는 그동안 마대좀 잡아주고 그것들 한쪽에 옮겨 쌓는 일을 좀 해줘.
 
문광: 알겠어요. 삽질하시다가 힘들면 그때 말씀하세요. 그때부터는 제가 삽질할게요.
 
-공명은 삽질하고, 문광은 흙자루를 옮긴다. 옥상 한구석에 흙자루가 점점 쌓인다.
 
 
#바람아 불어다오
-삽질하던 공명이 허리를 곧추세우고 말한다.
 
공명: 바람이 불어 줘야 할 텐데. 날이 흐려서 햇볕이 뜨겁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기는 한데, 여기에 바람까지 딱 불어 주면 더 좋을 텐데 말이야. 안 그러면 더워서 일 못하지. 바람도 안 부는데 햇볕까지 내리쬐면 아주 죽을 맛이야. 옥상 작업은 그게 제일 힘들어. 덥고 바람도 안 부는 거.
 
문광: 그러게요, 바람만 딱 불면 시원하고 좋을 텐데 말이에요. 그나마 흙이 무겁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어제 비가 내려서 흙이 무거울 줄 알았는데 가볍네요.
 
공명: ‘마사토’라서 그래. 모래 비슷한 건데, 이게 물빠짐이 좋아. 그나마 이거 바람이 불어야 할 텐데. 불 듯 말 듯 안 부네. 흙자루는 안 무겁고? 무거우면 말 해. 흙자루가 무거우면 나중에 일일이 옮길 때 힘드니까.
 
문광: 딱 적당한 것 같아요. 네 다섯 삽 정도? 그러니까 자루에 1/3 정도 차게 흙을 퍼 담으면 들기에 그렇게 무겁지는 않아요.
 
 
#돌비사운드
-공명과 문광이 화단의 흙을 20% 퍼냈을 때, 돌비가 돌아왔다. 돌비는 화단을 바라본다. 이제 막 흙이 사라지기 시작한 지점부터 끝마쳐야 할 지점을 스윽 둘러본다. 그는 미간을 찡그린다.
 
돌비: 안 되겠네. 이거 흙 다 파냈다가는 인건비도 안 나와. 힘만 들고 남는 게 없겠어. 당신들이랑 나만 죽어나는 거지. 내가 이따가 건물주 아줌마를 잘 구슬려서 딱 절반 정도만 파자고 설득해야겠어. 이거 다 파내고 나면 미관이 안 좋아질 것 같다고, 그래서 옥상이 삭막해 질 것 같다고 말해야지. 딱 절반 정도까지만 흙들 다 퍼내면, 옥상 배수는 아무 문제 없고, 미관도 살릴 수 있다고, 그렇게 말해야지.
 
문광: (일이 줄어드는 것을 기뻐하며) 오, 그러면 화단 흙 다 퍼내지 않아도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일도 줄어들고 훨씬 낫겠네요. 그런데 아까 건물주 아주머니는 이거 싹 다 없애달라고 말씀하시던데, 사장님 말씀대로 할 수 있을까요?
 
돌비: (자신 있어하며) 그럼! 내가 이빨을 잘 털어야지. 장사는 말이여, ‘스피커’가 중요해. (자신의 입을 가리키며) 이 입이 중요하다고. 말을 잘 해야 해. 장사를 해먹을 때는 기술보다도 이 스피커가 먼저야. 스피커가 첫 번째고, 기술은 두 번째지. 말을 잘해서 일은 조금만 하고 돈은 그대로 받고, 그래야 뭐라도 남겨 먹지. 안 그러고는 답도 없어. 일은 일대로 많이 하고 돈은 남는 것도 없고. 내가 기술 하나로만 일했으면 어떻게 30년을 해먹었겠어. 중요한 건 이 스피커여. 내 스피커는 말이여, ‘돌비사운드’여. 이따 잘 보라고. 그런데 이놈의 여자는 커피 사러 간다더만 어디를 가서 아직까지 안 오는겨. 뭔, 커피 사러 브라질까지 가부렀나.
 
 
#내가 장사 하루이틀 해요?
-화단의 흙을 30% 퍼냈다. 한구석에 바닥이 드러난 화단을 돌비가 이리저리 살핀다.
 
돌비: 물매가 안 맞네. 그러니 비가 많이 내리면 물이 안 빠질 수밖에 없지. 하수구 쪽으로 물이 흘러가게 물매를 잡았어야지. 이걸 반대로 해놨으니, 원. 옥상 시공한 사람들이 대충으로 했구만.
 
