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와중에도, 있어 보이고 싶어서
‘인생 영화’가 있냐고 친구가 물었다.
나는 도대체 ‘인생 영화’가 무엇인지, 속으로 되물었다. 여러 번 돌려본 영화? 오래도록 간직하고픈 메시지가 있는 영화? 아니면 소중한 추억과 함께 떠오르는 그런 영화?
당장 생각나는 영화가 있었다.
<주노>(Juno, 2007)
<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Music and Lyrics, 2007)
<캐시백>(Cashback, 2006)
ㅡ여러 번 돌려본 영화?
세 영화는 스무 번도 넘게 봤다. 정확히는 ‘들었다’고 해야겠다. 노래를 틀어 놓듯이 영화를 켜놓고 소리만 들었다. OST가 좋았다.
하도 반복해서 들은 탓에 나는 영화를 소설처럼 감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소설을 읽으면서 그 장면을 떠올리듯, 영화의 대사와 배경음악을 들으면서 장면을 상상했다. 내가 원하는 구도와 배경으로, 영화를 다시 그렸다. 이미 감독이 정성들여 촬영한 장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즐거운 오독(誤讀)이었다.
ㅡ오래 간직하고픈 메시지가 있는 영화?
이런 철저한 오독의 과정에서도 영화의 메시지는 뚜렷해졌다. 모두 사랑에 관한 이야기였다. <주노>에선 무정형으로서의 사랑을, <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에서는 여백으로서의 사랑을, <캐시백>에서는 영원한 순간으로서의 사랑을, 나는 곱씹어 생각했다.
상대방에게 나의 ‘이상형’이라는 굴레를 강요하거나 덧씌우지 않는 게 ‘무정형으로서의 사랑’이다. 상대 없이 나 혼자서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지만 함께할 때 서로의 여백을 채우며 더욱 아름다운 조화를 만들어내는 게 ‘여백으로서의 사랑’이다. 영원을 약속하는 것처럼 바보스러운 것은 없을지라도 아름다웠던 순간은 언제나 그 시절의 순간 속에서 영원할 수 있다는 게 ‘영원한 순간으로서의 사랑’이다. 말하자면 이 세 가지는 ‘사랑’이라는 실체 없는 감정에 대한 나만의 개똥같은 정의인 것이다.
ㅡ소중한 추억과 함께 떠오르는 영화?
예전에 봤던 영화를 떠올릴 때, ‘그 영화를 누구랑 봤지?’부터 생각하는 사람들은 안다. 다른 예술작품들과 달리 영화라는 장르는 타인과의 관계가 전제된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말이다. 영화관에서 다른 누군가와 팝콘을 나눠 먹으며 영화에 몰입하고, 괜히 옆에 앉은 친구에게 영화 내용을 ‘스포’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하지만 꾹 참고, 어두컴컴한 암실(暗室)에서 나오면서 영화에 대한 호불호를 서로 터놓으면서, 그 영화에는 그날의 총체적인 상황까지 덧붙는다. 옆에서 꾸벅꾸벅 졸던 친구의 모습까지도.
혼자 영화를 보는 동안에도 예외는 없다. 영화는 우리 각자가 품었던 그 시절의 고민과 생각을 고스란히 간직한다. 예전에 본 영화를 다시 꺼내보는 것은 어쩌면 그 시절의 우리 자신을 불러들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캐시백>을 볼 때마다, 그 OST를 들을 때마다 자꾸만 가슴 한구석이 시린 것은 그 영화에 몰입하고 이입하던 그날의 기억들이 줄줄이 떠오른 탓이다. 하물며 철저한 킬링타임용으로 본 탓에 내용이라고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영화를 생각하는 동안에도 그날의 ‘잉여스러움’이 슬며시 고개를 드는 것도 같은 까닭인 것이다.
ㅡ인생 영화?
‘인생 영화’가 없냐고 친구가 다시 물었다.
이것저것 재다 나는 결국 대답하지 못했다. 나름의 세 가지 기준을 충족하는 영화가 세 개나 있었지만, 그것들은 ‘인생 영화’라는 거창한 말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는 것 같았다. 인생 영화라고 하기에는 개봉된 지 가까스로 10년을 넘긴 영화들인지라, 많은 사람들과 공감하기에는 한계를 가진 독립영화 같은 작품인지라, 로맨틱코미디 영화의 문법을 철저히 따라서 찍어낸 듯 만들어낸 상업영화인지라, 혹은 ‘그럴싸하게’ ‘있어 보이게’ 찍은 예술영화 같은지라, ‘예술 영화’로 꼽자니 자격 미달인 것들이었다, 라고 당시에는 생각했다.
결국 나는 “아직, 인생 영화를 논하기에는 내 영화 감상 이력이 너무 짧다”고 둘러댈 뿐이었다.
“나는 <대부>.”
친구는 자신의 인생 영화가 <대부>(The Godfather, 1972)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