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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광 Jul 26. 2016

신호수, 도로 위의 지휘자

자동차들은 내 손짓에 따라 멈추고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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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등장인물
-나: 26세 남자. 대학교 졸업반. 취업준비중. 노가다 초보. 현장 경험은 딱 하루뿐. 처음 나갔던 인력대기소에서는 ‘데마찌’만 당함. 결국 다른 인력대기소로 옮겨감. 그곳이 ㅅ인력대기소.
-권한화(가명): 29세 남자. 공대를 졸업하고 곧장 대기업에 취직했지만 일이 많고 힘들어서 얼마 못가 퇴사. 현재 취업준비중. 노가다를 시작한 지는 이제 2주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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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그리고 자네, 신분증.” 새로운 인력소에서도 데마찌를 당하면 어떻게 하나, 라며 마음만 태우던 중, 인력소장이 나와 다른 젊은 남자(권한화)의 신분증을 요구했다. 소장은 두 장의 신분증을 앞뒤로 A4종이 한 면에 복사했다. “이리 와 보세요.” 소장이 우리를 불렀다. 그는 모니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화면에는 다음지도가 켜져 있다. “여기가 현장이에요. 000번 버스 타고 OOOO에서 내리면 바로 앞에 공사장 보일 거예요. 6시 50분까지 가면 돼요. 현장에 도착하면 이 번호로 전화해요. 현장소장 번호예요.” 인력소장은 신분증을 복사한 종이에 현장으로 가는 교통편, 현장에 도착해야 하는 시간, 현장소장의 전화번호를 메모했다. 그리고 오늘 내가 맡게 될 일을 간단히 소개했다. “오늘은 어려운 일 아니고, 공사장 옆에서 ‘신호수’만 하면 돼요. 차 세우고, 차 보내고, 간단해요. 자세한 설명은 거기 현장소장한테서 들어요. 일당은 현장에서 받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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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버스를 탔다. 현장으로 가는 동안에도 나와 권한화(29)는 별로 이야기 나눌 거리가 없다. 현장에 도착한 시간은 6시 30분. 예정보다 일찍 왔다. 우리는 담배부터 피웠다. 서로 주고받은 말보다 내뿜은 담배연기가 더 많았다. 나는 어느 미국 시인의 명언을 떠올린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무언가를 하고 있다고 믿는 것은 담배로 인해 경험하는 첫 번째 환상이다.’ - 랄프 월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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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한화가 현장소장에게 전화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ㅅ인력에서 사람 부르셨죠? 지금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곧 현장소장이 나타났다. “아직 아침 안 먹었지? 일단 밥부터 먹고 와. 저기 길 건너가면 숯불갈비집 있는데, 거기서 식사하고 와. ㄷ건설에 일하러 왔다고 말하면 밥 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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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람은 식탁을 나눠 쓰면서 서로를 알아간다. 나와 권한화도 그랬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권한화의 나이는 29세, 지금은 백수다. 그는 공대를 나왔다. 정확히는 산업공학과를 전공했다. 취업은 잘 됐다. 졸업하자마자 대기업에 들어갔다. 굴지의 한화. 어떤 부서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는 내게 말해 주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들어간 곳은 일이 많았다. 밤마다 일했다. 주말에도 출근했다. 이건 사람 사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퇴사했다. 막상 회사를 나왔더니 몸은 편했지만 마음이 조급했다. 통장잔액도 하루하루 줄었다. 모아둔 돈은 얼마 없었다. 그나마도 점점 바닥을 보였다. 직장을 구하기 전에 뭐라도 해야 했다. 그래서 노가다를 시작했다, 라고 권한화는 말했다. 식당 텔레비전에는 어제의 프로야구 결과가 나오고 있었다. 한화가 기아에게 12대 1로 패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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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소장이 우리에게 안전모와 안전조끼 그리고 교통신호봉을 건넸다. 안전조끼의 형광색이 햇빛에 도드라졌다. 현장소장은 우리를 공사장 옆 좁은 도로로 데려갔다. 그는 ‘천천히 SLOW’라고 적힌 입간판을 꺼내 길가에 세웠다. 어떻게 일하면 되는지 우리에게 1분 동안 설명했다.
 