-건물주 부부가 다시 나타난다. 주머님은 돌비, 공명, 문광에게 커피를 건넨다.
 
돌비: 아이고, 잘 먹겠습니다. 우리는 그냥 물만 있으면 되는데. 주셨으니 잘 먹을게요. 나는 커피 사러 가신다는 분이 돌아오지를 않길래 무슨 브라질까지 가서 커피 사오시는 줄 알았슈. 그런데 사모님, 여기좀 보세요. 하수구는 저기에 있슈. 물매좀 보쇼. 하수구 반대 방향으로 기울어 있제? 그러니까 물이 안 빠질 수밖에 없지.
 
주머님: 그러네요. 물매가 안 맞네. 그러니까 어제 그렇게 쌩 난리였지, 세상에나. 그런데다가 뭐하러 화단까지 만들어서... 이게 저희가 만든 게 아니에요. 저희는 이 건물 산 지 얼마 안 됐어요.
 
돌비: 그렇죠. 지금은 옥상에 화단이나 정원 같은 거 안 만들어도 되죠. 물도 잘 안 빠지고 그런 게 문제가 되니까. 예전에야 법이 그렇게 돼 있어서 건물 지으려면 옥상에 화단이나 정원을 꼭 만들어야 했죠. 그런데 이제는 안 그러죠. 법이 하여간 참 이상해. 얼마나 재밌는지 알아요? 나무나 흙을 빌려주기만 하는 사람도 있어요. 화단이나 정원을 잠깐만 만들었다가 없애느라고. 화단이나 정원이 없으면 허가가 안 나니까 그랬던 거지. 공무원한테 검사받고 나서는 화단 이런 거 싹 없애버리고들 그랬어요. 많이들 그랬어요. 저기 저 건물도 그렇게 지었죠.
 
주머님: 어머나, 세상에. 그랬어요? 하긴 옥상에 이런 게 있으면 관리하기가 워낙 힘들어야죠. 나무 자라면 가지도 잘라야 해, 비 많이 오면 물도 넘쳐, 문제 덩어리죠. 아주 골치가 아파.
 
돌비: 사모님, 잘 들어보세요. 내 생각은 이래. 어차피 물 빠지는 문제야 물매만 잘 잡아주면 되는 일이니까, 화단을 싹 파내지는 않아도 돼. (‘ㄱ’ 모양의 화단의 중간 지점, 즉 직각으로 꺾이는 부분을 가리키며) 아마도 저기 중간까지만 흙을 싹 퍼내면 물 빠지는 데가 나올 것이요. 그 부분만 잘 손보면 아무리 비가 많이 내려도 물 고일 걱정은 없지.
 
주머님: 그래요? 그런데 저희 친척 중에 ‘조경’하시는 분이 있어요.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화단 흙 이거 싹 다 퍼내고 없애버리라고 하던데요? 안 그러면 두고두고 골칫거리라고.
 
주님: 사장님, 그냥 저희 말대로 화단 싹 치워 주세요. 어제 그 난리만 생각하면, 아휴...
 
돌비: 아이고, 아니에요. 딱 저기 중간까지만 흙 퍼내면, 이후로는 물 빠지는 거 아무 문제 없어요. 물매만 잘 잡아 주면 돼. 그리고 여기 나무들 다 치워버리면 미관이 안 좋아질 것 같아. 담배 피우러 올라온 사람들이 봤을 때 옥상에 나무라도 하나 있어야지, 안 그러면 삭막혀. 특히 나는 저 오가피나무가 너무 아까워. 오가피, 저게 좋은 거여. 비싼 거여. 저게 버리는 건 쉬워도 심으려면 100만원 가까이는 든다고.

 

주머님: 아깝기는 하네요. 그렇죠. 아무래도 나무가 없으면 삭막해 지겠죠. 옥상은 우리 건물의 얼굴이나 다름없는데. 문제는, 물이 잘 빠져야 된다는 거예요. 비가 많이 와도 어제처럼 물이 넘쳐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돌비: 아이고, 사모님! 내가 거짓말은 안 혀. 여기서 장사 하루이틀 해요? 벌써 30년도 더 됐어. 신뢰를 못 쌓았으면 30년을 버틸 수가 없다고. 우리 가게가 바로 저기여. 걸어서도 1~2분이면 닿는 거리라고. 무슨 문제 생기면 내가 돈 안 받고 싹 다 다시 손봐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셔. 일단은 저기 중간까지만 작업 끝내고 나서, 그때 다시 이야기하자고요.

