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은 해체하고, 잡부는 정리한다.
등장 인물
문광 (26세. 대학생 및 막일꾼)
김노근 (36세. 막일꾼 경력 1년)
박석태 (55세. 막일꾼 경력 10년)
-이상 잡부 3인방
인력소장 (56세. ㅅ인력대기소 대표)
현장소장 (44세. 건축사무소장)
마을 주민 A
마을 주민 B, C, D
마을 주민 E
때 : 2016년 여름
#1. ㅅ인력대기소
-새벽 5시 30분. 문광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다. 인력소장에게 인사한다. 앉을 곳을 찾는다. 빈자리가 몇 개 없다. 아무데나 앉는다. 문광이 ㅅ인력대기소에 출근하는 건 이번이 2번째다. 낯익은 얼굴이 있을 리 없다. 20개 남짓의 소파에는 아직 잠이 덜 깬 혹은 새벽부터 거나하게 약주를 하고 나온 막일꾼들이 앉은 채 저마다 생각에 잠겨 있다. 인력소장으로부터 ‘오더’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문광이 시선을 둘 곳은 스마트폰 뿐이다. 그러나 그의 모든 신경은 인력소장에게 향해 있다. 인력소장이 자신을 불러 주기를, 문광은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인력소장: 박석태 씨, 신분증. 자네, 신분증. 그리고 자네도 신분증.
박석태: (말 없이 지갑에서 신분증을 꺼내 인력소장에게 건넨다.)
김노근: (모자를 벗었다 다시 쓰며) 여기요.
문광: (밝은 표정으로) 예, 여기 있어요.
인력소장: (세 장의 신분증을 복사기에 올린다.) 여기로들 와 봐요. (모니터에 띄운 다음지도를 가리키며) 오늘 현장은 ㅇㅇ동이에요. 박석태 씨는 전에 여기에 가봤죠? 그럼 위치는 잘 알겠네요. 그래도 위치 설명할게요. 여기 사무실 앞에서 000번 버스를 타요. 그리고 ㅁㅁ정거장에서 내려요. 거기서 조금만 앞으로 걸으면 오른쪽에 길이 나올 거예요. 조금만 걷다 보면 사거리가 나와요. 거기서 또 오른쪽으로 가요. 그러면 가까이에 공사장 하나가 보일 거예요. 거기가 오늘 현장이에요. 아마 철거 작업을 도울 거예요. 6시 30분까지 도착하면 돼요. 이게 거기 현장소장 번호예요. 현장에 도착하면 그 번호로 전화해요.
#2. ㅅ인력대기소 앞 버스정류장
김노근: 일은 많이 해봤어요?
문광: 이번이 세 번째예요. 일하면서 하나하나 배우고 있어요.
박석태: 씨바, 버스는 왜 이렇게 안 와.
김노근: 나이가 어떻게 돼요?
문광: 26살이에요.
김노근: 되게 젊으시네. 아르바이트로 노가다 하는 거예요?
문광: 네. 시급 6030원 받으면서 다른 아르바이트 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 것 같아요. 노가다 하루 하면 다른 알바 이틀 일한 거랑 비슷하게 받잖아요.
김노근: 뭐, 그렇죠. 저는 작년 여름부터 이 일 시작했어요. 그런데 일 나갈 때마다 느기는 건데, 노가다는 제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아요.
박석태: 씨바, 이제 버스 오네. 가자.
#3. ㅇㅇ동 빌라 공사장, 오전 작업 시작
문광, 김노근, 박석태: (현장소장을 발견하고) 안녕하세요.
현장소장: 안녕하세요. 다들 식사 안 하셨죠? 일단 아침밥부터 먹고 오죠. 식당은 바로 이 앞이에요.
박석태: 오늘 무슨 일 해요?
현장소장: 일단, 여기에 건물이랑 건물 사이에 버려져 있는 목재들부터 정리하고, 그 다음에는 아시바 철거한 것들 한곳에다 옮길 거예요.
김노근: 아... 아시바 철거... 밥 든든하게 먹고 시작해야겠네요.
문광: (대화에 끼지 못하고 듣기만 한다.)
#4. 오전 7시, 같은 공사장
박석태: 일단 여기 쌓여 있는 나무들부터좀 치우자. 못이 많이 박혀 있거든? 우리 서로 조심하면서 일하자. 다치지 말자고.
문광: 예, 알겠습니다~
박석태: 소장님! 그런데 이 나무들 다 어디다 쌓아 둬요? 길이 좁아서 아무데나 쌓으면 안 될 것 같은데.
