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마찌, 일 없어요
계속되는 데마찌에 결국 인력대기소를 갈아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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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용어들 중에는 유독 일본어가 많다. 나는 ‘오함마’나 ‘시마이’ 정도밖에 몰랐다.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기 전에 그 수많은 용어들을 한 번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귀도 못 알아먹는다고 구박받고 싶지는 않았던 탓이다. 구글에 ‘현장 용어’를 검색했다. 나무위키 자료를 찾았다. 눈을 의심했다. ‘가꾸목’부터 ‘히사시’까지 200개에 가까운 외계어가 나를 압도했다. 읽다가 금방 포기했다. 직접 눈으로 귀로 겪어보지 않는 이상 이것들을 기억할 리 만무했다. ‘나라시’라는 말도 노가다 첫 출근하던 날, 온몸으로 배웠다. 여기다 용어 하나를 또 추가한다. ‘데마찌’.
-오함마: 큰 망치. 5파운드(lb)짜리 망치.
-시마이: 마무리. 일을 끝냄.
-나라시: 평탄화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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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마찌(てまち).
듣기엔 얼마나 귀여운 말인가. 발음도 귀엽다. 데마찌. 그런데 뜻만큼은 잔혹하다. ‘일이 없어 대기함.’ 대기하더라도 없던 일이 생길 가능성은 희박하다. 데마찌, 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두 가지의 선택지가 주어진다. 하나는 얼른 근처의 다른 인력대기소를 찾아보는 것이다. 그러나 옮겨간 그곳도 데마찌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다른 하나의 선택지는 조용히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무엇이 되었든 다른 일정들로 하루를 채우는 게 필요하다. 데마찌, 무시무시한 말이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인력대기소까지 나온 것을 모두 허사로 만들어버리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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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자네 오늘 왜 왔나? 내가 전화 안 했나? 오늘 데마찌 나버렸네, 데마찌. 일이 없어요.” 사무실에 들어온 나를 보자마자 소장이 말했다. “자네도 오늘은 데마찌라서 일 없으니까 돌아가게. 그리고 아까 말했던 거는 내가 잘 처리해줌세.” 소장은 소파에 앉아 있는 노랑머리의 사내에게도 비슷한 말을 했다. 출입문에서 몇 발자국 더 들어와보지도 못하고, 나는 그대로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했다.
‘데마찌라니. 별일이네. 내가 너무 늦게 왔나?’ 그렇지도 않았다. 5시 30분을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망연했다. 별수 있나. 집으로 가는 수밖에.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렸다. 그때 ‘노랑머리’가 다가왔다. 다시 봐도 독특한 인상을 가진 사람이다. 그가 내게 말을 걸었다. “일하러 왔죠? 젊어 보이시네. 따라와보세요. 데마찌 났을 때는 가까이 있는 다른 인력대기소들 돌아보면 돼요. 거기에는 일이 있을지도 몰라요. 7시까지 기다리다 보면 가끔 일이 새로 들어오고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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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건너에 인력대기소가 하나 더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사무실은 휑했다. 한쪽 벽에 언덕처럼 쌓인 가방들이 먼저 우리를 반겼다. 노랑머리와 나, 이렇게 우리 둘을 제외하고는 사무실에 소장 한 명, 서로 속닥거리는 아저씨 두 명뿐이었다. 노랑머리는 소장에게 인사하며 우렁차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희 일하러 왔어요. 젊어서 힘든 일도 잘 할 수 있어요. 철거 같은 일도 잘해요.” 소장은 들은 체도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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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머리가 내게 속삭였다. 질문세례가 이어졌다. “나이가 어떻게 돼요?” ... “군대는 다녀왔어요?” ... “일은 얼마나 해봤어요?” ... 나는 그저 그런 대답을 하며 소장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여기도 일이 없나보네. 하긴 이미 있던 일도 다 나갔을 시간이지. 이제 6시도 넘었으니까.’ 노랑머리는 나의 시큰둥한 반응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제는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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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올해 서른 여섯이에요. 이 일을 시작한 지 10년도 넘었네요. 군대 전역하고 나서부터 뛰어들었으니까요. 그때는 제가 몸이 이러지 않았어요. 지금보다 40kg은 더 나갔어요. 100kg 정도 됐는데, 그게 다 근육이었는데, 힘도 장난이 아니었죠. 남들은 40kg짜리 시멘트 포대 하나씩 들고 다니는데, 저는 두 개씩 어깨에 짊어지고 다니고 그랬죠.
