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반이다, 제때 일어나기만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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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terday all my troubles seemed so...”
핸드폰에서 알람이 울려댄다. 언제나 괴로운 소리다. ‘지금이 몇 신데 벌써부터...’ 눈도 뜨지 않은 채 손끝으로 문제의 진원지를 더듬어 찾았다. 재빨리 소리를 차단했다. 숙달된 행동에 따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그대로 다시 얼굴을 베개에 묻던 찰나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오늘은 인력대기소로 첫 출근하는 날, 이라는 사실이 잠결에 떠오른 탓이다. 시간을 확인했다. 4시 40분. 알람이 울리고서 10분이 지나 있었다. 꿈결에 흘려보낸 시간은 빠르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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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인력대기소까지는 가까웠다. 천천히 걸어도 20분이면 닿는 거리였다. 시간은 여유로웠다. 익숙하지 않은 새벽밥을 먹고, 하는 둥 마는 둥 세수를 하고, 평소에는 바르지도 않던 로션과 썬크림을 조심스레 얼굴에 펴바르고, 옷가지를 챙겨입고도 시간이 남았다. 다만 집밖으로 나서기까지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인력소까지 걸어가는 동안에도 계속 스스로를 다독였다. 나 같은 생초보도 받아줄까,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날 때마다 이렇게 속으로 되뇌었다. ‘걱정하지 마라. 정해진 시간에 끝나는 일이란 얼마나 간단하냐.’ 멀리서 동이 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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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일찍 나왔다. 사무실 문은 아직 잠겨 있었다. 시간은 5시 20분. 천천히 준비하고 천천히 걷는다 생각했는데 팔다리는 급했던가보다. 사무실 바로 아래 층에 있는 편의점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곳에는 아저씨 몇 명이 야외 테이블에 모여 앉아 있었다. 일하러 나오신 분들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았다. 차림이 나와 비슷했다. 신발을 보면 더 확실했다. 무겁고 둔해 보이는 그것은 안전화였다. 군데군데 시멘트 자국이 선명했다. 아저씨들은 새벽부터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잠시 후 아저씨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길 건너 누군가를 향해 인사했다. 나도 시선을 돌렸다. 가볍고 편해 보이는 신발, 운동화를 신은 아저씨가 걸어오고 있었다. 안전화를 신은 아저씨들은 운동화를 신은 그를 향해 “소장님”이라고 불렀다. 나는 모른 척, 그가 먼저 사무실로 들어가도록 딴청을 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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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 처음 나왔습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며 소장에게 인사했다. 소장은 무미건조하게 인사를 받았다. 내게 주민등록증과 안전교육이수증을 챙겨왔는지 물었다. 소장은 그것들을 복사하고는, 전화번호를 물었다. 일은 얼마나 자주 나올 수 있는지 물었다. 이어서, 고향이 어딘지, 지금은 어디에서 지내는지도 물었다. 내 주민등록증 주소가 서울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궁금증이 들었나 보다. 내 대답을 듣고는 소장이 말을 이었다. “사실은 안사람 고향이 자네랑 같은 곳이네. 내 고향도 그 근처고.” 여기에 뭐라고 답하면 좋았을까. 나는 다만 놀라움과 반가움이 뒤섞인 듯한 표정과 말투로 대답했다. “오, 그런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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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은 바빴다. 내게는 “저기 소파에 잠깐 앉아서 편하게 기다리고 있게”라고 말하고는 어디론가 계속해서 전화를 돌렸다. 그는 수화기에 대고 이렇게 물었다. “오늘 일 나올 수 있어요?” 그는 똑같은 내용의 전화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아무래도 ‘펑크’가 난 모양이었다. 급하게 일할 사람을 찾는 모양이었다. 수화기에만 이야기하던 그는 나를 향해 말했다. “자네가 동향 사람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내가 오늘은 특별히 책임지고 일 보내줄테니 걱정 말게.” 제발 그 빈 자리를 내가 메우게 되기를 바라며, 나는 소파 한 구석에 초조하게 앉아 있었다. 그 사이 열 명 정도가 사무실에서 일감을 받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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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어쩌지? 오늘은 그냥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은데.” 어디론가 나갈 채비를 하며 소장이 말했다. “예,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죠. 내일 또 뵙겠습니다.” 나는 웃는 얼굴과 아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일은 일이 있을 거예요. 