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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연이 Mar 04. 2020

재택근무에 대하여

최대 장점 : 옷 한 벌로 일주일을 버틸 수 있음

재택근무를 한 지 딱 일주일이 되었다. 회사가 어떻게 생겼는지 가물가물해져 간다 (농담). 재택근무는 대체로 만족스럽다. 능동적 격리가 아닌 수동적 격리라는 데서 오는 답답함은 어쩔 수 없이 존재하지만 다 같이 무탈하고 건강하자는 의미로 시작한 것이니 감사한 마음으로 임하고 있다. 


동료와의 대화 사이에 낀 스크린의 존재감은 상당하다. 말 한마디, 표정 한 번, 손가락 가리키기 한 번이면 끝날 일인데 면대면으로 마주하지 못하지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자료를 만든다. 사람을 만나지 못하니 말할 사람이 없고, 그렇게 되니 메신저 창은 업무 얘기가 주를 이루다가도 누군가 말꼬리를 잡아 한번 웃기기 시작하면 대화는 걷잡을 수 없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ㅋㅋㅋㅋ' 또는 'ㅠㅠㅠㅠ'가 넘실대는 메신저로부터 웃음과 위로를 얻는 애잔하고 요상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물리적으로 함께 있지 못하는 막막함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도구를 지혜롭게 활용할 줄 아는 호모 사피엔스들은 잔디든 행아웃이든 각자에게 일용할 도구를 찾아내어 제 몫의 일들을 해내고 있다. 아침이면 함께 모여 행아웃으로 음성 채팅을 나눈다. 에어팟을 꼽고 있기 때문일까 상대방의 목소리가 서라운드 사운드로 울려 실제로 옆에 있을 때보다 생생하다.  가끔 끊기는 일도 있지만 심각한 오류는 아니므로 그냥 말을 더듬는 것이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다. 며칠 전에는 200명의 전사 직원이 행아웃으로 매달 초마다 함께 모여 진행했던 '임팩트 포럼'을 참관했다. 발표자는 프레젠테이션 기능을 활용해서 장표를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했다. 같은 공간에서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어쩐지 귀를 더욱 기울이게 된다. 이 상황이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일까. 



사실 '재택근무' 조치가 단행되었을 때 처음 소식을 접하고는 마음속에서 킨포트적 소망이 은근하게 피어올랐다. 이를테면 느즈막한 아침에 부시시한 얼굴을 하곤 일어나 부엌으로 나와서 커피 한 잔을 내린 다음 소파에 앉아 창밖을 보며 한 모금 호로록하며 여유롭게 책상으로 자리를 옮겨 메일함을 열어보는 그런 낭만 말이다. 물론, 그런 호사는 단 1초도 누리지 못했다. 소파? 소파는 쉬는 곳이 아니라 점심 먹는 구내식당 격이다. 식후 커피? 커피가 뭐였더라 하하. 출근했을 때 식당과 카페를 오고 가던 행동반경은 의자와 화장실, 끽해봐야 2m 정도로 확연히 줄어들었다. 모호해진 집과 job의 경계를 넘나들며 아득해지는 정신줄을 겨우 붙잡기 급급하다. 성과를 유지해야 하니까^^ 눈 앞에 있는 침대를 보며 하루만 내방의 침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요즘따라 더 포근해 보여서 약이 오르는 저 침대는 내가 누울 곳이 아니라 퇴근할 곳이다'라는 생각으로 의자 끝에 엉덩이를 더 밀어 넣는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밥' 앞에서 한낱 생떼일 뿐이다. 밥은 생명이다. 일주일 내내 배달의 민족에 기생하던 나는 안 그래도 최근 업무 스트레스로 한껏 예민해진 위와 장에게 미안함을 넘어서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파업할 것만 같은 상태의 위와 장을 위해 큰 결심을 했다. 요리를 해 먹자. 마침 담백한 된장찌개와 고소한 시금치 무침이 당기던 차였다. 안경과 마스크, 모자, 롱 패딩으로 무장한 채 마트에 갔다.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은 채 머릿속에 넣어둔 재료들을 장바구니에 착실히 담았다. 


집으로 돌아와 깨끗하게 씻고, 가스레인지에 물을 올렸다. 무, 양파, 애호박을 가지런히 썰었다. 시금치도 몇 단만 뜯어서 흐르는 물에 구석구석 헹군 후 마침 팔팔 끓고 있던 물에 넣어 가볍게 데쳤다. 눈에 보이길래 샀던 가지도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살짝 쪘다. 커다란 냄비에 끓여둔 물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을 때 무를 넣고 된장을 풀었다. 찌고 데친 나물들은 마늘과 참기름장을 넣고 무쳤다. 된장을 풀어둔 물에 남은 야채를 다 넣었다. 부지런히 만든 음식들을 접시에 정갈히 옮겨 담으니 어느새 한상 차림이 완성되었다. 된장찌개를 한 술 떠서 먹어봤다. '크 이 맛이야!' 자극적이지도 심심하지도 않은 요리에 밥 한 그릇이 뚝딱하고 사라졌다. 떡볶이, 김밥, 치킨, 피자는 아무리 먹어도 질리기만 할 뿐, 축구공처럼 배가 빵빵해지긴 해도 속이 텅 비어있는 느낌이라 늘 배부른 허기에 시달리곤 했었다. 그런데 된장찌개에 나물, 김치랑 밥을 먹으니 한 공기만으로도 든든했다. 집밥의 기적에 새삼 놀라며 행복하게 설거지까지 마쳤다. 



좀비 떼를 피해 지하벙커에 숨어 사는 마지막 인류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모조리 지울 순 없지만 코로나와 사이비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시작된 재택근무는 내 삶을 꽤나 윤택하게 빛내주는 편이다. 여전히 업무는 오늘과 내일의 선을 넘나들며 끼를 부리고 있지만 고된 출퇴근길과 의미 없는 회의로 인해 당과 에너지가 떨어질 일이 없다. 그 에너지를 업무에 집중하는 데 쓰고, 밥을 해 먹는데 쓰고, 잘 씻고 잘 자고 잘 치우는데 쓰고 있다. 놀랍다. 내가 이렇게나 잘 치우는 사람이었다니. 그만큼 하루에 쓸 수 있는 에너지가 많이 절약된다는 뜻일 것이다. 


재택근무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있었다. 사람들과 떨어져 일하면 속도를 따라잡지 못할까 봐, 혼자 도태될까 봐, 일도 뭣도 안될까 봐. 그래서 올해 주어진 2주간의 재택근무 찬스를 쓰기가 두려웠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재택근무가 체질에 맞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노트북과 인터넷만 있으면 어디서든 일을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꽤 의미 있는 수확이다. 원활한 원격근무 환경을 만들어준 도구들의 모든 개발자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덕분에 효과적인 소통을 고민하는 일은 결코 헛되지 않음을 다시 한번 느꼈다. 하지만 이제 점점 나의 동료들과 보낸 시간들이 그리우니 코로나와 사이비는 하루빨리 사라지길 바란다. 썩 물러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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