그때 제가 저랑 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체격 가진 애들 모아다가 ‘청년곰방’이라는 사업도 했어요. 무거운 거 짊어지고 계단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젊고 힘좋은 남자들만 모아다가 일하면 이거 노가다판에서 먹힐 만한 사업이다 싶었죠. 그래서 제가 인력대기소란 인력대기소는 다 돌아다니면서 명함 돌리고 그랬어요. 사업 잘 됐죠. 그때 저랑 일하던 애들은 그거로 돈 모아서 자기네들이 사무실도 차렸어요. 지금은 뭐 하면서들 지내나 모르겠네.
아, 혹시 돈 모으려고 이 일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맨날 인력대기소 왔다갔다 하는 것보다도 아예 숙식 제공하는 데서 일하는 게 더 나아요. 저도 다음주부터는 태안으로 가서 화력발전소 짓는 데 투입돼요. 아까 저희 처음 만났던 인력소 있죠? 거기 소장님하고 그거 이야기했어요. 혹시 숙식으로 하실 생각 있으면 소장님한테 이야기해 봐요. 소개비가 있기는 한데, 그거는 나중에 돈 벌어서 드려도 괜찮아요.
사실 저희 아버지가 재산관리만 잘했어도 제가 이런 일 안 해도 되는데, 옛날에 IMF 때 아버지가 주식으로 엄청나게 말아드셨거든요. 저희 아버지가 이건희 회장의 운전기사였어요. 이건희 회장, 지금은 오늘내일하지만, 옛날에는 건강했어요. 그분이 저희 아버지한테 좋은 주식 있으면 추천도 해주고 그랬대요. 아버지가 주식에 재미 붙였다가 결국에는 망했죠. 옛날에 저 어렸을 때 이건희 회장 집에도 가봤어요. 거기서 그 그림도 봤어요. 그게 뭐더라, 무슨 눈물, 이라고 불리는 그거 있죠? 그게 벽에 딱 걸려 있더라고요. 좋아보이대. ...”
노랑머리는 쉬지 않고 말했다. 나와 이야기를 시작한 그 순간부터 이럴 작정이었던 것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대꾸해 주기는커녕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몹시 피곤했다. 자기자랑과 자기부정이 한데 뒤섞인 말들을 쏟아내는 데 그는 막힘없었다. 현재와 대조되는 찬란한 과거에 대한 기억을 늘어놓으며 그는 신명이 났다. 그가 이건희 회장과의 일화를 이야기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의 말을 들어주는 것조차 포기해버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도 따라 일어섰다. 밖으로 나갔다. 담배를 피웠다. 그가 내게 물었다. “그런데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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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째 일이 없다. 가는 날마다 데마찌다. 차라리 소장이 이렇게 말하기를 바랐다. “너는 초보라서 일을 보내기에 마땅치 않다. 차라리 다른 인력소를 알아봐라.” 그렇다면 나도 시원하게 단념하고 다른 인력소를 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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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소장 대신 그의 안사람이 사무실을 보고 있었다. “어쩌죠? 요즘엔 이 근방에 일거리가 별로 없어요. 그나마 조경 작업은 일거리가 조금 나오는데, 조경일을 다녀보는 건 어때요? 하나도 안 힘들어요. 일도 쉽고 금방 배울 수 있을 거예요.” 이날도 결국 데마찌였다. 헛걸음하는 아침이 점점 익숙해진다. ‘조경.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조경뿐인가. 그거라도 갈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런데 어떤 일이지? 말 그대로 경관을 만드는 일인가?’ 유튜브에서 ‘조경’을 검색했다. EBS <극한직업>이 최상단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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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자꾸 데마찌만 나서는 안 된다. 손가락만 빨고 있게 생겼다. 다른 일을 알아봐야 하나. 아르바이트를 주야간으로 두 탕 뛰어야 하나. 처음부터 나한테 노가다는 무리였나. 실제로 일한 것은 딱 한 번 뿐이었지만 벌써 회의감이 든다. 데마찌만 벌써 몇 번째인가...
아니다. 여기 인력대기소가 이상한 곳이다. 다른 인력대기소를 알아보자. 내가 무슨 여기 전속노예도 아니고 이곳만 고집할 이유가 전혀 없지 않은가. 내가 바보였다. 잘해주는 척, 신경써주는 척 하는 모습에 속아넘어가지 말자. 오히려 그런 사람일수록 경계해야 한다. 이제 이곳으로는 발길을 끊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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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봇대마다 눈길이 닿았다. 빨간색, 노란색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었다. 인력대기소 스티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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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마주한 어느 문 앞에 섰다. 떨린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새로운 인력대기소 앞이다. 노크하고 문을 열었다. 소장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일을 좀 해보려고 합니다. 내일부터 나와도 괜찮을까요?” 소장이 대답했다. “그럼요. 사무실은 5시 반부터 여니까, 그때 와요. 일찍 나오시면 일 보내드릴게요. 일단, 일찍 나오기만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