교통신호수 역할은 간단했다. 한 명은 큰길 입구에 서 있고, 나머지 한 명은 작은길 어귀에 서 있어라. 오늘 하루 종일 ‘레미콘’ 차가 작은길을 오갈 거다. 펌프카도 큰길에서 작은길로 이어지는 그 입구에 계속 주차되어 있을 거다. 때문에 한 대의 차량만 도로를 오갈 수 있다. 길이 복잡해질 거다. 큰길에서 작은길로 들어오는 차가 무조건 우선권을 갖는다. 만약 큰길에서 차가 들어오면 작은길에서 큰길로 나가는 차를 세워라. 큰길에서 작은길로 들어오는 차가 없을 때만 작은길에서 큰길로 차를 내보내라. 작은길에서 큰길로 레미콘차가 나갈 때에는 큰길에서 작은길로 들어오는 차가 없도록 막아라. 레미콘차가 나간 후에 큰길에서 작은길로의 진입을 허용해라.
 
-레미콘: Ready Mixed Concrete. 일본에서 줄여 만든 말. 건설 현장에서 곧바로 쓸 수 있도록 차 속에서 미리 뒤섞은 굳지 않은 상태의 콘크리트, 혹은 이것을 나르는 차를 일컫는다.
-펌프카: 콘크리트를 강력한 펌프의 압력으로 파이프와 호스를 사용하여 압송하는 장비. 주로 터널공사, 항도, 고층건물, 협소한 장소 등에서 콘크리트를 시공하는 데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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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작은길을 맡고, 권한화가 큰길을 맡았다. ‘큰길에서 들어오는 차가 무조건 우선권을 갖는다.’ 이 말을 계속해서 속으로 되뇌었다. 손에 쥔 교통신호봉이 어색했다. 이 물건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나, 기억을 더듬었다. 공사장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교통경찰이 교통신호봉을 들고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떠올렸다. 한 손으로는 빨간 봉을 흔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손짓하며 차를 보내거나 멈춰 세우던 그들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렸다. 딱히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내가 그 일을 하려니 하나하나 걱정만 앞섰다. 더군다나 운전면허증도 없고 당연히 운전 경험도 없는 내게는 교통신호수라는 일이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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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길에서 큰길로 이어지는 입구에 레미콘차 한 대가 섰다. 길이 차 한 대만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좁아졌다. 큰길에서 작은길로 들어오는 차를 발견하고, 나는 작은길에서 큰길로 나가는 차를 세웠다. 내가 신호하는 대로 차가 멈췄다. 큰길에서 작은길로 차가 다 빠져나간 후, 작은길에서 큰길로 나가는 차에게 ‘이제 나가도 좋다’는 손짓을 했다. 내가 손짓한 대로 차가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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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경찰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하루 일하러 나온 사람일 뿐이다. 그런데도 운전자들은 나의 손짓에 따라 멈추기도 하고 움직이기도 한다. 아우디도 벤츠도 에쿠스도 예외는 아니다. 안전모를 쓰고 안전조끼를 입고 빨간 교통신호봉을 쥔 나의 손짓을, 운전자들은 따른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모든 운전자들에게 일종의 명령을 내리는 셈이다. ‘내 손짓을 따라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위험한 상황을 맞닥뜨릴지도 모른다. 그런 위험을 예방하고 싶다면 나의 손짓대로 행동해라.’ 안전을 담보로 하여 작은 권력이 내게 주어진 것이다. 여기엔 책임이 따른다. 행여나 잘못된 손짓으로 인해 사고라도 난다면 나는 그 사고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교통신호수는 ‘도로 위의 지휘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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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 시간대라 도로는 분주했다. 레미콘차도 많이 오갔다. 싣고 온 레미콘을 펌프카에 모두 부어낸 후에야 그 육중한 차는 좁은 골목길에서 방향을 바꿔서 왔던 길을 돌아갔다. 레미콘차가 골목길에서 방향전환을 시도할 때마다 나는 더욱 예민해졌다. 대개의 레미콘차 기사들은 다른 차량들을 배려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통행이 최우선인 듯이 운전했다. ‘나는 내 갈 길을 간다. 너네가 알아서 피해라.’ 이런 식이었다. 딱딱하고 육중한 대형차에서 다른 차량들을 내려다보기 때문에 레미콘차 기사들은 거만해져버린 것일까, 라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아야만 하루 일을 제때 끝마칠 수 있는 것인가, 하고 그들의 행동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하마터면 레미콘차와 택시가 맞부딪칠 뻔했다. 사건은 이랬다. 레미콘차는 골목길에 후진해서 큰길로 돌아나갈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택시 한 대가 이미 큰길에서 작은길로 들어왔다. 