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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연이 Dec 31. 2020

덕분에 보게 된 풍경

이제는 우리집


한동안 집을 방치하며 살았다. 스무 살 이후 기숙사를 시작으로 원룸 고시텔 오피스텔 여러 곳을 전전하며 다녔다. 한 곳에 제일 길게 머문 때가 2년이었으니 내 공간이긴 해도 내 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언제 떠나야 할지 모르는 불안감이 마음 한켠엔 늘 자리하고 있어서 집이라기보다는 임시거처에 가까운 느낌으로 머물렀다. 울릉도 집에만 가면 몸과 마음이 풀어질 대로 풀어져서 하루 종일 잠만 자는 것도 이에 대한 반대급부였을지도.


코로나가 일상을 덮치기 전까지 큰 문제는 없었다. 평일엔 회사에 갔고, 주말에도 바깥을 돌아다니는 일이 잦았다. 한때는 친구 집에 살다시피 했으니 갓 이사 온 집과 어색한 사이로 남아있기에 충분한 환경이었다. 그러다 코로나가 발목을 잡은 것이다. 예상치 못한 시점에 내려진 위리안치에 당황하던 찰나, 신이도 독립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동거인이 있어서 삭막했던 집에 온기가 깃들었는데 그마저도 사라진다니. 그래서 마음을 먹었다. 남들 다 한다는 집 꾸미기, 어디 나도 한번 해보자.


최애꽃은 스토크. 예쁘기도 하지만 향이 너무 아름답다.


일단 칙칙해빠진 이불부터 밝은 노란색과 초록색으로 바꿨다. 침대 근처에 둘 조명과 협탁을 사고 책상도 새로 들였다. 좁은 옷장에 구겨 넣듯 보관했던 옷을 살뜰히 정리해줄 행거와 서랍장도 사고, 간이 식탁에 정신없이 흩어져있던 물건들의 제자리가 되어줄 수납장도 사고, 이것저것 사다 보니 한 달 월세값이 훅 나갔다. 꽤나 오래 고민하고 정말 필요하겠다 싶은 것만 샀더니 오히려 즐거웠다. 이제 정리할 일만 남아있었는데 일은 내가 벌여놓고 수습은 신이가 다 해줬다. 늦게까지 야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배송된 가구들이 이미 조립된 채로 턱턱 놓여 있었다. 귀찮게 군다면서 분리수거까지 다해주는 너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니.


가구들을 이리저리 옮기면서 배치까지 마치고 나니 황량했던 공간에 생기가 감돌았다. 여행 가서 찍었던 사진과 사둔 엽서들도 붙여두고, 건너편 꽃집에서 보랏빛 스토크 한 다발을 사 와서 협탁 위 꽃병에 꽂아두니 더욱 화사해졌다. 그냥 잠자는 공간이라고만 생각했던 집에 애정이 가기 시작했다. 예전과 다름없이 넷플릭스를 보고 책을 읽고 밥을 먹고 잠을 자는데 눈에 걸리는 풍경이 깔끔하니 뭘 해도 마음에 걸리는 게 없었다. 내 주변을 어떻게 정리하고 꾸미느냐에 따라 내 기운과 기분이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좋은 이불은 삶의 질을 높여준다

집을 향한 애정은 나를 춤추게, 아니 청소하게 만들었다. 귀차니즘을 핑계로 환기를 방패 삼아 한 달에 한두 번 할까 말까 했던 집 청소를 매일같이 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와 이 정도면 강박증 아닌가’ 싶었는데 남들은 다 이렇게 산다는 걸 알고 조용히 빗자루를 들었다. 해가 어스름하게 질 때쯤 블라인드를 삭 걷어올리고 커다란 창문을 활짝 열어둔 채 집안 구석구석을 열심히 쓸고 닦는다. 먼지가 많으면 많은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기분이 좋다. 2주에 한 번씩 코인세탁방에 가서 이불 세탁을 하는 게 낙이 되었고, 빨래를 기다리는 동안 집으로 후다닥 들어와 화장실 청소를 끝낸다. 지하 4층까지 내려가서 분리수거를 한바탕 하고 올라오면 목욕탕에 다녀온 것처럼 속이 시원하다. 그사이 건조된 이불들을 데려와 침대 정리까지 끝내고 그 위에 폭닥하니 누워있으면 그 자체로 행복할 뿐이다.


안타깝게도 혼자 지내다 보면 게으르고 둔하고 무기력하고 침울해지기가 더 쉽다. 더구나 지금 같은 시국에 집에만 갇혀있게 되면 그 확률은 더없이 치솟는다. 나 역시 코로나 블루에 물드는 것 같을 때가 있다. 그러던 중 집을 단장하면서 어떤 환경 속에 나를 던져놓느냐에 따라 내가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들이 바뀔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움직일수록 더 움직일 수 있는 에너지가 생겨나고, 게을러질수록 그 게으름에 한없이 파묻히는 성향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더 움직이려고 한다.


물론 하기 전에는 너무너무 너무 귀찮다. 진짜 귀찮아 죽겠다. 왜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 싶다. ‘아 그냥 누워있으면 안 되나. 굳이 사서 고생한다. 완전 내팔내꼰 (내 팔자 내가 꼰다.)’ 별별 생각이 다 든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아무렇지 않은 성격이면 문제없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누워만 있는 나를 한심해할 게 뻔해서 문제다.. 그래서 귀찮다는 생각이 몸 곳곳을 지배하기 전에 벌떡 일어나버린다. 민망해진 몸은 다시 눕기 머쓱해서 뭐라도 하려고 한다.


집밥 만들기에 재미들린 요즘

일단 창문부터 활짝 연다. 잠옷을 갈아입고 인센스를 피우고 바닥을 쓴다. 이 시퀀스를 거치고 나면 몸이 조금 풀려있다. 발끝에 닿을락 말락 했던 침울은 모습을 감추고 이 좁은 집에서 뭘 더 해볼까 드릉드릉하는 ENFP의 기질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이제 문을 닫고 깨끗해진 바닥 위에 매트를 편다. 몸이 가벼우면 땀이 나는 요가를, 몸이 무거우면 스트레칭을 한다. 요가를 마치면 분명 출출할 테니 냉장고를 뒤져 요리를 한다. 배까지 부르면 기운이 더 팽창하므로 이때는 바깥공기를 좀 쐬어줘야 한다. 패딩을 걸치고 마스크를 쓰고 이어폰을 낀 채 집 주변을 살방살방 돌다가 들어온다. 이제는 기타를 튕기거나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다가 잠들기만 하면 된다. 그럼 하루 끝!



홈스윗홈

여기에 얼마나 더 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좋아하고 마음에 드는 것들로 이곳을 채워둔 이상 나는 계속 움직이게 될 거다. 이 좁은 집을 부지런히 가꾸며 얻게 되는 기쁨을 오롯이 누려야지. 덕분에 얻게 된 올해 최고의 풍경, 우리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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