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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연이 Dec 28. 2020

2020년 연말정산

난리 났네 난리 났어

작년에 이어 올해도 해보는 연말정산

분위기가 사뭇 다른 걸?




올해의 장소
후보 : 속초 울릉도 황매산캠핑장
주인공은 속초


설날에 배가 뜨지 않아서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대안으로 찾은 곳은 속초. 첫째 날은 신이랑 숙소를 잡았고 둘째 날은 혼자 게스트하우스를 잡았다. 첫째 날 느지막이 출발해서 도착하자마자 저녁으로 대게를 흡입했다. 문상신은 게 별로 안 좋아한다면서 엄청 맛있게 먹고 라면까지 다 먹었다. 2차로는 속초에서 유명하다는 브루어리에 가서 맥주를 드링킹하고 3차로는 숙소 근처 전집에 가서 마감할 때까지 김치전 부추전에 소맥을 말아 넣었다. 그러고도 아쉬워서 맥주를 한껏 사 가지고는 숙소에서 해 뜰 때까지 부어라 마셔라 했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잘 기억 안 나는데 미친 듯이 웃은 것만은 기억난다.


다음날 아침, 체크아웃 시간이라 겨우겨우 눈을 뜨고 해장을 하러 갔다. 기름진 냄새가 진동하는 시장 근처에서 겨우 찾은 장칼국수 집에 들어가 각각 한 사발씩 드링킹하고 신이는 친구들을 만나러 서울로, 나는 게스트하우스로 떠났다. 게스트하우스는 체크인 시간 전이라 쉬지도 못하고 짐만 두고 도망치듯 나왔다. 철공소 카페에서 일을 하다가 문우당서림에서 한참 동안 책 구경을 했다. 여기서 ‘돌이킬 수 있는’ 책을 사고 다시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와서 낮잠을 잤다.


거의 3-4시간을 잤을까. 배고파서 나왔는데 설날이라 그런가 근처가 한산했다. 백반집에 들어가서 제육볶음을 먹고 카페에 가서 아포가토 하나를 시켜놓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근데 책이 미친듯이 재미있었다. 어디서 끊어야 될지를 몰라서 계속 읽다가 또 마감시간 가까워서야 겨우 끊고 집에 돌아와서 씻고 다시 책을 펼쳤다. 400페이지가 넘는 소설책이었는데 덮기가 아쉬어서 계속 읽다가 결국 그 자리에서 다 읽어버렸다. 새벽 4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신이랑 밤새 술 먹으면서 웃고 얘기하고, 또 책 한 권이랑 밤새 놀았던 그 기억이 너무 선명하고 행복했다. 2021년에도 갈 수 있었으면.



올해의 음식

아 이건 답이 너무 명확하다. 청제오빠(a.k.a 민지 남편)가 해준 매운탕. 처음 먹고 너무 맛있어서 충격받았던 그때가 생생. 적당히 칼칼하면서도 따갑지 않고 담백한 육수에 산초의 향긋함이 제대로 어우러져서 수육 먹고 약간 니글니글할 때 먹으면 저세상이다. 하 또 먹고 싶네. 떡볶이도 맛있고 고추잡채도 맛있다. 민지 집에 가면 그냥 잔치다.




올해의 영화
후보 : 1917,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조조 래빗
주인공은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조조 래빗>의 귀엽고도 충격적인 연출, <1917>의 화염으로 타오르는 마을 속으로 걸어가는 주인공 씬이 오랫동안 여운에 남았다. 특히 1917은 올해 마지막으로 영화관에서 본 영화기도 했다. 그럼에도 한번 봤었던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가 1등인 이유는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메시지를 전해준 영화였기 때문.