 

주머님: 알았어요. 내가 사장님 말만 믿을게요. 이따가 다시 이야기해요.
 
 
#옥상의 흙자루를 1층으로
-작업에 진전이 있다. 화단의 흙이 절반은 사라졌다. 옥상 한구석에 그만큼의 흙자루가 쌓여 있다. 쌓인 흙자루가 200개는 거뜬히 넘는다. ㅊ종합수리의 부사장(설비)이 나타났다. 그는 돌비의 아들이다.
 
돌비: 어, 아들 왔냐.
 
설비: 네, 다른 데 작업좀 하고 오느라 늦었네요. 아직도 덜 끝나서, 여기 작업 끝나면 얼른 거기로 가 봐야 해요. (문광을 부르며) 거기 작은사장님, 나랑 이것들좀 아래로 옮기죠.


 
-흙자루를 1층으로 옮겨야 한다. 계단으로 하나하나 짊어서 옮기지 않아도 된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덕이다. 엘리베이터에 한 번에 흙자루 20개 정도를 옮긴다. 1층으로 내려가서 그것을 트럭 짐칸에 싣는다. 단순한 작업의 반복.
 
-엘리베이터 문이 계속 열려 있도록 하는 방법: 엘리베이터 센서를 이용한다. 문틈 사이에 센서가 설치되어 있다. 엘리베이터를 사람이 오가는 동안에는 문이 닫히지 않도록, 센서는 신경을 곤두세운다. 이것이 물체를 계속 인식하게 만들면 엘리베이터는 문은 닫히지 않는다. 엘리베이터 문틈에 작은 물건을 끼워 넣으면 센서는 그 소임을 다해서 문을 활짝 열어 둔다.
 
 
#눈으로는 안 되지만, 손으로는 된다
-문광은 토할 것 같다. 10kg 조금 넘는 흙자루를 쉬지 않고 옮겨대는 탓이다. 잠시 쉬는 시간이 있다면 엘리베이터가 5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동안뿐이다. 1층에 내려가서는 다시 흙자루를 쉬지 않고 옮겨야 한다. 크로스핏을 하면 이런 느낌이겠구나, 라고 문광은 상상한다.
 
-문광도 힘들고, 설비(ㅊ종합수리 부사장)도 힘들다. 1층에 가지고 내려온 흙자루를 트럭 뒤에 다 싣고 잠시 쉰다. 설비가 문광에게 말을 건다.
 
설비: 힘들죠? 작은사장님은 몇 살이에요? 26살이요? 좋을 때네. 아직 학교 다니죠? 알바로 일하는 거예요? 얼마나 된 거예요? 노가다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다구요? 저도 20살 때부터 알바로 노가다 했었죠. 나이가 어리니까 일하기도 쉽지 않더라고요. 일하러 가도 현장 아저씨들이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였고. 알바로 이런 일도 하고 대단하네요. 그래도 다른 아르바이트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죠. 몸은 고되도 돈도 많이 받고, 또 몸도 좋아지고. 오랜만에 저도 노가다 하려니까 힘드네요. 설비(設備)하는 사람이 노가다를 하고 있으니, 원. 아버지는 괜히 나를 불러서... 지금 다른 일들도 바쁜데. 일하다 보면 그런 생각 들지 않아요? ‘이걸 언제 다 끝내나.’ 그런데요, 그게 매번 다 끝나더라구요. 눈으로는 안 된다고 하는데, 신기하게도 손으로는 되더라고, ‘이게 언제 끝나나’ 싶은데, 하다 보면 또 그게 다 끝나더라고요. 참 신기해.
 
 
#영업은 사람 할 일이 못돼
문광: 아까, 사장님(설비의 아버지)께서 그러시던데, 졸업하고 LG에서 일하셨다고요. LG는 그래도 다른 회사보다 일하기에 더 낫다고들 하던데, 퇴사하신 이유를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설비: 아이고, 아버지는 또 뭐하러 그런 말씀을 하시나. 그랬었죠. 제가 지금 작은사장님 나이에, 26살에 졸업하고 곧장 취직했죠. LG 영업팀에 들어갔어요. 벌써 10년도 넘었네요. 처음 1년 동안에는 그래도 할 만했어요. 그런데 2년, 3년 지나니까 도저히 못 하겠더라구요. 영업은 사람 할 일이 못돼요.
 