전화 잘 받고요.” 소장이 덧붙였다. 나는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어스름이 자욱하던 거리는 온데간데 없이 사람들로 붐볐다. 출근하는 직장인, 등교하는 학생들로 거리가 바빴다.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내가 돌아갈 곳은 집밖에 없었다. 작업복에 안전화를 신은 채 달리 갈 곳은 없었다. 한숨을 내쉬면서도 발걸음은 가벼웠다. 실망감과 안도감이 뒤섞인 이 마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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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오자마자 방바닥에 누웠다.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도 졸렸다. 부족한 잠이나 채울 심산으로 눈을 감았다. 그때 전화기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지금 다시 사무실로 와요.” 소장이었다. ‘나랑 장난하나.’ 욱하는 마음이 들었다. 나는 1초 남짓 뜸들이던 끝에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금방 갈게요.” 다시 안전화를 신고 밖으로 나왔다. 걸어가기에는 상황이 급해 보였다.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 전화벨이 울렸다. 5분만에 다시 소장이었다. “지금 어디쯤이죠? 사무실 어디에 있는지 알죠? 그 밑에, 그러니까 편의점 앞에 차 세워 놓고 있을 테니까 그리로 와요.” 나는 택시를 불러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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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고차 한 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장은 뒷자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보조석은 비워둔 채 나는 뒷자리에 올랐다. 사이드브레이크를 풀며 소장이 말했다. “원래 현장일이 보통 8시부터 시작인 건 알지? 지금이.. 9시 다 됐으니까, 현장 도착하면 9시 반쯤 되겠네. 일 한두 시간 덜하고 돈은 똑같이 받는다 생각해. 집에서 사무실까지 왔다갔다하느라 힘들었을 테지만.” 그는 이어서 말했다. “현장에서는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현장 사람들 말만 잘 듣고 그대로 하면 욕 먹을 일은 없을 거야. 아, 그리고, 이런 일 얼마나 해봤냐고 혹시나 물으면 몇 번 해봤다고 대답하고.” 알겠다고 확답하며 나는 주섬주섬 작업복을 완전무장하고 있었다. 팔토시를 하고, 손수건을 접어서 이마에 두르고, 목장갑을 꼈다. 봉고차는 어느새 작업장 앞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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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 신축 공사장이었다. 외관은 모두 작업이 끝난 상태였다. 머지않아 주차장이 될 자리에 여러 종류의 자재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 사이를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이 둘 있었다. 30대로 보이는 남자 한 명과 60대로 보이는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다. 할아버지가 나를 반겼다. “가방은 저짝에다 두고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나오면 돼.” 내가 챙겨 입은 옷가지와 안전화가 너무 깨끗한 상태라 작업복처럼 보이지 않나 보다, 라고 생각했다. 건물 1층 어느 방구석에 가방을 두고 나오자 할아버지가 또 말씀하셨다. “내가 아빠뻘 쯤은 돼 보이니까 편하게 말할게. 오늘은 이 아빠 말만 잘 듣고 일하면 돼. 잘해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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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사람은 나까지 총 7명이었다. 60대 할아버지 한 분, 30대 형님 한 분, 건물 뒤편에서 가스배관 작업 중인 40대 아저씨가 둘, 건물 내부에서 미장 작업을 하는 40대 아저씨 아주머니가 각각 한 분, 멀뚱멀뚱하는 나까지 7명이 작업장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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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담장이었던 것들, 그러니까 이제는 제각각의 크기로 조각난 벽돌을 비롯한 폐자재들을 마대에 담아 옮기는 게 내가 첫 번째로 받은 작업이었다. 도대체 얼마만큼 담는 게 적당한 양인지 몰랐다. ‘들 수 있을 만큼’이라는 말은 모호했다. 일단 마대의 절반 정도를 벽돌로 채웠다. 무거웠다. 겨우 들 수 있었다. ‘아빠’가 소리쳤다. “안 돼! 그렇게 많이 채우면 나중에 힘들어서 일 못 해. 적당히만 채워, 적당히.” 그 “적당히”가 어느 정도인지를 안 것은 열 번쯤의 시행착오를 겪은 뒤였다. 이렇게 편한 일을 하고도 일당을 받을 수 있다니.
-마대: 굵고 거친 삼실로 짠 커다란 자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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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의 형님이 ‘아빠’를 나무랐다. ‘아빠’는 착암기로 바닥의 콘크리트를 깨부수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하시면 안 된다니까요! 제가 아까 시킨 대로만 하세요.” ‘아빠’는 아랑곳 않고 대꾸했다. “아니야. 원래 이거는 이렇게 하는 거야. 다른 데서도 다 이렇게 한다니까 그러네.”