현장소장: (고민하다가) 저기 저 흰색 차 앞에다가 쌓아요. 나무더미랑 차 사이에 합판이라도 세워서, 차 긁히는 일 없도록 신경 써 주세요. 아주, 저 차주 성격이 지랄맞아요. 골치 아파.
-문광, 김노근, 박석태는 바닥에 버려진 목재를 줍고, 그것을 옮기고, 한곳에 쌓았다. 같은 일을 계속해서 반복한다.
#5. 철골의 안전판(혹은 공중의 공사장)
-현장에는 문광, 김노근, 박석태, 현장소장 외에도 세 사람이 더 있다. 이들은 건물을 빙 두른 철골의 안전판 위에 발 딛고 있다. ‘아시바’ 기공이라고 불리는 자들이다.
-아시바(あしば)란 건물 외벽 주위를 빙 둘러 세워진 철골을 일컫는다. 우리말로 하면 ‘디딤새’ 정도에 해당한다. 한자로는 비계(飛階, 공중에 뜬 계단). 영어로는 scaffold. 이것을 세우거나 철거하는 게 아시바 기공들의 임무다. 이들 없이는 외벽 작업이 불가능하다. 외줄 하나에 의지해서 고층빌딩의 창문을 닦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건물 외벽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발 디딜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오늘 아시바 기공들이 하는 일은 철거작업이다. 건물을 빙 둘러 감싼 철골과 안전판을 해체하는 것이다. 문광은 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했다. 그저 밑에서 위를 올려다 보는 것만으로도 고소공포를 체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문광은 새삼 깨달았다.
#6. 쇳덩이 비가 떨어지는 지상의 공사장
-‘깡- 까가강-’ 20미터도 넘는 높이에서 쇳덩이가 떨어진다. 아시바 기공들이 ‘아시바클립’과 발판, 쇠파이프를 해체하고 있다. 땅바닥에 부직포 더미를 깔아 놓고 그 위에다 쇳덩이들을 떨어뜨리는데도 소음이 엄청나다.
-아시바클립은 쇠파이프와 쇠파이프를 엮는 물건이다. 일종의 관절 역할을 하는 건축자재다. 수직으로 교차하는 쇠파이프를 아시바클립으로 엮으면 웬만한 충격에도 끄떡 않을 정도로 견고하게 고정된다.
박석태: 야, 막내야. 얼른 나와라. 씨바, 저거에 맞으면 대가리에 빵꾸난다. 예전에 일하면서 어떤 사람이 저거에 맞는 거 봤다. 피 철철 나고 난리도 아니었어. 조심해야 돼.
문광: 예, 조심해야겠어요.
김노근: 소장님, 여기 안전모 같은 거 없어요? 그냥 일하기 무서운데...
현장소장: 안전모가 여기 어디에 있는 것 같았는데 안 보이네요.
김노근: 저 위에 있는 사람들 믿고서 일하는 수밖에 없겠네요. 이거 무서워서 일을 어떻게 하죠?
#7. 참을 수 없는 공사장의 소음
-소음이 온 마을에 울려 퍼졌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거리마저 좁아서 소음에 시달리는 사람의 수는 헤아릴 수 없었다. 왼쪽, 오른쪽, 뒤로 인접한 빌라에서 지내는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한번씩 소음이 퍼질 때마다 창문이 흔들렸다. 참다 못한 주민들이 현장을 찾아왔다. 하나같이 현장소장을 찾았다. 아래는 현장소장을 찾아온 사람들이 한마디씩 한 말들.
마을 주민 A: (술을 마셔서 빨개진 얼굴로) 여기 관리감독 하시는 분이세요? 밤에 일하고 들어와서 이제 잠좀 자려는데 시끄러워서 도저히 못 자겠어요. 도대체 작업 언제 끝나요?
마을 주민 B: (분노가 가득한 얼굴로 나타나서 주차된 자동차 주변을 사진 찍는다.) 주차해 놓은 차 앞에 이렇게 자재를 쌓아 두면 어떻게 해요? 지금까지 제가 몇 번을 말해요. 이렇게 하시지 마시라구요. 안 되겠네, 말도 안 통하고. 신고해야겠네. 민원 넣어야겠네요. 완전 작업을 무대뽀로 하시네. 아니, 그리고 왜 또 전화는 안 받아요?