작은사장님도 아시겠지만, 영업은 자기가 맡는 지역이라는 게 있잖아요? 제가 부서에 딱 배치되니까 제 관할지역이 생기더라구요. 제가 맡은 지역은 실적이 엄청 안 좋은 곳이었어요. 그런데도 매출 목표치는 또 엄청 높게 잡혀 있더라구요. 그래서 어쨌겠어요. 죽어라 일했죠. 만약에 그 지역 점포가 주말에 쉬면, 제가 대신 나가서 물건 팔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겨우겨우 매출 목표치를 넘겼어요. 처음엔 좋았죠. 회사에서 보너스도 주고 그러더라구요. 그때 회사 선배들이 그렇게 말했어요. “너무 열심히 하지 마라. 나중에 그게 다 너한테 돌아온다. 우리도 처음에는 모르고 너처럼 열심히 했다. 회사에서 보너스 주는 게 다 너를 길들이려고 그러는 거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금방 알겠더라구요. 원래 매출이 낮은 지역이었던 곳을 제가 겨우겨우 목표치만큼 매출 올려 놨잖아요? 다음 목표치는 가관이에요. 그 다음해 목표치는 제가 올려 놓은 매출보다 더 높게 잡히더라구요. 점점 더 힘들어지는 거죠. 목표치보다 낮게 나오면 일을 어떻게 하는 거냐고 까이고... 그때 제가 10kg 넘게 빠졌어요. 몸무게가 50kg대까지 떨어지더라구요. 지금은 몸무게가 80kg 나가요. 그때 일이 너무 힘들고 괴로웠어요. 영업팀에서 부장이네 과장이네 하고 있는 사람들은 진짜 대단한 사람들이에요.
 
저는 못 버텼어요. 영업이고 뭐고 때려쳤죠. 폐인처럼 지냈어요. 죽고 싶더라구요. 나이는 서른이고, 갈 곳은 없고, 제 자신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어요.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죽고 싶다는 생각밖에는 안 들었어요. 진짜로 소주 두 병 들고 한밤에 한강에 갔어요. 자살하려고요. 거기서 소주 두 병을 병째로 마셨어요. 다리 밑으로 뛰어내리려고 했어요. 또 막상 죽으려고 하니까 못 뛰어내리겠더라구요. 내가 이 나이에 죽어서 뭐하나, 슬퍼해 줄 사람이 우리 부모님 말고는 없을 텐데, 차라리 살자.
 
아버지한테 말했어요. “아버지 밑에서 일 배우겠습니다.” 그때부터 설비 일을 시작했어요. LG에서 영업 일할 때보다 지금이 훨씬 나아요. 일하는 시간은 비슷한 것 같아요. 아무래도 이게 개인사업이고, 일한 만큼 돈을 더 벌 수 있다보니까 욕심이 생겨서 일을 더 하게 되죠. 그래도 압박이 없잖아요? 순전히 제 욕심으로 더 일하는 거니까요.
 
아이고 내 이야기를 너무 많이 했나? 오랜만에 젊은 분이랑 일하니까 즐겁네요. 젊음이 느껴져요.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제가 잘 모르지만. 노가다 오래 하신 분들은 대충대충 일해요. ‘열심히 해서 뭐하나. 적당히 하고 일당 받으면 되지’ 라고들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물론 그분들 생각이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너무들 그러면 일이 잘 안 되잖아요. 우리 작은사장님은 아직 그러지 않아서 좋아요. 제가 다 힘이 나네요.
 
 
#화단 다 없애야 돼요
-문광과 설비는 옥상에 쌓인 흙자루를 모두 옮겼다. 1톤 트럭으로 세 차는 나오는 양이었다. 하루 일이 모두 끝났다고 생각하고 그 둘은 옥상에 올라갔다. 한구석에는 짜장면과 소주 한 병이 놓여 있었다. 그 옆에서는 돌비와 건물주들 사이에서 언쟁이 오갔다.
 
주머님: ... 안 돼요! 아까 사장님이 뭐라고 하셨어요. 이거를 다 없애면 삭막하네 어쩌네 말씀하셨죠. 그리고 배수는 전혀 문제가 없을 거라고 하셨죠. (화단 옆의 돌바닥을 가리키며) 그런데 물길을 만드려면 저기를 잘라내야 한다니요. 그건 말도 안 되죠. 그리고 화단을 한번 보세요. 이렇게 남겨둬서는 안 돼요. 보기에도 안 좋아요. 아까는 무슨 삭막하네 어쩌네 말했으면서 이게 뭐예요. 도저히 안 돼요. 그러니까 아까 저희가 부탁드렸던 대로 작업했으면 될 거를 왜 고집을 부리셔서 이렇게 만들어요. 오늘 밤에 또 비가 쏟아진다는데, 화단 이거 오늘까지는 다 없애야 돼요.
 