“내 인생이 혼란스러웠던 게 아니라 집착이 문제란 걸 알았어. 때론 무너져도 괜찮아. 무너지면 다시 세울 수 있잖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함께여도 슬플 수 있다는 걸, 잘하려고 할수록 힘들 수 있다는 걸. 그걸 애써 외면하고 행복과 균형에 집착했기에 더 빨리 무너진 거지. 균형은 많이 무너져봐야 더 탄탄하게 잡을 수 있다는 생각을 안겨준 영화.


올해의 드라마
후보 : 이어즈앤이어즈, 킹덤2, 사이코지만 괜찮아, 스토브리그
주인공 : 이어즈앤이어즈

1편 꺼내봤다가 순식간에 전편 다 본 드라마^^ 역시나 밤샜다. (연말정산 주인공의 기준 = 밤샘) 일단 배우들이 연기를 잘하고, 상황이 미래같으면서도 엄청나게 현실적이다. 자극적인 말로 대중을 선동하는 정치인, 그들을 더욱 부풀리고 현실을 왜곡하는 언론, 자기 세력을 키우기 위한 빈번한 무력 충돌과 이로 인해 늘어나는 빈부격차 및 노골적인 약자 혐오.

세상은 점점  뜨거워지고 빨라지며 미쳐가는데 우린 멈추지도, 생각하지도, 배우지도 않고 다가올 재앙으로 질주하기만 해요. 이다음은 뭘까요? 어디로 향하는 걸까요? 멈추는 날이 오긴 할까요?”

잠깐 멈추고 생각하고 배워야겠다는 생존본능과 함께 뜨겁고 빠르게 미쳐가고 있는 세상을 돌아보게 만든 드라마.


올해의 다큐멘터리
후보 : 소셜딜레마, 익스플레인 - 뇌를 해설하다
주인공은 익스플레인 - 뇌를 해설하다

나를 명상의 길로 인도해준 다큐. 그 전만에도 명상은 뭐랄까 약간 사이비스럽기도 하고 종교적인 느낌이 거셌는데 이 다큐 <마음 챙김> 편을 보고 명상의 과학적 원리를 알게 됐다. 과거와 미래의 불안과 집착을 야기하는 뇌의 영역을 진정시키고, 현재에 집중할 수 있는 영역을 활성화시키는 것. 그래서 이제는 마음이 불안하고 평정심을 잃을 것 같을 때 눈을 감고 호흡에 집중한다. 한동안 명상을 하다 보면 두근거렸던 심장이 고요해지고 지끈거렸던 두통도 잠잠해진다. 효과를 알기 때문인지 플라시보처럼 명상의 효과가 더 극대화되어 나타나는 것만 같다. 아는 게 힘이여.



올해의 글
이슬아 - 재능과 반복

꾸준함은 등산 같았다. 해내고 나면 기쁘고 좋을 걸 분명 알면서도 막상 하기가 싫은. ‘시작’이라는 단어와 행위에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처럼 일단 하는 게 그렇게도 힘들었다. 그래서 재능보다 꾸준함이 더 어렵고 더 가치 있는 것이라 말하는 이 글이 공감 가면서도 미웠다. 당시의 나는 불안정의 끝을 달리던 사람이라 시작이 어려웠고 지속은 두려웠다. 어쩌면 지속하지 못할 걸 아는 스스로가 더 두려웠을지도.


그러다 10월 리추얼을 시작하면서 매일 요가를 하고 글쓰기를 했다. 꾸준히 무언가를 해내는 성취의 달콤함에 젖어들었고 그건 습관이라는 멋진 훈장이 되어 자존감의 기반이 되어주었다. 간혹 오늘은 쉬고 싶다는 유혹이 찾아온다. 늦게까지 일했으니까, 지난주에 매일 했으니까. 합리화하기 좋은 변명거리들이 떠오른다. 그때 이 글을 떠올린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꾸준함. 어제보다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 되는 걸 가장 쉽게 만들어주는 선택지. 그래서 다시 매트를 편다. 글을 쓴다. 졸려도 한 문장만 쓰고 자자. 이 결심이 무너졌던 나를 켜켜이 쌓아 올렸다.