택시가 이 좁은 길에서 빠져나가야 레미콘차가 더 수월하게 큰길로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판단했다. 레미콘차에게 멈추라고 신호하고, 택시에게는 어서 작은길로 빠져나가라고 손짓했다. 택시가 내 손짓대로 움직였다. 그런데 레미콘차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육중하게 무작정 앞으로 나왔다. 놀란 택시 기사가 경적을 울리며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레미콘차는 천천히 멈췄다. 큰 차와 작은 차가 마주본 상태로 서로 꿈쩍도 않았다. 레미콘차 기사는 내게 짜증을 냈다. 나는 택시 창문을 노크했다. 택시 창문이 내려갔다. 택시 기사에게 양해를 구했다. “죄송합니다. 한 번만 도와주세요. 잠시만 저쪽 길가로 차를 옮겨 주세요.” 택시기사는 역정을 냈다. “난 안 가! 못 가! 저, 저 나쁜 새끼. 멈추라고 신호했는데 왜 나오고 지랄이야.” 나는 택시 기사에게 거듭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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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신호수랍시고 서 있는 내가 도리어 ‘사고유발자’는 아닌지, 스스로를 의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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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위를 오가는 모든 운전자들은 바쁘다. 신호등에 빨간불이 들어온 것도 아닌데 멈춰야만 하는 상황은 이들에게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다. 일단 자기까지는 지나가도록 해 줘야 한다. 지금 바쁜 일이 있기 때문이라는 게, 세우더라도 뒷차부터 세우라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이런 사람들 앞에서 빨간 교통신호봉을 흔들어댄다는 것은 들리지 않는 수많은 욕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루종일 얼마나 많은 이들이 썬팅된 창문 너머로 나를 보며 투덜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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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멈춰 세울 때마다 운전자를 향해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불편하더라도 조금만 참아달라, 내 말을 따라줘서 고맙다, 라는 의미였다. 대부분은 내가 인사를 하거나 말거나 무시했지만, 더러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손짓으로 나의 인사에 화답했다. 그나마도 고마웠다. 덕분에 인상 쓰지 않고 일할 수 있었다. 만약 내가 인상 쓴 얼굴로, 운전자와 얼굴도 마주치지 않고, 손짓만으로 서라 가라 한다면, 여기에 서운하지 않은 사람은 몇이나 될까. 가는 표정이 고와야 오는 표정도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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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가다판에도 엄연히 점심시간이라는 게 있다. 12시부터 1시까지. 밥 먹고 남는 시간에는 잠을 자도 좋다. 그러나 교통신호수로 일하는 경우라면 사정이 다르다. 도로는 쉬지 않는다. 자동차는 도로 위를 계속해서 오간다. 현장소장이 권한화 대신 일하는 동안 권한화는 밥만 급히 먹고 돌아왔다. 10분 남짓 걸렸다. 권한화가 내 대신 일하는 동안 나도 밥만 먹고 허겁지겁 돌아왔다. ‘교통수신호는 원래 이렇게 점심시간도 제대로 없이 일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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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와 차도가 분리되어 있지 않은 좁은 길의 풍경. 길에 자동차와 중장비와 어른과 아이가 함께 다닌다. 노란 유치원복을 입은 아이들이 두 명씩 짝지어 손 잡고 줄줄이 유치원 교사를 따라 길가를 걸었다. 그 옆으로 레미콘차와 덤프트럭이 지나갔다. 몰인정한 소음이 아이들을 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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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같은 자리에 서 있으려니 죽을 맛이다. 시간이 정지한 듯 싶다. 지루하다. 이 좁은 길로 자동차는 뭐 이리도 많이 다니나. 신경이 곤두선다. 빵냄새와 고기냄새와 시멘트냄새가 거리에 뒤섞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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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팔트 위에서 나의 그림자가 한 바퀴 돌았다. 하루 일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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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당 11만원. 수수료 11,000원.

순수익(?) 9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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