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다고 마음까지 가난해지지 말고, 계속 꿈꿀 것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 전학을 갔다. 엄마 손을 잡고 내가 다닐 초등학교에 처음 들렀을 때가 아직도 생생하다. 흙먼지 날리는 운동장, 소박한 낡은 건물, 놀이터 안쪽엔 커다란 소나무에 그네가 매달려 있었다. 민속촌에나 가야 볼 수 있을법한 그런 그네였다. 까마득한 높이가 무섭지도 않은지 아이들이 그네를 타고 놀고 있었다.
전학 첫날, 나는 하늘색 원피스에 하늘색 리본 핀을 하고 당차게 인사했다. 흰 피부에 표준말씨를 쓰는 나를 아이들은 신기하게 바라봤다. 적극적이고 밝은 성격으로 금세 적응한 나는, 초등학교 내내 반장을 도맡아 하며 소나무 그네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체육관이 들어서는 과정을 함께했다.
아이들은 공부를 잘하는 나, 번쩍번쩍 손을 드는 나, 아파트에 사는 나, 자주 옷이 바뀌는 나를 부러워했던 것 같다.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위축된 구석 하나 없이 참 빤딱빤딱했다. 상장 모아둔 파일이 뚱뚱했다. 담임 선생님께서 자리를 비우실 때면, 다른 애들더러 조용히 하라며 교탁 위 종을 땅땅 두드리기도 했다.
중학교 3학년쯤이었을까. 늘 회사에 계시느라 함께 보낸 시간이 적었던 무뚝뚝한 아빠가 낮에도 집에 머무르셨다. 마침 방학을 맞이한 나는 방에 콕 박혀 그런 아빠를 불편해했다. 어른들의 사정은 잘 몰랐지만, 뭔가 일이 틀어진 것 같았다. 밤에 거실에 있는 컴퓨터를 쓰러 몰래 나갔다가 잠든 아빠의 부득부득 이 가는 소리를 들었다.
집에 모르는 어른들이 들이닥쳤다. 하필 집에 나 혼자 있을 때였다. 어른들은 멋대로 들어와서 온 집을 헤집고 우리 집 소파에, 에어컨에, 빨간 딱지를 붙이고 사라졌다. 빨간 딱지가 나에게도 붙은 것 같았다. 어깨가 움츠러든 채 어른이 됐다. 혼자 타지에 나가 대학에 입학했다.
사람들은 신기할 만큼 위축된 사람의 냄새를 잘 맡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길거리에서 굳이 나를 택해 말을 거는 포교자들이 징그럽게 느껴졌다. 타인이 준 상처보다 마음에 남은 건, 가난에 침체되어 꿈꿀 자격도 없는 줄 알았던 나였다. 아르바이트해서 해외여행 좀 다녀볼걸. 그런 건 다른 세상 이야기인 줄 알았다. 해외여행 다녀오는 애들은 다 부모덕 본 줄 알았다.
가난은 그렇게 사람을 좀먹는다. 타지에서 자취하며 삼각김밥에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나와, 학교 근처 부모님 댁에 살면서 집밥 먹는 누군가의 한 달 생활비는 비슷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스스로 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선택의 범위는 달랐다. 어떤 선택지들은 내게 허락되지 않았다고 여겨졌다. 다른 누군가가 떼어줄 수 없는 빨간 딱지가 너무 오래 붙어있었다.
최근 한 기사를 읽었다. 기사 제목은 이랬다. '가난한 사람들이 일할 때 더 빨리 지치는 이유'. 사람에 따라, 같은 근무 조건이라도 더 쉽게 번아웃을 경험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였다. 그 차이는 각자가 보유한 자원의 차이였다. 자원이 부족한 사람, 그러니까 가난한 사람은 더 쉽게 번아웃을 맞는다고 했다. 자원은 돈은 물론, 개인의 역량, 가족이나 동료의 심리적 지지를 포함했다. (그러나 알다시피, 가난한 가정일수록 화목하지 못하다. 돈은 사람을 황폐하게 만든다.)
그 이유는 이랬다. 가난한 사람일수록, 타인에게 잘 보이고자 하는 동기가 강해 두려움을 느낀단다. 그래서 더 열심히 일하려고 들었지만, 더 지치고, 냉소적인 마음을 느끼고, 성과 저하로 이어진다고 했다. 그러니까 가난한 것만으로도 힘든데, 가난하면서 잘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면 그게 스스로에게 독이 된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가난하면 열정도 사치라는 말처럼 들렸다.