마을 주민 C(B의 남자친구): 내 여자친구한테 왜 반말하세요? (여자친구인 마을 주민 B에게) 어차피 말 안 통하는 사람들이야. 신고해 그냥.
마을 주민 D(C의 아버지): 내가 공사하기 전에 전화 달라고 했어요, 안 했어요? 당신 정말 이렇게 할 거야? 누가 시끄럽다고 뭐라 했어? 왜 차 앞에 이렇게 막 나무들 쌓아 두고 그러냐고. 만약에 이것들 차에 쏟아지기라도 하면 당신이 물어낼 거야?
마을 주민 E(공사장 건물 바로 뒤 건물 1층에서 거주하는 아주머니): (주방 창문을 벌컥 열며) 도대체 언제 끝나요? 너무 시끄러워서 미쳐버리겠어요.
#8. 아침 새참
-바나나우유와 대보름빵. 아침밥이 채 소화되기도 전에 새참을 먹는다. 문광은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일단은 먹는다.
현장소장: 예전에는 여기 바로 옆에 있는 슈퍼에서 새참 사오고 그랬는데, 이제는 저기 멀리에 있는 편의점까지 가서 사 와요. 아까 자기 자동차 다치면 어쩔 거냐면서 성낸 사람들 있죠? 여기 바로 옆에서 슈퍼 하는 사람들이에요. 주자창도 아닌 곳에 불법주차 해 놓은 게 누군데 어디다 성질 내는 건지 모르겠어.
문광: 원래 이렇게들 민원이 많이 들어와요?
현장소장: 어제도 몇 번이나 민원 들어왔어요. 아주 골치가 아파.
#9. 여전히 내리는 쇳덩이 비
-쇳덩이 비는 오전 내 내렸다. 민원이 들어와도 작업을 당장 중지할 수는 없는 노릇. 일단은 시끄럽더라도 최대한 빨리 끝내는 방법밖에는 없다, 는 것이 현장소장의 지론이다. ‘어차피 민원은 들어온다. 공사는 계속되어야 한다. 시끄러운 작업일수록 빨리라도 끝내서 소음으로 인한 피해를 최단시간으로 만드는 것밖에는 답이 없다.’
-잡부 3인방(문광, 김노근, 박석태)은 쇳덩이 비가 한차례 내리고 지나간 곳에서 작업을 시작한다. 안전판을 주워다 한곳에 쌓아두는 것, 클립을 마대에 담는 것, 쇠파이프를 옮겨다 한곳에 모아두는 것. 노가다의 핵심은 단순작업의 무한반복.
-건물주가 나타났다. 그냥 할아버지다. 건물주가 현장소장과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한다. 박석태는 더 열심히 일하기 시작한다. 가령, 두 개씩만 옮기던 것을 갑자기 한 번에 세 개씩 옮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건물주가 사라지고 나서야 박석태는 그 이유를 밝혔다.
박석태: 씨바, 이제 살살들 일해. 아까 건물주 왔을 때 발판 세 개씩 업어매고 다니면서 열심히 일하는 모습 보여 줬으니까 이제 두 개씩만 들고 다녀. 계속 세 개씩 들고 다니면 나중에 몸이 퍼져서 일 못해. 어쨌든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다, 라는 걸 한번씩 보여주는 게 필요해.
#10. 점심 시간
-12시, 아침밥을 먹었던 곳에서 점심을 먹는다. 메뉴는 생고기비빔밥.
-1시까지는 쉬는 시간이다. 박석태는 스티로폼을 주워다가 땅바닥에 깔았다. 이것을 침대 삼아 박석태는 누웠다. 김노근과 문광은 한구석에 앉아서 이야기한다.
김노근: 하, 오늘 일 힘들죠?
문광: 예, 쉽지가 않네요.
김노근: 아무래도 인력소장이 나를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아. 일도 꾸준히 못 나가고 그러니까 힘든 현장으로만 나를 보내는 것 같아.
문광: 일주일에 얼마나 일하시는데요?
김노근: 3~4일은 일하죠.
문광: 그 정도면 많이 하시는 거 아니에요?
김노근: 아니에요. 많이 일하시는 분들은 거의 매일같이 인력소 나와요.
문광: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구나...
김노근: (혼잣말로) 나는 노가다 체질은 아닌 것 같아. 노가다는 내 적성에 안 맞아.
박석태: (스티로폼 위에 누워서 담배를 피우며) 씨바, 누가를 하고 싶어서 하냐? 다들 어쩔 수 없으니까 하는 거지.