돌비: 알았어요, 알았어. 그런데, 이제 와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진작에 말씀하셨어야지, 이제야 말씀하시면 어떡해요. (문광과 공명을 가리키며) 이 사람들 야간작업하면 일당도 더 줘야 하고, 이 흙들 폐기물처리장에 갖다 버리려면 한 차에 얼마씩 더 줘야 하는지 아시죠? 비용이 추가돼요.
 
주머님: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필요한 만큼 더 드릴 테니까, 일단 이 작업만 다 끝내 주세요. 비 많이 내린다는 소식만 들으면 가슴이 철렁해요. 우리 그렇게 나쁜 사람들 아니에요. 언제 제가 사장님이 부른 가격 깎은 적 있어요? 없죠? 다 말씀하신 대로 드리기로 했잖아요. 저희는 사장님 믿고 일 맡기는 거니까 제대로 해주세요.
 
주님: 우리 그렇게 나쁜 사람들 아닙니다.
 
돌비: 알았어요. (문광과 공명에게) 어째요. 3시간 정도 더 일하면 끝날 것 같은데, 시간들 괜찮은가?
 
문광, 공명: 예.
 
돌비: 좋아. 일단은 짜장면부터 먹고 일하자고.
 

 
-네 명은 짜장면을 한 그릇씩 먹고, 소주도 한두 잔씩 마시고 나서 일을 다시 시작했다. 작업은 이미 몸에 익을 대로 익어서 이전보다 더 빠르게 진전됐다. 구름이 석양에 물들었다.
 
 
#건물주들은 지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설비: 이게 정말 이상해요. 일 다니면서 보니까 건물주들한테는 비슷한 점이 하나 있어요. 특히 자기들 뜻대로 뭔가 잘 안 되면 역정을 내. 성질을 막 그렇게 낸다고. 평소에는 교양 있는 척, 너그러운 척하다가 막상 일이 자기 뜻대로 안 되면 큰소리를 쳐요. 사람 하대하는 건 기본이고. 빚내서 건물이라도 하나 사고 나면, 사람들이 마치 자기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웃기는 일이지.
 
 
#옛날이 좋았지
-돌비는 상황을 금방 인정했다. 일을 마저 더 해야 한다면 더 하면 된다. 고집 피울 일 없다. 이 바닥에서 장사 30년 하다 보면 이런 일은 아무 것도 아니다. 마음 상할 것도 없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은 것에 대한 아쉬움은 조금 있다. 문광과 공명에게 돌비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 준다. 처음 이 일을 시작하고 나서 자리 잡기까지, 그 찬란했던 과거를 회상한다.
 
돌비: 옛날이 좋았어. 내가 운이 좋았지. 무슨 일을 하려고 해도 네트워크가 중요해.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고. 그게 없으면 돈 못 벌지. 사람이 살면서 크게 돈 벌 기회게 딱 세 번 있대. 내가 일을 처음 시작할 때 그런 기회가 왔어. 신촌에 있는 대학교들 있지? 내가 거기 난로들을 관리하는 일을 맡게 됐던 거야. 지인이 나를 추천해 준 덕분에 거기서 일하게 됐지. 그때는 대학교에서 석유난로들을 썼어. 그게 모든 강의실마다 설치돼 있었으니까, 얼마나 많았겠어. 석유난로 부품 중에서도 자주 갈아야 하는 게 있거든. ‘심지’말이야. 그 심지 갈아주면서 돈좀 벌었지.
 
어떻게 심지 갈면서 돈 벌었냐고? 사람이 말이야 융통성이 있어야 돼. 특히 이화여대같은 경우 말이야, 돈 많잖아? 그 중에서도 음대는 특히나 넉넉한 곳이라고. 거기 다니는 학생들이 다 부자집 딸들이잖아. 똑같은 심지를 갈아도 철학과에는 하나에 100원이라고 말했으면, 음대에는 500원이라고 말했지. 그렇게 해서 돈 많이 벌었어. 그때는 내가 직접 명세서 쓴 다음, 학과사무실에서는 거기에 도장만 받으면 됐어. 그럼 걔네들이 뭘 아나? 내가 그냥 이 가격이다, 라고 써서 내기만 하면 과사무실 조교들이 별말 없이 도장 찍어 줬지. 나중에는 석유난로가 사라지면서 내가 그 일을 그만 뒀지만. 그때 자리 잡은 덕분에 지금은 내가 영등포에 빌딩도 하나 가지고 있잖아. 맨주먹으로 상경해서 나도 진짜 출세했지.
 