‘재능은 선택할 수 없지만 꾸준함은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십 년 전의 글쓰기 수업에서도 그랬다. 잘 쓰는 애도 매번 잘 쓰지는 않았다. 잘 못 쓰는 애도 매번 잘 못 쓰지는 않았다. 다들 잘 썼다 잘 못 썼다를 반복하면서 수업에 나왔다. 꾸준히 출석하는 애는 어김없이 실력이 늘었다. 계속 쓰는데 나아지지 않는 애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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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문장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와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주소서.’


허지웅의 책에서 본 라인홀트 니부어의 기도문이다. 그럴 때가 있다. 어스름하게 생각은 나는데 배움과 경험이 부족해서 한 문장으로 정리해내지 못한 것들이 완성된 채로 내게 다가오는 것을. 올해 하반기에 그런 경험을 무수히 많이 했다. 위에서 언급한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도 그랬고, 허지웅의 에세이에서 본 이 기도문도 그랬고, 다양한 곳에서 소위 ‘동시성’이라고 말하는 현상을 많이 접했다 신기하게도. 새로운 세상의 문이 열린 것 같았다. 그중의 으뜸이 바로 이 문장이었다.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와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 이것만 알게 된다면 살면서 겪을 모든 일들을 별일 아닌 듯 느낄 수 있게 될 것만 같았다. 이제 30대다. 공자가 이립, 즉 모든 것의 기초를 세우는 나이라고 일컬은 시기가 내게도 왔다. 나는 그 기초의 틀을 이 문장으로 하여금 잡아보려고 한다.


‘삶은 내가 원하는 내가 되기 위한 몸부림의 과정’


이건 그냥 요리하다가 문득 떠오른, 내가 내린 삶의 정의이다. 삶의 정의를 내리는 걸 좋아한다. 아무래도 목적 없는 인생은 고달프고 허무하니까 그럴 때마다 자주 내가 사는 이유를 떠올려보곤 한다. 올해 내린 정의는 이것이다. 상반기 내내 누군가 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몸부림쳤던 것 같다. 예쁨 받고 사랑받고 인정받으려고 하다 보니 무리했다. 굳이 그럴 필요 없는 대상들이었는데 그걸 몰랐다. 정작 내가 원하는 내 모습을 몰랐다. 그래서 앞으로는 내가 원하는 내가 되어보려고. 내가 원하는 나는 크게 보면 6가지 조건을 갖춘 사람인데 쉬우면서 어렵다. 그래서 ‘몸부림의 과정’이다.



올해의 문학
후보 : 파과, 돌이킬 수 있는, 모순, 시선으로부터
주인공은 돌이킬 수 있는

아우 쟁쟁했다. 아무래도 단편보단 장편을, 해외소설보단 국내소설을 좋아하는 스타일인가 보다. 단편도 꽤 읽었는데 임팩트가 없고, 해외소설은 이름이 너무 난관이다.. 후보에 올린 소설 모두 올해 다 재미있게 읽은 책들이다. 그중 돌이킬 수 있는은 속초에서 하루 만에 다 읽어버린 흡입력 만점의 SF 소설이다. 설정이 일단 너무 재밌다. 갑자기 땅끝 아래로 사라져 버린 마을이 디스토피아로 변하고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들과 그들을 사라지게 할 자들의 싸움이라니. 한 문장으로 요약해놓고 봐도 흥미진진이다. 문목하 작가의 데뷔작이라고 들었는데 거기에서 오는 풋풋함과 신선함이 있다. 이 소설의 핵심은 결말이다. 새벽 4시 넘어서 결말을 보고 침대에 누워서 느꼈던 벅차오름과 감동과 기쁨과 슬픔이 뒤섞인 감정이 아직 생생하다. 개인적으로 제대로 영화화되길 바라는 작품.