-착암기: 바위에 구멍을 뚫는 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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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일한 일당 잘 챙겨 주시라고 사장님한테 잘 말씀해 주세요.” ‘아빠’가 쫓겨났다. 30대 형님이 쫓아냈다. 알고 보니 그는 건축사무소 사장의 아들이었다. 말하자면 ‘작은사장님’이었다. ‘아빠’가 쫓겨난 죄목은 다음과 같았다. 현장에서 작업을 지시하는 대로 따르지 않은 죄, 전날 과음을 했는지 일하면서도 다리를 비틀거리며 걸어다닌 죄. ‘작은사장님’은 내게 말했다. “일은 무조건 현장 지시를 따라야 해요. 현장 사람보다 현장 일을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리고 술 마시고 일하다가는 자칫 사고로 이어질 수 있어요. 일은 항상 조심해야 돼요. 아저씨는 제대로 해 주세요.” ‘아빠’를 쫓아낸 게 못내 아쉬웠지만 그가 한 말은 모두 합당했다. 나는 수긍했다. 다만 한 가지, 나를 “아저씨”라고 부른 것만은 속으로 강력히 부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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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사장님이 나를 불렀다. “아저씨! 이리 와서 ‘나라시’좀 해요. 삽으로 이렇게 이렇게 해서 여기를 이렇게 평탄하게 만들면 돼요.” 내가 마대에 옮겨 담고 남은 벽돌조각들을 삽으로 펼쳐 놓으라는 말이었다. 대답은 시원하게 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계속해서 애먹었다. ‘삽질이라니. 돌덩이에다 삽질이라니.’ 지금까지 일이 너무 쉽다 싶었다. 헛된 일을 두고 ‘삽질’이라 일컫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여긴 어디인가, 나는 누구인가. 보다 못한 작은사장님이 내 옆에 왔다. 다시 방법을 알려줬다. 내가 보기에는 작은사장님도 애먹는 모습이 역력했다. 나는 서툴지만 꿋꿋하게 삽질을 계속했다.
-나라시: 평탄화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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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점심시간이다. 50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아저씨가 나타났다. 건축사무소 사장이다. 말하자면 ‘큰사장님’이다. 작은사장님이 내게 말했다. “곧 점심 시간이니까, 조금 이따 시간 되면 쉬어요. 밥도 시켜 놨어요. 밥 곧 올 거예요.” 큰사장님과 작은사장님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금방 밥이 배달됐다. 백반이었다. 아침에 가방을 두었던 곳을 식당으로 삼았다. 이렇게 먹고 있으니 나도 ‘일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제법 그럴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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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사장님과 작은사장님이 돌아왔다. 작은사장님이 내게 물었다. “아저씨, 식사는 하셨어요? 안 부족하던가요?” 나는 잘 먹었다고 대답했다. 그는 내가 먹고 나서 치운 빈그릇을 보더니 “이 식당 안 되겠네. 2인분 시키면 공기밥 세 그릇 보내 주면서, 1인분만 시키면 딱 한 그릇만 보내주네”라고 혼잣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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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사장님과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를 나눴다. 할 말이 없었다. 그에게 “이것저것 챙겨 주셔서 고마워요”라고 말했다. “제가 뭘 챙겨 줘요. 아무것도 챙겨 준 거 없어요”라고 그가 대꾸했다. 나는 머쓱했다. 그리고는 나에 대한 질문이 줄이었다. 몇 살인지, 몇 학년인지, 전공은 뭔지, 학교는 어딘지, 앞으로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그가 덧붙여 물었다. “학생은 일 시작한 지 얼마나 됐어요?” 그는 나를 이제 “학생”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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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작업도 오전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삽질하고, 건물 내부를 청소하고, 뭐 그런 잡다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작은사장님과 함께 일했다. 몸은 고되지 않았다. 문제는 갈증이었다. 물을 아무리 마셔도 목마름은 끝없었다. ‘이러다 탈수증에 걸리는 게 아닐까?’ 더운 날 물만 많이 마시다가는 탈수증에 걸리기 십상이라고 겁주던 어느 방송이 떠올랐다. 정수기 앞을 지나갈 때마다 물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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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사장님이 잠깐 쉬자고 말했다. 나를 데리고 어디론가 나갔다. 우리는 카페에 들어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이요.” 작은사장님이 주문했다. 새참이었다. 아메리카노가 나올 때까지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자고, 그가 말했다. “우리 옷이 지금 더럽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무슨 죄 지은 것도 아닌데 뭐 어때요. 그냥 앉아서 기다리죠.” 흙먼지 묻은 바지로 그냥 의자에 앉기가 미안했는지 그는 덧붙여 말했다. 의자는 편안했다. 에어컨 바람도 시원했다. 아메리카노가 최대한 천천히 나오기를 바랐다.
카페 종업원은 신속했다. 우리는 카페 밖으로 나왔다. 곧장 한 모금 가득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갈증이 말끔히 사라지는 듯했다. 아메리카노를 이렇게 맛있게 마시기는 처음이었다. 작은사장님도 한 모금 시원하게 마시고 나서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가 커피도 맛있고 괜찮아요. 게다가 테이크아웃으로 주문하면 더 싸게 팔더라고요. 그런데 아메리카노 이거, 사실 원가는 얼마 되지도 않는 건데. 이거 완전 물장사지. 저도 사실 예전에 대학교 졸업하고 나서 카페를 잠깐 운영해 봤거든요. 그래서 잘 알아요.”