내가 한창 석유난로 심지 갈던 그때가 말이야, 언제냐. 이한열이가 그렇게 됐을 때였으니까, 벌써 오래 전이지. 그런데 그거 알아? 그때는 학생들이 데모할 때 무슨 대자보 같은 걸 써붙였던 게 아니야. 들어봐, 이랬어. 처음에는 세 명이 모여. 그러고 학생회관 앞에서 그 세 명이서 팔짱끼고 무슨 노래를 불러. 그러면 지나가던 학생들이 그거 보고는 ‘아, 무슨 데모가 있으려나 보다’ 하고 하나둘 그 옆에 모이는 거야. 그리고는 팔짱 끼고 같이 노래를 부르는 거야. 그렇게 숫자가 불어나다가 학생들이 그 넓은 공간을 가득 메우고 나면 정문 밖으로 몰려 나갔지. 정말, 대단했지. 특히 연세대에서 자주 그랬어. 그때 학생운동하고 그랬던 사람들이 지금은 국회의원이다 뭐다 됐지. 지금도 연고대, 연고대 하잖아? 학생데모도 연고대가 알아줬지.
 
 
#화단의 마지막 흙을 퍼내며
-옥상 화단의 흙을 마침내 다 퍼냈다. 화단을 둘러싸던 낮은 담장만이 남았다. 마지막 흙을 퍼내자 문광과 공명에게 주머님이 말했다.
 
주머님: 오늘 두 분 아니었으면 일 끝내지도 못 했을 거예요.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정말 고마운 사람들이에요. 만약 두 분이 시간 없어서 야간작업 못 한다고 말했으면 어쨌을 뻔했어요. 일 못 끝냈죠. 얼마나 고마워요. 돈 몇 푼 더 벌려고 이렇게 저녁까지 일하고.
 
-문광은 갑자기 아니꼽다. ‘돈 몇 푼? 일을 부탁하는 사람이 일하는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니다. 물론 돈 벌자고 하는 일지만, 그렇게 노가더(노가다하는 사람)를 비굴하고 옹색하게 만들어선 안 된다.’ 문광은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라던 <베테랑>의 대사를 떠올린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가오도 자존심도 흙자루에 담는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가오라는 것도 자존심이라는 것도 지폐 한 장보다도 얇다.
 
주님: 몇 살이에요? 26살이라고요? 그럼 대학교는 졸업했고? 아직? 그래, 젊어서는 일부러 힘든 일도 해보고 그래야지. 우리도 옛날에는 힘들었어요.
 
 
#5만원
-문광은 엘리베이터로 흙자루를 계속 옮겼다. 옥상에 쌓인 흙자루가 거의 치워졌다. 문광이 엘리베이터 앞에 있을 때, 주머님(건물주 아주머님)이 조용히 문광에게 다가왔다. 주머님은 자신의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노란빛이 감돌았다. 주머님은 5만원짜리 한 장을 문광에게 건넨다.
 
주머님: 내가, 고마워서 드리는 거예요. 일당은 저기 사장님한테 제대로 받고요, 이건 제가 고마워서 더 드리는 거예요. 일당 꼭 제대로 받아요. 같이 일 나오신 분한테도 드릴 거예요.
 
-마지막 작업에서 공명과 문광은 흙탕물에 손을 담그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5만원의 힘.
 
 
#해는 이미 저물고

-저녁 8시 30분.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작업이 모두 끝났다. 해는 저물었다. 옥상은 어둡다. 건물마다 불빛이 밤하늘을 밝힌다. 눈은 안 된다고 했지만, 손은 결국 해냈다.
 
 
#맥주 한 캔
돌비: 일 끝나고 마시는 맥주, 이거는 돈 주고도 못 사먹는 맛이야. 세상에서 제일로 맛난 맥주. 이제 이거 한 캔 딱 마시고 집에 가서 씻고 자야지. 오늘 고생들 했어. 자, 오늘 일당. 부족하지는 않을 걸세. 한 사람당 16장씩.
 
 
#정산
일당 160,000원
팁 50,000원
수수료(일비) 16,000원
순수익 194,000원


매거진의 이전글 전기공 데모도(어시스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