올해의 비문학
후보 : 살고 싶다는 농담, 타인의 고통
주인공은 살고 싶다는 농담

<타인의 고통>은 지금 생각하면 좀 어이가 없다. 당시 내가 느꼈던 이유 모를 고통에 대해 알고자 무턱대고 시킨 책이었는데 안의 내용이 내가 기대한 것과 완전히 달랐다. 알고 보니 저자 수전 손택도 어마어마한 사람이었고. 읽을수록 더 고통스러웠던 이 책을 어떻게 다 읽었을까 싶은데 돌이켜 생각하면 담고 있는 메시지의 무게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현대 시대가 고통을 보여주는 방식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다 함께 공감능력의 말로로 치닫고 있는 지금을 반영했다는 점에서 스스로에게도 여러 번 소름 끼쳤던 작품. 하지만 스스로 완전히 이해했다고 보긴 힘들 것 같아서 주인공은 살고 싶다는 농담에게로. 내 인생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던 게 피해의식이라는 것을, 그 피해의식이 내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돌아보게 만들어준 책이었다. 여러모로 정신건강 바로 잡는데 많은 도움을 준 작품. 허지웅 씨가 부디 건강했으면 좋겠다.


올해의 소비
집 꾸미기


나만의 공간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깨달은 한해.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내고 내 리듬에 맞춰 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음을 많이 느꼈다. 집에 굴러다니는 잡동사니들을 정리할 가구를 들이고, 칙칙했던 이불도 내가 좋아하는 색으로 바꾸고, 귀여운 화분과 꽃과 조명을 들였다. 예전에는 한 달에 한 번 삘 받으면 할까 말까 했던 청소를 하루 걸러 하루씩 한다. 매일 저녁 창문을 열어놓고 집을 쓸고 닦으면 기분이 너무 좋다. 주말마다 이불 빨래하러 코인세탁방에 갔다가 건조를 기다리는 동안 꽃을 사러 가는 일이 낙이 됐다. 코로나 때문에 강제 집콕하는 게 고통이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버틸만한 이유다.


올해의 사랑
지구


우울할 땐 펭귄을 본다. 애기 황제펭귄들이 날개를 퍼덕퍼덕거리면서 친구들이랑 무리 지어 놀거나 아빠 품에 안겨서 펭귄 밀크를 받아먹거나 배로 빙하를 슬라이딩하는 걸 보면 귀여워서 미쳐버릴 것 같다. 이 펭귄들이 설 자리들이 점점 줄어든다. 빙하가 녹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는 유독 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비건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경험담도 들렸고, 친환경 프로젝트도 많이 접했다. 화장품부터 바꿨다. 스킨 로션 샴푸 바디워시 바디로션 다 친환경 제품으로 바꿨다. 플라스틱 빨대는 누가 꽂아서 주지 않은 이상 쓰지 않고, 회사에선 무조건 텀블러 아니면 유리컵을 쓴다. 비닐+플라스틱 파티인 배달 음식을 최대한 줄여보려고 집에서 뽀짝뽀짝 해 먹기 시작했다. 아직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하지만 아직 바꿔야 할 게 많다. 해보니 조금의 불편만 감수하면 될 일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더라. 내가 감수하지 않은 불편은 누군가의 생명의 위협으로 직결된다. 올해의 사랑을 오랫동안 이어 나가볼 계획이다.



올해의 고마움
엄마. 단어만 써도 눈물 나네. 엄마한테 전화해서 엉엉 울어본 건 처음인 것 같은데 누워서 얘기하다가 갑자기 설움이 복받쳐서 애기처럼 울었다. 근데 엄마는 엄청 웃었다...  왜죠..? 그래서 나도 울다가 어이가 없고 아 이게 별일 아닌 거구나 싶어서 같이 웃었다. 그 순간은 다 나은 것 같았다. 엄마는 늘 그랬다.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이 무서워서 찾으면 그걸 별일 아닌 걸로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머쓱하다가도 든든하다. 울다가 웃다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나는 속이 시원한데 엄마는 또 그게 아닌가 보다. 엉엉 울고 나서 나는 오랜만에 푹 잤는데 엄마는 다 큰 딸의 오열에 속이 상했는지 밤잠을 설쳤단다. 나선미 시인의 ‘네가 어떤 딸인데 그러니’라는 시가 있다.