-현장소장이 나타난다. 아직 1시가 되려면 20분도 더 남은 시간이다.
현장소장: 이따가 지게차랑 화물차가 3시쯤 온다니까 작업을 조금 더 일찍 시작해야 할 것 같아요. 얼른 끝내야 하니까요. 미안해요. 아직 점심 시간도 다 안 끝났는데, 부탁드립니다.
-잡부 3인방은 천천히 일어난다. 문광과 김노근은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턴다. 셋은 목장갑을 낀다. 오후 작업이 시작된다.
#11. 오후 작업
-오전에 하던 일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다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몸이 오전보다는 더 피로하다는 것이다. 무거운 것을 계속 옮기고 있자니 죽을 맛이었다. 문광은 박석태가 담배 피우는 시간마다 그 옆에 섰다. 그때마다 쉬는 시간이었다.
-아시바 해체작업은 다 끝났다. 기공 아저씨들은 짐을 챙겨서 다른 현장으로 떠난다. 남은 것은 무수한 쇠파이프와 아시바클립 뿐이다. 이 모든 것은 잡부 3인방이 해치워야 할 일이다.
-땡볕이 내리쬔다. 쇠파이프에서도 열기가 전해진다.
-잡부 3인방은 일을 계속한다. 노가다, 단순작업의 무한반복.
#12. 기다리는 폐기물차는 안 오고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일이 끝나간다. 길가에는 쇠파이프 무더기, 발판 더미, 아시바클립 꾸러미, 목재 더미 등이 제각기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다.
-지게차가 와서 한쪽에서 대기한다. 곧 대형 화물차 한 대가 왔다. 여기다 돈이 될 만한 물건들을 싣는다. 제기차가 두 팔을 뻗어 쇠파이프 무더기와 발판 더미와 아시바클립 꾸러미 등을 화물차에다 올려 놓는다. 대형화물차가 갸우뚱 기운다.
-아직 버려야 할 것들이 남았다. 목재 더미와 부직포 뭉치와 쓰레기 포대들. 1톤 트럭으로도 최소 두 번은 실어야 할 양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직 폐기물차는 오지 않았다. 잡부 3인방은 손을 놀리며 폐기물차를 기다린다.
현장소장: 폐기물차가 얼른 와야 할 텐데, 안 오네요. 그동안 저기서 나라시 작업이라도 하고 있죠.
#13. 수고하셨습니다
-폐기물차에 두 차례 쓰레기를 실었다. 두 번 다 만차였다. 저걸 언제 다 치워 뒀나, 문광은 생각했다.
-일이 끝났다. 현장소장이 박석태에게 3명분의 일당을 준다. 잡부 3인방과 현장소장은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다.
박석태: 다음에 또 오면 그때는 일 열심히 할게요.
현장소장: 오늘도 잘 해주셨는데요 뭘. 들어가세요.
문광, 김노근: 안녕히 계세요. 수고하셨습니다.
#14. 다시 ㅅ인력대기소로
-버스정류장을 향해 잡부 3인방이 걷는다. 박석태가 나머지 두 명에게 일당을 나누어 준다.
박석태: 자, 13장씩. 총 39만원 받았어.
문광: 오, 지금까지 일당으로 11만원씩만 받다가 13만원은 처음이에요.
김노근: 오늘 일이 힘들었으니까 13만원은 받아야 맞아요.
문광: 그러면, 이렇게 13만원 받으면 인력소에 수수료는 얼마나 내야 돼요? 10%니까 13000원 내면 되나요?
박석태: 응, 그래야지. 현장에서 일당 얼마 받는지 인력소장이 모를 것 같지? 다 알고 있어. 1~2천원 아깝다 생각하지 말고 수수료 제대로 내야 돼. 그래야 다음에 또 일 받지.
#15. 조심히 들어가세요
-잡부 3인방은 인력소에서 수수료를 정산하고 헤어진다. 수수료를 받을 때 만큼은 인력소장의 얼굴에 행복이 묻어 나왔다.
인력소장: 오늘 수고들 했어요. 내일 또 나와요.
-인력소 밖으로 나와 잡부 3인방은 간단히 인사를 나눈다.
문광: 오늘 두 분 덕분에 제가 다치지 않고 일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조심히들 들어가시고, 푹 쉬세요.
-잡부 3인방은 집으로 향한다. 10시간을 함께 있었지만 끝내 서로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 다시 만나더라도 이들은 결코 서로의 이름을 묻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