다행히, 기사는 마지막 문단을 희망으로 마무리 지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일러줬다. 돈은 어쩔 수 없으니, 심리적 자원이라도 확보하라는 얘기였다. 직장과 가정에서 안정적 관계를 만들기 위해 이타적 행동을 하고, 타인의 시선에 신경 쓰기보다 성과에 집중하라고 했다.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물려받은 가난을 스스로 지울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그게 어려운 상황이라면 마음이나마 척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부지런히 여행을 다니고, 기왕 나가는 돈이라면 내 마음에 드는 곳에 쓰고, 앞으로를 기대하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말 죽으라고 등 떠미는 것 같은 최악의 순간도 결국 지나간다. 끝이 없는 것 같은 터널에도 반드시 끝이 있다. 버틴 것만으로도 기특하지만, 남보다 어둡다고 해서 어둠만 응시할 필요도 없다. 내가 가진 작은 빛이나마 지켜봐 준다면, 삶은 반드시 더 나아질 테니까.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았던 그 아파트에는 책으로 가득 찬 책장이 있었다. 엄마는 나를 키우려면 책이 필요하다는 걸 어떻게 아셨을까. 나에게 책 읽을 기회가 주어졌음에 감사하다. 그 책장이 오빠 방에 있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런 사소한 일에 매몰될 필요 없다. 중요한 것은 나는 매일, 매주 새로운 책을 접할 수 있었고 책의 취향이 있었고 내 삶을 글로 풀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책장이 있었다는 게 중요하다. 우리 집에 책장이 있었고, 나는 그걸 읽을 수 있었다.
허락되지 못했다 생각해 돈 되는 학과에 진학했고 돈 되는 일을 좇았다. 하고 싶은 일은 취미로 하면 된다고, 게다가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수두룩하니 될 리도 없다며 덮어버렸다. 그런데 번아웃을 맞이하고, 삶에 회의감과 무력감을 느낄 때마다 떠오른 것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이었다. 기왕 사는 거라면, 기왕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게 삶이라면 내가 하고 싶은 일로 돈을 벌면 안 되는 건가? 남 눈치 보며 '잘' 살고 싶어 버둥거리다 죽게 생긴 삶이라면, 내 뜻대로, 좀 못생겨도 맛만 좋은 채소처럼, 그렇게 멋대로 자라나도 괜찮을 듯싶었다.
그래서 다시 책을 읽었다. 동네 책방에서 하는 글쓰기 모임에 용기를 내 신청했다. 발표라면 이골이 났는데도, 사람들 앞에서 내가 쓴 글을 읽으려니 목소리가 벌벌 떨렸다. 두려움이 아니었다.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왔기에 느꼈던 파동이었다. 내게 처음으로 글을 가르쳐준 황유미 작가님께 정말 감사하다. 초등학교 때 '조폭마누라' 소리 한 번쯤 들어본 여성이라면, 소설 <피구왕 서영>을 꼭 읽어보셨으면.
혼자 기차를 타고 부산에 숙소까지 잡아가면서 북페어에 가기도 했다.(부산에서 열리는 '마우스북페어'는 정말 최고.) 그곳에서 책을 잔뜩 샀다. 산 책을 읽었다. 안화용 작가님의 에세이, <적당히 솔직해진다는 것>이었다. 책 속에서 작가님이 글 모임을 추천해 주셨고, 망설임 없이 신청했다.
거창한 글을 써야 할 것 같다는 마음에 시작을 미루던 나에게, 매주 하나의 글을 마무리할 약속이 생겼다. 돈을 내고 하는 숙제가 아니었다. 글을 써서 내야만, 글방 사람들의 글을 읽을 수 있었다. 내 글을 보여주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시간이 소중해서, 어떻게든 글을 써냈다.
그렇게 글방 모임의 첫 한 달을 마무리하던 날, 소감을 말하게 됐다. 처음엔 웃느라 벌게진 얼굴이 보이시냐고, 가볍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울컥, 벅찬 마음이 들며 눈물이 솟았다. 어어, 제가 왜 이러지... 당황하면서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눈물을 연거푸 닦아내며 애써 괜찮은 척, 여러분의 글을 계속 읽을 수 있게 글 올리는 곳을 알려달라고 서로 아이디를 주고받고 모임이 마무리됐다. (참고로, 모임은 계속 이어진다. 놀랍게도 나는 글 못 쓰는 감옥에 끌려가지 않는다.)
모임이 끝난 후 멍한 기분으로 앉아 도대체 나는 왜 그렇게 눈물이 났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알 수 있었다.
터널의 끝이 보였다. 그 빛이 반갑고 반가워서 눈물이 났던 거였다. 빛은 항상 곁에 있었다는 것도, 모를 수 없을 정도로 주변이 환해진 후에야 돌이켜 알 수 있었다. 앞으로도 내 곁엔 빛과 어둠이 섞여 머무를 것이다. 그중 무엇을 바라보고 어디로 향할지 결정하는 것은 내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