 훌쩍이는 소리가 
 어머니 귀에는 천둥소리라 하더라.
그녀를 닮은 얼굴로 서럽게 울지 마라.

어릴 땐 엄마가 워낙 바쁘기도 했고 무뚝뚝하기도 해서 나를 사랑한다는 걸 잘 느끼지 못했는데 올해 들어 절실히 느꼈다. 그 사랑이 너무너무 고맙고 감사하다. 덕분에 더 좋은 어른이 되고 싶어 졌다.


올해의 기쁨
리버풀 우승


올해의 기쁨을 떠올렸을 때 내가 웃었던 많은 순간들이 스쳐지나갔다. 마냥 힘들기만 했던 2020년이 아니었구나. 안도감이 든다. 그중 가장 짜릿한 기쁨은 역시 오래 염원했던 리버풀의 프리미어리그 1920 시즌 우승이다. 공놀이 하나에 이렇게나 심장이 두근거려서야 될 일인가 싶었지만 그래도 놓지 못하겠다. 코로나때문에 한창 폼이 올라왔을 때 경기가 중단되고 구단과 팬이 한마음 한뜻으로 기대했던 우승 퍼레이드도 제대로 못했지만 그래도 끝내 집중력을 잃지 않고 큰 부상 없이 각자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결과로 우승컵을 들고야 말았다. 이제 더 바랄게 없다 나는. 우승 못해도 돼! 즐길거야 그냥 즐길래.



올해의 눈물
허리 디스크. 생전 처음 느껴본 감각이었다. 누가 발끝에 자꾸 전기총을 쏘는 기분. 허리부터 발끝까지 따끔따끔 저릿저릿. 이 상태로 자고 일어나면 평생 다리를 못 움직일 것 같아 어찌나 무서웠는지. 디스크가 완치가 불가능한 병인지도 처음 알았다. 태어나서 병원을 그렇게 열심히 다녀본 건 처음이었다.

상태가 악화되면 주사 맞는 것부터 시작해서 시술을 해야 한다고 하는 의사 선생님 말씀에 일주일에 두 번은 무조건 병원에 갔다. 그렇게 아픈 치료도 처음이었다. 근막 치료가 그렇게 근막을 무식하게 찢는 치료일 줄은 상상도 못 했지. 해사하게 웃으면서 근막 찢는 물리치료사님 성함도 아직 기억해요... 너무 감사하고 친절하셨지만 두 번 다신 만나지 말길. 이제 주사 맞을래 근막 치료할래 물으면 무조건 주사다. 3방까지도 가능하다. 이 글을 보고 계신 분이 있다면 허리를 꼭 곧게 세우시고 코어 힘을 키우셔야 해요 꼭.


올해의 잘한 일
돌아보니 생각보다 많네. 뿌듯해라. 하나를 꼽자면 산책. 힘들다고 누워만 있으면 어떤 꼴이 될지 누구보다 제일 잘 알았다. 원래라면 킥복싱을 다시 배웠거나 축구나 러닝 클럽이라도 들었을 텐데 팬데믹 시국과 허리디스크가 막았다. 할 수 있는 게 밖으로 나가 걷는 것뿐이었다. 에어 팟을 꽂고 그냥 무작정 걸었다. 이사 온 지 1년이 넘었는데 집 주변을 이렇게 걸어본 게 처음이었다. 그동안 참 답답하게 살았구나 싶었다.