작은사장님은 자신의 지난날을 회상하며 내게 말했다. 그는 서울에서 4년제 대학을 졸업했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카페사업을 시작했다. 얼마 못 가서 망했다. 매출이 형편없었다. 임대료나 잘 내면 다행이었다. 사업하겠다는 생각을 접었다. 특히 ‘겉으로나 그럴싸해 보이는 일’에서는 아주 손 뗐다. 한 가지 재밌는 일은, 자신이 철수한 그 카페 자리를 어떤 젊은 사람이 리모델링해서 또 카페를 차렸다는 것이었다. 보나마나한 일이었다. 그 젊은 사람도 얼마 못 가 장사를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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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일은 다 끝났다. 삽질하거나 먼지 뒤집어쓰는 일은 다했다. 그래도 일거리는 항상 있다. 건물 외벽을 청소했다. 말라붙은 시멘트 자국을 긁어내는 일이었다. 사다리로 2층 높이까지 올라가야 했다. 처음에는 작은사장님이 사다리를 탔다. 나는 밑에서 사다리만 잡았다. 사다리가 흔들려서 행여나 작은사장님이 떨어지면 크게 다칠 수 있다, 라는 표면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그게 더 편했기 때문이었다.
편한 시간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이번엔 내 차례였다. 스물여섯살이 되도록 사다리라고는 5칸 넘게 올라가 본 일이 없었다. 사다리 하나만을 의지한 채 2미터는 족히 넘는 높이에 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아찔하고 무서웠다. 피가 다 발바닥으로 쏠리는 것 같았다. 머릿속은 이미 창백했다. 벽에 말라붙은 시멘트를 어떻게 긁어냈는지 모르겠다. 내 신경은 온통 발바닥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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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리에서 내려오며 꿈결 같은 장면을 보았다. 발끝에만 두던 시선을 사다리 너머로 고정시켰다. 사실은 추한 모습이지만 내게는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졌다. 가스배관 작업을 하던 아저씨 한 분이 어느 한 구석에서 벽에다 오줌을 누고 계셨다. 청바지 뒷주머니에 꽂힌 스마트폰에서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이문세의 <옛사랑>이었다. ‘남들도 모르게 서성이다 울었지. 지나온 일들이 가슴에 사무쳐...’ 작업장의 상황이 이문세의 목소리와 <옛사랑>의 가사와는 조화될 만한 구석이 단 한 점도 없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조화적인 상황이 창조해 낸 그 분위기란 가히 몽환적이었다. 아마도 내가 사다리 위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었기에, 그래서 머릿속이 멍해졌기 때문에 잠깐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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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팔트 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를 식히기 위해 호스로 물을 뿌렸다. 호를 그리며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 사이로 무지개가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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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일이 몇 시에 끝나는지 알죠? 원래는 5시에 끝나야 하는데, 오늘 한 시간 넘게 늦게 오셨으니까 조금만 더 일하고 가셔야 하지 않을까요?” 작은사장님이 말했다. 군말 없이 따랐다. 이것저것 정리하는 일을 도왔다. 한 시간은 또 언제 지나가나, 라는 생각에 지루했다. 정리하는 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바쁘지 않으면 저녁밥이나 먹고 들어가라고, 작은사장님이 내게 말했다. 야간작업도 하지 않는데 저녁밥까지 현장에서 챙겨 준다는 말을 나는 들은 적이 없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우리 둘은 근처 김밥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제육덮밥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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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라도 우리가 밖에서 마주치게 된다면, 제 얼굴 기억할 수 있겠어요? 오늘 동생이랑 일하면서 오랜만에 재밌었어요. 혹시라도 다음에 일할 곳 필요하면 연락해요. 지금 준비하는 일들 다 잘될 거예요. 잘 들어가요.” 작은사장님이 덕담을 아끼지 않았다. 처음에는 “아저씨”였다가, 잠시 동안은 “학생”이었다가, 이제는 “동생”이라고, 그는 나를 호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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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는 목수였다. 지금 내 나이보다, 스물여섯보다 어린 나이에 현장 일을 시작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도 목수로서 활동하셨다. 나의 유년시절을 회상할 때 아버지는 언제나 딱딱한 어깨와 큰 알통을 가지고 무언가를 뚝딱뚝딱 만들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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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떨결에 일을 다녀왔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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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수수료는 일당의 10%예요. 오늘처럼 일당이 11만원이면 그 10%인 11000원이 수수료가 되는 거죠. 그런데 오늘 처음 일 나오신 거고, 고향도 저랑 같다고 하시니까 수수료는 1000원 떼고 1만원만 받을게요. 또 나와요. 전화오면 잘 받고요.” 인력대기소 소장의 아내가 내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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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당 11만원. 수수료 1만원.
순수익(?) 10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