걸으니까 너무 좋았다. 복대를 하고 아랫배에 힘을 단단히 주고 걸으면 허리도 안 아팠다. 코인 노래방을 못 가니까 사람 없는 길거리에서 노래도 불렀다 히히. 길가에 핀 꽃구경도 하고, 지나가는 차 구경도 하고, 돈 벌면 볼보를 사야겠다 생각하기도 하면서 발 닿는 대로 걸었다. 짧게는 30분 걸었고 길게는 2시간도 걸었다. 생각도 정리되고 막 긍정적인 기운도 뿜어 났다. 걷고 나면 새 하루가 시작된 기분이었다. 내년에는 마스크 벗고 걸을 수 있으면 좋겠다.



올해 가장 못함
대화하기. 감정조절.

말해봤자.라고 생각한 적이 많았던 것 같다. 이런 말 하면 싫어하고 불편해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던 적도 많았던 것 같고. 그래서 속으로 삭혔는데 그렇게 삭혀둔 것들이 감정의 선을 건드려서 감정 조절을 못하게 만들었다. 집에서건 회사에서건 이 2가지가 부족했다. 갈등을 건강하게 풀 수 있는 방법은 대화뿐이라는 걸 제대로 배웠다. 이제 잊지 말기!



올해의 선물
이것도 돌아보니 되게 많네. 갬동.. 그중에서 꼽자면 상반기에 위가 너무 안 좋아서 걱정이었는데 그걸 듣고 이지영이 양배추즙을 부쳐줬다. 배송받고 약간 울컥. 김동우가 선물해준 open the door 각인 펜이랑 보미가 준 잠옷+컵 세트도 너무 고마웠다. 팀원들이 액운 물러가라고 캄보디아 사원 엽서에 써준 생일 축하 편지도 잊지 못할 거다.


그리고 또 너무 감사했던 건 책 후기들.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를 쓴 건 아닐까. 너무 무거운 내용만 담은 건 아닐까 망설였는데 감사하게도 재미있게 읽어주시고 내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에 정확히 반응해주셨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어디에 계시든 알 바야 쓰레빠야 정신으로 함께 헤쳐나가길!



올해의 사람
마케팅팀 동료들.

이토록 열정적이고 인간적이며 재미있고 책임감 있고 능력 있는 사람들과 한 팀이 되어 같이 일하고 함께 성과를 만들어본 경험을 해본 것 자체가 축복일지도. 죽어라 집중해서 일하고 녹초 돼서 회사 앞 먹태 집에서 맥주 마셨던 것, 새벽까지 먹고 마시고 다음날 녹초로 일어났다가 약 먹고 다시 먹고 또 먹고 자기 전까지 얘기하고 먹었던 것, 인생 곱창 먹고 브레이크 없이 달렸던 것, 설날 전야 짐까지 다 싸들고 나왔는데 소재 만들어야 해서 문 앞 테이블에 2시간 동안 쪼그려 앉아서 끝까지 다 하고 갔던 것, 다 놔버리고 싶었을 때 일 걱정하지 말고 고향에 잘 다녀오라고 다독여줬던 것 모두 오래오래 남을 것 같다. 이들 덕분에 n 년 간 변함없었던 INFP 기질이 ENFP로 바뀌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i에서 e가 되다니... 대단한 사람들이다.


올해의 일


<펀딩으로 시작하자> 캠페인. 있게 하자 때는 처음부터 같이 한 건 아니었는데 이번 캠페인은 처음부터 함께 시작했다. 첫 캠페인이 성공적으로 끝난 만큼 이번 캠페인을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는데 역시나. 떼깔이 정말 곱게 나왔다. 상상 그 이상. 정말 많은 분들이 애써주신 만큼 좋은 캠페인이 완성되어서 뿌듯했고 감사했다. 그리고 강하늘 배우님 정말... 내년에도 다복하고 하시는 영화 드라마 뭐 다 성공하시길.


올해의 신선한 충격

현대무용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들듯 유연한 몸에 유연한 생각이 깃들지 않을까 싶은 단순한 이유로 현대무용을 배우기 시작했다. 용인에서 신사까지 왕복 3시간 가까운 길이지만 꼭 배워보고 싶었다. 그리고 선택을 옳았다. 몸을 움직일 때는 아무 생각 안나고 몸에만 온 신경이 쏟겼다. 노래에 맞춰 정확한 동작을 해낼 때의 쾌감도 짜릿했다. 금요일날 술 먹고 토요일 새벽 늦게 들어와도 귀신 같이 일어나서 학원은 꼭 갔다. 몸을 맡기는 게 멜로디인지 숙취인지 몰라도 너무 재밌었다. 집에서 연습도 열심히 했다(약간 현타옴). 이게 나름 운동이라서 한 시간동안 배우고 나면 땀이 보송보송 피었다. 갓 차오른 에너지를 주체할 수가 없어서 신사에서 강남까지 매번 신나게 걸어갔다. 몸과 정신의 유연함은 아직 모르겠는데 할까말까 할 때는 해보는 게 역시 건강에 이롭다는 건 확실히 알았다.




올해의 의외
코로나 19.

이 자식이 올해 내내 따라다닐 줄은 몰랐다. 코로나만 아니었다면...이라고 시작하는 가정들을 참 많이도 해봤다. 너만 아니었다면. 근데 어쩌나 너가 아닐 수가 없는 걸. 나도 나지만 이것 때문에 힘들고 고통스러워하는 분들이 너무나 많다. 2021년은 부디 모두가 좀 더 건강하고 안전하고 행복하게 보낼 수 있길.


올해의 교훈
하나.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지금 생각해보면 디스크 그거 그냥 치료 열심히 받으면 되는 걸 싶은데 그때는 겪어보지 못한 아픔이라 너무 무서웠다. 그렇게 불안이 체내화되니 조그만 거에도 예민하고, 별 거 아닌 거에도 멘탈에 금방 스크래치가 났다. 뭐니 뭐니 해도 건강이 최고다. 내 최종 목표는 건강하게 장수하 기다. 건강한 몸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오래오래 살 테야.

둘. 내 감정을 부끄러워하지 말자.
왜 그렇게 내 감정을 검열하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화내도 될까? 웃어도 되는 타이밍인가? 그냥 있는 그대로 표현하면 될 걸 내 감정에 내가 자신이 없어서 눈치 보고 숨기기 급급했다. 스튜핏. 이제 감정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감정과 반응 사이에 적당한 공간을 만들어나가며 성숙하게 대처하는 법을 배울 차례다.


올해의 요약
진짜 손길 닿은 곳곳에서 별의별 일이 다 있었던 2020년이다. 둥글둥글하게 생겨서 잘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던 게 완벽한 오산이었다. 그래도 무너짐을 건강하게 극복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어서,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의 소중함을 알게 되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또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지 깨달을 수 있어서 감사한 한 해였다. 한 해를 돌아보니 너무 어리고 모자라고 찌질했던 순간이 많아서 부끄러웠는데 한번 해봤으니 다시는 안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드니 안도가 된다 후. 스스로에게 고마운 건 내려놓을락 말락 했어도 먼저 내려놓은 건 없었다는 거. 잘되든 못되든 끝까지 최선을 다하고 책임을 다했다는 거. 나름 잘 살았다 2020년!


2021년의 다짐
와 내가 이제 30대라니. 스무 살 쯤엔 이때 되면 뭔가 엄청난 커리어우먼이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그냥 커리어 쌓는 우먼이다. 그래도 20대 때 하고 싶은 거 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 만나고, 먹고 싶은 거 먹고, 가고 싶은 곳 가고 열심히 살았다. 그러니 30대도 멋지게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멋진 건 솔직한 거다. 아는 것만 안다고 말하는 것. 할 줄 아는 건 자신 있게 하는 것. 부족한 점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개선하려 하되 자책하지는 않는 것. 솔직하고 당당한 30대가 되자. 설렌다 내년에는 또 어떤 연말정산을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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